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1화
오래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접근하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고, 경계심이 담긴 걸음걸이.
먼저 움직였다간 피격당할 위험이 있기에, 수풀에 엎드린 채 입을 열었다.
“쏘지 마세요. 좀비 아닙니다.”
그러자 이곳으로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추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손 들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신원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조심스레 양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개 속에서 8명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있던 남자는 들고 있던 소총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군복에 붙어 있는 중위 계급장.
이 사람이 소대장 박성훈인가?
그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 전부 바닥에 내려두세요.”
헌팅 나이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옆에 있는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도 헌팅 나이프와 쇠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군인이 무기를 가져가자, 박성훈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팔에 그건 뭡니까.”
“네?”
“팔에 있는 거요. 손부터 어깨까지 있는 검은색.”
보호대를 말하는 건가?
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보호대에요. 무기 아닙니다.”
“보호대? 그런 보호대는 본 적이 없는데.”
“그게…….”
“벗어요.”
“예?”
“보호대 벗으라고.”
그는 총구를 들이밀며 얘기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총 맞기 딱 좋은 상황.
조심스레 보호대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자, 무기를 가져갔던 상병이 다시금 나타났다.
그는 보호대를 붙잡더니, 금세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
“뭐해, 안 가져가고.”
박성훈의 지시에 상병은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보호대.
보호대는 파티원을 제외한 그 누구도 착용할 수 없고, 가져갈 수 없다.
상병이 혼자 끙끙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군인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도, 보호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성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저거 뭐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박성훈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내가 입술을 벙긋거리자, 박성훈은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얘기했다.
“저 둘 묶어.”
“예?”
“묶어서 데려간다.”
몇몇 병사들이 다가와 내 양손을 노끈으로 묶었다.
설여원도 양손이 묶인 채 얼빠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발악해서 좋을 게 없다.
지금은 순순히 따르고, 진지 내로 진입한 뒤에 차근차근 설명하는 게 좋겠다.
난 설여원을 진정시키며 군인들과 함께 이동했다.
* * *
진지로 들어서자, 군용 트럭과 각종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삼거리를 앞에 두고, 배후의 상가들을 작전 본부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설여원과 나는 전봇대에 묶여 군인들의 행태를 지켜봤다.
“어떻게 할 거야?”
옆에서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나 때문에 포로 신세가 됐으니, 목소리부터 상당히 언짢은 것으로 보였다.
이에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 여기 있는 군인들은 생존자를 구출하러 나온 거야. 우릴 사살할 가능성은 낮아.”
“그럼 묶어두는 이유가 뭐야?”
“그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거지. 지금은 예민해진 상태니,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참나, 언제 죽어도 모르는 마당에 태연하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하잖아. 소대장이 대화할 마음이 생기면 먼저 다가올 거야.”
전봇대에 묶인 채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다리가 저릴 무렵, 소대장 박성훈이 몇몇 병사들과 함께 다가왔다.
그는 내 주머니에서 가져간 신분증을 보며 물었다.
“이름 박재형, 맞습니까?”
“네.”
“주소지가 서울인데, 여기 있는 이유가 뭡니까.”
“지방대 다니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박성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은 겁니까.”
“좀비들 죽이면서 살아남았죠.”
“헌팅 나이프는 어디서 얻은 거죠?”
“궁금한 게 뭐예요?”
“모든 거. 당신이 아는 모든 걸 얘기해요.”
“다 얘기하면, 믿어줄 생각은 있습니까?”
일부러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면 더 꼬치꼬치 캐묻고, 의심할 게 뻔하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박성훈과 눈싸움이 오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박성훈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정 생존자라면, 숨길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만 약속해요.”
“약속?”
“중간에 말 끊지 말아요. 진실만 얘기할 테니까.”
내가 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받아들이냐에 따라, 박성훈의 포용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껏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박성훈에게 들려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박성훈은 얼빠진 표정으로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전부 사실입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런데 뭐? 게임?”
현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나도 잘 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믿어줄 겁니까? 아까 보호대만 봐도 모르겠어요? 원한다면 더 보여드리죠.”
그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어 대뜸 내 이마에 겨누었다.
중위가 권총을 들고 있어?
어디서 권총을 얻었는지 몰라도,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쇳덩어리의 감촉.
총구가 불을 뿜지도 않았는데, 심장에서 아찔한 충격이 느껴지고 혈액순환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증명할 기회는 주고 판단하죠?”
“…….”
박성훈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좌측 건물 3층에 보초 둘, 우측 건물 옥상에 둘. 정면 옷가게가 무기고로 쓰이는 것 같고, 군용차량은 3대.”
설여원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얘기했다.
그러자 박성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하자는 거야. 너희 뭔데, 강도야?”
그러자 설여원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재형이 얘기 못 들었어요?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한 가브리엘. 그게 저예요.”
“…….”
“못 믿겠으면 실험해 보세요. 다 대답해 줄 테니까.”
박성훈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가?
그러자 옆에 있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실험해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거 같습니다.”
“지금 이 얘기를 믿으라고?”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하면 저희에게도 희소식 아닙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살려두는 게 이득입니다.”
박성훈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들고 있던 권총을 내려놓으며 얘기했다.
“너, 저쪽 끝에 가서 보이는지 테스트 해봐.”
갑자기 분위기 시력검사.
병사는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제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현할 테니, 보이는 대로 얘기해요. 알겠습니까?”
설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후다닥 안개 속으로 이동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무렵, 설여원은 병사가 이동한 방향을 유심히 살피며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병사가 몸으로 표현한 정답들을 빠르게 암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안개 속으로 들어갔던 병사가 돌아오고, 박성훈은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답 뭐야.”
“3, 7, 1, 머리 위로 동그라미, 앉았다 일어서기, 점프.”
그러자 돌아온 병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성훈이 맞냐고 묻자, 병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부 사실이라고 했다.
숫자가 아닌 행동까지 섞었는데, 이마저 맞춰버리니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박성훈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뭐라고 했지? 에덤?”
“네.”
“능력이 강화라고 했나?”
“뭘 보여주면 됩니까.”
“할 수 있는 건 전부.”
난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묶어둔 5개의 케이블타이를 끊었다.
케이블타이부터 손쉽게 처리하고. 상체를 감고 있는 밧줄마저 끊었다.
박성훈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 얼얼한 팔뚝과 뻐근한 어깨를 풀며 얘기했다.
“제가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도망쳤을 겁니다. 이제 제 말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박성훈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일행이 있는데,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일행도 당신처럼 능력이 있습니까?”
조금 전까지 말을 놓더니, 다시금 존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죠.”
“……우릴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전시에 민간인이 군인을 찾아온 이유가 뭐겠어요. 도움받으려고 왔죠.”
“…….”
“생존자 구출해야죠. 서로 도움받으면 윈윈이잖아요.”
* * *
빼앗긴 무기를 돌려받고, 박성훈과 함께 보호대를 버려두고 온 곳으로 이동했다.
바닥에 있던 보호대가 눈에 보이지 않아 주변을 살피자, 수풀에서 대기 중이던 최현과 전완수, 이덕배가 모습을 보였다.
보호대를 전완수가 맡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완수는 반쯤 울먹이는 표정으로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설여원과 나를 보고 어찌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전완수도 무전기를 들고 있기에, 이곳에서 내 무전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뒤에 있던 박성훈은 일행의 모습을 보고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입니까?”
“더 있어요.”
“그럼 다른 분들도 데려오세요.”
“그게…… 좀 문제가 있습니다.”
체육관에 있는 일행을 데려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승합차와 버스를 가져오려면 산책로가 아닌 대로로 올라와야 하고, 그럼 좀비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버스에 있는 식량과 각종 장비를 버리고 이동할 순 없었다.
박성훈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뒤에 있는 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양교 앞의 좀비들 숫자는?”
“대략 700마리로 파악됐습니다.”
“산업도로는.”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각 부대에 탄창 지급하고 어제처럼 좀비들 유인해서 생존자 수색 들어간다. 좌측 산업도로 장악하고 대기하도록.”
박성훈의 지시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이에 의구심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제처럼 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수색 지역의 좀비들을 다른 구역으로 유인하고, 근방의 좀비들이 줄어들면 수색 작업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좀비들을 유인한 군인들은 어떻게 빠져나와요?”
“그 정도 역량은 되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 * *
현 상황을 무전기를 통해 이정우에게 알리자, 그는 또 다른 제안을 해왔다.
아이들은 산책로를 통해 먼저 이곳으로 보내고, 본인과 박재우가 남아서 버스와 승합차를 운전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
군인들은 산책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아이들이 이동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이정우와 박재우를 제외한 모든 생존자가 안전하게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속속히 도착하는 생존자들을 보고, 박성훈은 생각이 많아진 모습을 보였다.
이에 박성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전투 앞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정말 생존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늦게 나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으로 보였다.
탈영병들의 말대로, 박성훈은 융통성도 있고 심성도 올바른 사람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아서, 난 박성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탈영병들의 조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병훈과 김석원.
우리가 데려온 생존자들에는 탈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성훈은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기는 압수하고,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
생존자라고 다 똑같은 생존자가 아니다.
예전의 김희연처럼 말이다.
만약 김희연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김희연을 내쳤을 것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으면 언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기에, 위험부담이 컸다.
심지어 이곳엔 총기도 많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박성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격리하면 더 악화될 뿐입니다. 무관심만큼 위험한 게 없어요.”
“…….”
“밝은 친구들이었으니 이겨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