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9화
이정우는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더니, 구석에 앉아 있는 군인들을 불렀다.
“거기 두 사람, 잠깐 얘기 좀 하죠.”
군인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을 뿐, 이정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조금 전에 들어서 그런지,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정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내게 물었다.
“대화할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 저 둘은 어떡하지?”
“뭐 물어보려고 했어요?”
“금호강 건너의 군인들 위치.”
그러자 옆에 있던 최현이 슬쩍 다가오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건 제가 알아요. 아까 기억 읽으면서 봤습니다.”
“어딘데?”
“하양교 건너서 좌측으로 이동하면 상가들이 밀집된 지역이 나와요. 거기에 방어선 구축한 거 같습니다.”
최현의 대답에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양교가 어디야?”
“금호강 건너는 다리. 7차선인가 8차선 다리 있어.”
“가까워?”
“차 타고 가면 금방이지.”
이정우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며 얘기했다.
“오늘은 이동을 위해 필요한 것들 챙기자. 다들 모여봐.”
결인들이 식탁 주변으로 모이자, 이정우는 뒤에 있는 이덕배와 이현배를 불렀다.
“두 분도 오세요.”
이덕배와 이현배는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과 함께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이정우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이 근방은 어느 정도 안정화됐으니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움직이자고.”
“뭐부터 하면 돼요?”
“나랑 희연이, 진영이, 완수는 근처 대형 마트 돌면서 식량 확보할 테니 재형이랑 여원이, 현이는 주유소 털어줘. 재우랑 덕록이는 배터리 충전하면서 쇠뇌 제작법 익히고, 차량 수리해 줘. 덕배 아저씨랑 현배 아저씨, 만석 아저씨는 차량 점검 도와주세요. 고칠 게 많을 거예요. 혜리는 버스에 남은 물자 꼼꼼하게 확인하고, 식사 준비해 줘. 사람이 많아졌으니 이전보다 식량 조절이 더 어려울 거야.”
이정우의 막힘없는 지시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덕배와 이현배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이정우를 쳐다봤다.
마치 젊은 놈이 똘똘하네,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정우의 역할 분담은 완벽했다.
뒤이어 구석에 있던 천호진이 슬쩍 오른손을 들며 물었다.
“저는…… 뭐해요?”
“아, 미안하다. 깜박했네. 호진이 너는 혜리랑 같이 움직여줘.”
그러자 거실에 앉아 있던 10대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저희도 도울게요! 뭐든 맡겨만 주시면 진짜 열심히 할게요.”
남학생의 말에 이정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10대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이름이 뭐야?”
“성하요. 박성하.”
“박성하, 최지혜, 전수연, 이예정, 너희는 혜리랑 호진이 도와줘.”
그러자 박성하는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저도 싸울 수 있어요!”
호기롭게 얘기하는 박성하의 모습에, 이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든 하겠다며?”
“아니…… 고작 밥이나 하려고 제가…….”
“고작? 밥하는 게 쉬워 보여?”
“예?”
“여기 몇 명인지 봐. 한 끼 준비하는데 25인분이야. 혜리랑 호진이 둘이서 가능할 거 같아?”
박성하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이정우는 손뼉을 치며 움직이자고 했다.
난 주유소로 이동하기 전에, 박재우와 황덕록을 불렀다.
“재우야, 덕록아.”
“응?”
“너희 하나만 더 해줄 수 있어?”
“말만 해. 어떤 거.”
“저 뒤에 있는 군인들 감시해 줘. 허튼짓 못 하도록.”
무기는 빼앗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기에, 어떤 돌발행동을 취할지 모른다.
박재우와 황덕록은 군인들의 모습을 살피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 * *
작업은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이정우와 함께한 사람들은 총 5개의 마트를 확인한 끝에,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확보했다.
예전이었으면 보름은 버틸 식량이었지만, 사람이 많아지면서 식량을 확보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게 되었다.
가능하면 식량은 수시로 확보해야겠다.
연료는 충분히 확보했고, 배터리도 100% 충전되었다.
문제는 차량 점검.
철물점에서 오랜 시간 일해온 이덕배는 우리가 개조한 차량의 문제점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떨어진 철판들을 다시 붙이고, 허점들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박재우와 황덕록은 쇠뇌 제작법을 터득한 뒤에 성능을 높일 수 있겠다며 설계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덕배는 박재우와 황덕록이 만드는 설계도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생들은 전공이 뭐야?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거지?”
“전공이 아니고, 이게 저희의 능력입니다.”
“낮에 얘기했던 캐릭터 능력?”
이덕배는 연신 탄성을 뱉으며 설계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설계도를 살폈다.
쇠뇌에 수직 손잡이를 부착하는 것으로 보였다.
수직 손잡이를 앞으로 빼면서 쇠뇌의 중앙부에 공간이 많아지고, 그 공간을 이용해서 연사 기능을 탑재하는 것이다.
또한 쇠뇌의 상단에는 스코프를 달 수 있도록 높이를 조절하는 것으로 보였다.
쇠뇌에 배율을 달다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아닐 테고, 기존에 저런 쇠뇌가 있었나?
난 전자기기나 장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저런 분야는 박재우와 황덕록에게 온전히 맡기는 게 이로울 것 같다.
바쁘게 돌아간 하루가 저물고, 우린 거실에 둘러앉아 내일의 계획을 세웠다.
이정우는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몰라도, 거실 바닥에 전도를 펼치며 얘기했다.
“여기, 다리를 건너서 우측으로 빠지면 산책로가 나옵니다.”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은 다 알지. 금호강 산책로 아니야.”
이덕배가 얘기하자,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산책로 끝으로 이동하면 체육관이 하나 나올 거예요.”
“축구장 옆에 있는 체육관. 알아.”
“그 주변은 건물도 없고,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좀비가 없을 거예요. 여기에 버스를 정차시켜두고, 수색대가 승합차로 이동할 겁니다.”
“우리는 체육관에서 대기하라고?”
“예, 군부대가 오발할 가능성도 있고, 호의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서 다 같이 이동하는 건 위험해요.”
“수색대는 누구야.”
이덕배의 물음에 이정우는 나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여기 있는 재형이, 여원이, 완수, 현이가 수색대에요. 수색대가 먼저 군인들과 접선하고, 추후 안전이 확보되면 합류합니다.”
“아니야, 나도 같이 들어가지.”
이덕배의 말에 난 눈꼬리를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전한 방안을 제시했으니 순순히 따를 줄 알았는데, 본인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덕배는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금호강 건너 은신처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있어?”
그러자 이정우는 지도를 살피며 얘기했다.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도에 표시해 주세요.”
“지도에 없어.”
“예?”
“지도에 없다고. 워낙 예전에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라서 철거작업 들어갔거든. 그것도 예산문제로 2년간 방치해서 폐건물이나 다름없어. 지도에도 안 나올걸?”
이덕배는 지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얘기했다.
“여기야.”
“여긴…… 산인데요?”
이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덕배는 호탕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으하핫! 그래, 등고선 끝자락 여기.”
“산에 아파트가 지어졌다고요?”
“시골엔 이런 곳 많아. 산이 삼면을 감싸고 있지.”
이정우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지도를 살피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밖으로 나옵니까? 여기 등고선의 맞은편은…… 논밭으로 나오는데요.”
“맞아. 학생 지도 볼 줄 아는구나?”
“예?”
“논길이 유일한 출입구야.”
“…….”
“왜 철거하는지 알겠지?”
혼자 재밌다는 듯이 웃는 이덕배와 달리,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난…… 어처구니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저러면…… 저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경운기와 씨름을 했을 것이다.
왜 철거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정우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은신처는 여기가 끝이죠? 거리가 꽤 되네요.”
“아니, 또 있어. 금호강 건너는 산업도로랑 연결돼서 인구가 좀 많거든.”
“또 어딥니까?”
“하양교 건너면 바로 앞에 대단지 아파트가 보일 거야. 거기도 생존자가 있어.”
“너무 대로변 아닙니까?”
“바로 앞은 대로지만, 배후로 산책로랑 금호강이 흘러서 수비하기 좋거든.”
이정우는 이덕배의 설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도에 표시했다.
안전한 이동 루트와 좀비들이 정리되지 않은 지역을 표시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현 상황은 덕배 아저씨가 아는 거랑 다를 수도 있어요.”
“왜?”
“군인들 머릿속 들여다봤을 땐…… 좀비밖에 안 보였어요.”
“아파트가 함락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네, 등고선 쪽 아파트는 모르겠는데, 하양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는 좀비들이 가득한 거 같았어요.”
최현의 부가적인 설명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정우는 안건을 정리하며 얘기했다.
“하양교에 바리케이드가 있다고 하니, 버스로 밀고 들어가죠. 좀비들의 숫자가 적으면 다리 건너자마자 흩어지고, 좀비들이 많으면 다 같이 산책로로 이동합니다. 체육관 앞의 로터리랑 축구장을 이용해서 좀비들 처리하고, 그 뒤에 흩어지기로 하죠.”
“나는 어떻게, 수색대랑 같이 움직여?”
“네, 덕배 아저씨는 수색대랑 같이 움직여주세요.”
“알겠네.”
“내일 아침, 여명이 밝으면 이동합니다. 다들 일찍 자요.”
안건이 정리되자, 다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한 사람, 김희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연아 뭐해.”
김희연을 쳐다보며 묻자, 그녀는 이마를 긁적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김희연의 표정을 살피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설마.
“희연아.”
“금호강 맞은편의 아파트…… 아직 안전하겠죠?”
불안한 표정.
떨리는 목소리.
김희연의 본가가 저곳인 모양이다.
조금 전 최현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김희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에 힘을 주더니, 한 차례 코를 훌쩍이며 내게 물었다.
“우리 가족…… 안전하겠죠?”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
“엄마 아빠, 언니요.”
솔직하게 말하면…… 생존율이 희박하다.
최현이 군인들의 기억을 통해 봤다는 좀비들.
사실상 아파트에 있던 생존자들은 전멸했을 가능성이 크다.
괜찮을 거라는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된 희망도 희망이기에,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내 들었다.
“다들…… 괜찮을 거야.”
거짓말일지라도,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했다.
쓰디쓴 현실이 아닌 달콤한 희망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 * *
동쪽 하늘 너머로 여명이 밝아올 무렵,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할 채비에 나섰다.
아침은 간단하게 빵으로 해결하고, 옥상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과 각종 장비를 모조리 버스에 실었다.
여유롭던 버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덕배는 마지막까지 지도를 살피며 긴장한 모습을 보이더니, 뻐근한 어깨를 풀며 얘기했다.
“준비 끝났어. 출발하지.”
이덕배의 말에 운전석에 있던 전완수가 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그러자 옆에 있던 승합차도 시동을 걸고, 이정우의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야. 길 뚫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무전치고 회피 기동해.
“알겠습니다.”
전완수의 대답과 함께 정차했던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비 소굴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긴장되지만, 가득 찬 연료만큼이나 자신감도 있었다.
어젯밤 몇 번이고 돌린 시뮬레이션 때문인지, 실패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