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0화
사이드미러로 뒤편을 살피자, 이정우가 운전하는 승합차가 안개등을 켜고 따라오고 있었다.
안개가 퍼진 길을 따라 듬성듬성 보이는 좀비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언제 봐도 낯설고, 무질서 그 자체였다.
생존자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망해버린 세상을 감상하며 우수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랜 세월 살아온 터전이 폐허로 변한 모습을 지켜보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교차로를 지나 한참을 나아가자 7차로의 넓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차도는 흙먼지가 깔려 있었고, 인도는 개미 한 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양측에서 유유자적 흐르는 드넓은 강물은, 마치 죽음의 강을 연상케 했다.
핸들을 쥐고 있던 전완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살피더니,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전면 유리 너머를 응시하자, 내겐 자욱한 안개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앞에 뭐 있어?”
“장애물이 많아. 높이도 2m는 되는 거 같고. 거의 벽처럼 쌓아뒀는데?”
이덕배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양교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더니, 꽤 튼튼하게 지은 바리케이드가 앞을 가로막은 모양이다.
전완수는 정면의 바리케이드를 살피며 얘기했다.
“소파랑 의자, 책상, 침대, 온갖 잡다한 물건을 빽빽하게 쌓아뒀어.”
“뚫을 수 있겠어?”
“버스로 뚫을 수는 있는데, 바리케이드 너머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하긴, 바리케이드를 부수자마자 좀비들이 바글거리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질 것이다.
후진 기어를 넣기도 전에 좀비들이 앞 유리를 부수고 들어올 테니까.
난 곤란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바리케이드에 약해 보이는 부분 보여?”
“왼쪽이 좀 부실하긴 해. 인도에 설치된 팬스 때문에 제대로 못 쌓은 거 같아.”
“부술 수 있어?”
“속도만 충분하면 이 버스로 못 부수는 건 없어.”
“그럼 왼쪽 팬스 부수고 들어가서, 처음 계획대로 산책로로 빠지자.”
“좀비들이 많으면?”
“그것도 생각해뒀잖아. 산책로 끝에서 잡으면 돼.”
전완수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잡았다.
곧 액셀을 밟은 소리가 들려오고, 서서히 가속을 더 하기 시작했다.
1단, 2단, 3단, 빠르게 올라가는 기어.
난 운전석 뒤편의 손잡이를 쥐고 충격에 대비했다.
“다들 꽉 잡아요!”
전완수의 외침과 동시에 앞 유리 너머로 2m 높이의 바리케이드가 두 눈에 들어왔다.
쾅!!! 콰과각!!
무너진 책상과 의자를 밟으며 덜컹거리는 버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운전석의 기둥을 붙잡고 사방을 주시했다.
장애물을 뚫고 다리 건너로 들어서자, 소리를 듣고 달려드는 좀비 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였다.
양팔을 허우적거리고, 고개를 기이하게 비틀며, 듣기 거북한 울음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좀비들.
전완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급히 핸들을 틀어 우측 차선으로 이동했다.
차내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손잡이를 붙잡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에워싼 좀비들을 응시했다.
쾅! 콰과광! 쾅! 터덩!
수십, 수백 마리의 좀비들이 버스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시속 50㎞로 달리는 버스에 매달리는 좀비라니.
측면의 칼날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좀비도 보이고, 하체가 절단 난 상태에서도 창살을 놓지 않는 좀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좀비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금 합쳐지는 것처럼, 좌우에서 밀려드는 좀비들은 거대한 해일처럼 버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금호강 건너에 인구가 많다더니, 그 많은 인구가 전부 좀비로 변한 건가?
지금껏 우리가 겪은 좀비 웨이브와 전혀 다른 수준의 좀비들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전완수의 입에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육두문자.
전완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다급히 산책로로 이어지는 우측 샛길로 핸들을 틀었다.
기우뚱거리는 버스와 함께 역행하는 중력이 느껴졌다.
난 슬쩍 고개를 틀어 김희연을 쳐다봤다.
김희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대단지 아파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의 초입부터 좀비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맞은편의 대단지 아파트는 가망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샛길을 따라 한참을 나아가자, 금호강을 따라 기다랗게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이드미러로 뒤편을 살피자, 이정우가 운전하는 승합차가 바짝 따라붙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합차의 뒤로, 수백 마리의 좀비가 개 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부아아아앙!!
전완수는 더더욱 액셀을 밟으며 속력을 높였다.
뒤이어 산책로의 끝으로 로터리와 체육관의 테두리가 흐릿한 형태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체육관의 뒤편으로 비좁은 일방통행로가 눈에 들어오고, 좌측으로는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 우측은 금호강이 위치한다.
넓은 대로에서는 좀비들의 압박이 거센 탓에 차량이 전복될지도 모르지만, 여기처럼 좁은 길에서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전완수는 로터리에 들어서자마자 뒤에 있는 생존자들에게 외쳤다.
“다들 왼쪽으로 붙어!”
생존자들은 너도나도 왼쪽으로 달려가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붙잡고 매달렸다.
끼이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지면으로 기다란 스키드 자국이 생기며 버스가 기울기 시작했다.
버스의 좌측 앞바퀴와 뒷바퀴가 슬쩍슬쩍 들린다.
생존자들은 너도나도 비명을 지르며 안간힘을 쓰며 매달렸다.
뒤따라 들어오는 승합차도 버스를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터리로 들어온 좀비들은 버스의 앞면 부에 달린 삼각뿔에 갈리고 찢기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허리케인에 닿아 박살 나는 물건처럼, 로터리로 들어온 좀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마!”
“계속 돌아!”
뒤에서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창틀이고 기둥이고 의자고, 손에 잡히는 뭐든 붙잡고 아등바등 버티며 외쳤다.
전완수는 육두문자를 뱉으며 왼쪽으로 돌아간 핸들을 놓지 않았다.
5분 동안 계속해서 회전하자, 전완수의 얼굴이 붉게 변하고 허리가 우측으로 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지럽고, 속이 뒤집힌다.
나 역시 두 팔이 덜덜 떨리고,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로터리의 입구는 좀비들의 혈흔으로 얼룩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갈린 좀비들의 시신이 차량의 회전 방향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좀비의 시신이 쌓이려고 하면 삼각뿔이 밀어내고, 또 둔덕을 이루려고 하면 삼각뿔로 치워내며 계속해서 좀비들을 처리했다.
처음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무지각한 좀비들을 우리도 무식하게 상대하는 기분.
무슨 전투기 조종사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시속 40㎞로 쉴 새 없이 회전하니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완수는 두 팔을 덜덜 떨며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상체가 점점 우측으로 기우는 것으로 보아,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였다.
난 전완수의 어깨를 붙잡으며 좀비들의 숫자를 살폈다.
5분간 쉬지 않고 좀비들을 들이받아서 그런지, 더는 로터리로 들어오는 좀비들이 보이지 않았다.
“멈춰, 그만 멈춰!”
“아직…… 좀비 새끼들…… 남았다 아이가.”
“없어! 다 죽었다고!”
전완수는 한계에 다다른 걸 느꼈는지, 결국 비상등을 켜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와 동시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핸들 위로 쓰러졌다.
차량은 정차했지만, 몸은 계속해서 회전하는 기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균형감각을 되찾으려 했지만, 세상이 빙빙 돌고 두 다리가 흐느적거렸다.
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사이드미러로 뒤따르는 차량을 살폈다.
다행히 후면을 들이받지 않고, 승합차도 정차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승합차에 타고 있던 일행이 일제히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빠르게 대열을 정리하고 좀비들을 처리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내리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며 토악질을 반복했다.
난 버스에서 내리며 이곳으로 접근하는 좀비가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몇 마리가 살아남아 이곳으로 접근하지만, 이미 삼각뿔에 갈려 하체가 절단되거나, 신체 일부가 훼손된 놈들이었다.
난 헌팅 나이프를 뽑아 들며 놈들의 앞으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다가갔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속에서 연거푸 올라오는 구토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 눈을 껌벅이며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고, 침착하게 좀비들의 안구와 관자놀이에 헌팅 나이프를 찔러넣었다.
뒤이어 정신을 차린 이정우도 내 곁으로 다가와 좀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좀비들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면에 대(大)자로 뻗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메스꺼운 속을 달랬다.
* * *
좀비들의 시신을 정리하고, 어지러운 속을 달래며 다음 계획대로 움직였다.
수색대와 이덕배가 무장하는 동안, 남은 일행은 체육관을 정리하고 진을 쳤다.
난 떠나기에 앞서, 무전기를 들고 이정우에게 얘기했다.
“형, 언제든 떠날 준비하고 기다려야 돼요.”
-알았어, 이동해야 할 때 무전 한 번 더 줘.
굳이 아파트에서 대기하지 않고 이곳으로 다 같이 나온 이유.
길을 뚫기 위해 버스가 필요한 것도 있지만, 방금 지나온 하양교의 우측으로 고속도로나들목이 연결된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시, 언제든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고속도로나들목을 통해 곧장 수성구로 진입할 수 있기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난 레그홀스터에 넣어둔 헌팅 나이프를 뽑으며 수색대에게 얘기했다.
“지금부터 걸어서 이동할 거야. 다들 긴장해.”
원래 승합차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좀비들의 숫자가 예상을 뛰어넘기에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회피 기동할 필요가 있었다.
난 뻐근한 손목을 풀며 얘기했다.
“가자.”
* * *
하양교를 지나 좌측 상가 지역에 군부대가 있다고 했다.
큰길로 올라가는 건 위험부담이 커서, 우린 산책로를 따라 한참이나 직진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인간의 형체가 보이면 망설임 없이 처리하고, 시야가 뻥 뚫린 위치에 좀비가 있으면 설여원과 전완수가 볼트를 발사하며 안전을 확보했다.
전완수는 손에 쥐고 있는 쇠뇌를 이리저리 살피며 얘기했다.
“야,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착착 감기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주변이나 잘 봐.”
“짜식, 빡빡하게.”
전완수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금 쇠뇌를 견착했다.
600m가량 이동하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산책로도 끝이야. 이제 큰길로 올라가야 돼.”
“다들 여기서 기다려. 여원이랑 내가 올라가서 상황보고 온다.”
설여원과 함께 수풀이 우거진 경사로로 들어갔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주변의 좀비들을 살폈다.
설여원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살피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여긴 좀비가 없는데?”
“다 왔나 보네. 군인들은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건물 창문이나 옥상도 확인했어?”
설여원은 가방에 넣어둔 망원경을 꺼내서 꼼꼼하게 주변을 살폈다.
길거리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개 속에서는 시야 확보가 어려우니, 지면에 덫을 설치하고 높은 곳에서 보초를 설 가능성이 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설여원은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얘기했다.
“길 건넜으면 총 맞을 뻔했네.”
“군인들 보여?”
“대각선 200m 거리 상가 건물 3층. 창문에 누구 있어.”
“군인이야 좀비야.”
“생김새는 못 봤는데, 총구가 보여.”
역시, 예상이 맞았다.
어떻게 접근하지?
소리를 내면 좀비들이 모여들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이동하자니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안 되는 군인들이 오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문득, 일전에 이덕배를 구출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손전등.
난 가방에 넣어둔 손전등을 꺼내어 설여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점멸했다.
혹여나 총부터 쏠지도 모르기에, 상체를 숙이고 오른손만 슬쩍 들어 올린 상태였다.
설여원은 망원경으로 상가를 관찰하더니, 뒤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