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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78화 (78/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8화

이정우는 아파트 옥상 난간에 기대어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난 그의 옆에 앉아 푸르른 하늘을 가만히 지켜봤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울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큼 좋은 게 있을까?

착잡하던 마음도, 흘러가는 구름처럼 말없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정우는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옥상 바닥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

“재형아.”

“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는 이유가 있을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섭게.”

싱겁게 웃으며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금호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희망의 불씨를 붙잡고 있던 이정우가, 지금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형이 그랬잖아요. 우리가 사는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고.”

“…….”

“헐뜯고, 훔치고, 괴롭히지 말고 사람답게 살자면서요? 저한테 사는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한 사람이 형이에요.”

“…….”

“장군이도 그래서 키우는 거잖아요. 형 말대로 다들 기운도 되찾았고.”

이정우는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입에 물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게 너무 힘들다.”

“…….”

“내가 바보 같은 신념을 고수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무서워. 내가 가는 길이 틀린 길인데, 틀린 길로 사람들을 인도할까 봐. 그게 무섭다.”

“지금처럼 하면 돼요. 잘하고 있는데 그러시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이정우는 눈썹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솔직하게 얘기할까?”

“얘기해요.”

“금호강 건너. 솔직히 가기 싫어.”

이건…… 예상 못한 대답인데.

금호강 건너를 가지 않겠다는 건…… 김희연을 배제시키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정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위험한 거 뻔히 아는데, 희연이 때문에 모두를 데리고 들어가야 돼. 그런 비합리적인 요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게 내 자리야.”

“…….”

“그게 좀…… 버겁다.”

이정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였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형이 시켜서 애들이 따른다고 생각해요?”

“……뭐?”

“다들 똑같은 심정이에요. 부모님은 걱정되고, 메인 퀘스트는 클리어해야 하고, 그래서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거잖아요.”

“우리는 그렇지.”

이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그렇다고?

우리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

소리결이 아닌 이곳의 생존자들을 말하는 건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정우는 폐부 깊숙이 담배 연기를 삼키며 얘기했다.

“아까 스케치북 들고 온 아이, 눈이 너무 예쁘더라.”

“…….”

“여기 있는 애들한테 금호강 건너로 같이 가자고 얘기할 수 있어? 앞으로도 계속, 더 강한 변종, 더 강한 좀비가 나올 텐데, 그때도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어?”

“…….”

“여기 두고 가면 이 사람들한테 남는 건 죽음뿐이야. 세 번째 에피소드 시작되면 독 안개가 퍼질 테니까. 그렇다고 모두 데려가자니…… 서로에게 부담이야.”

“…….”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정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사람이 좋다는 건 칭찬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동시에 우유부단하다는 말도 된다.

모두를 위한 길을 찾고 싶은 마음, 나도 잘 알겠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답안이 존재할까?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고, 그런 손해를 서로 양보하며 나아가는 게 인간이란 집단이다.

난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은 지금 양손에 쥐고 있는 걸 하나도 놓기 싫다, 이거죠?”

“욕심인 거 아는데, 무엇 하나 놓기 싫어.”

“동전 꺼내 봐요.”

“동전? 아까는 사람 목숨을 동전에 맡기냐고 뭐라 했잖아.”

“됐으니까 빨리.”

이정우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주머니에 넣어둔 동전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500원짜리 동전.

난 이정우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앞면이 나오면 데려간다, 뒷면이 나오면 두고 간다.”

“아니…… 잠깐만.”

“그만 고민해요.”

팅-!

엄지로 동전을 튕기자, 이정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회전하는 동전을 유심히 바라봤다.

앞면, 뒷면, 앞면, 뒷면.

허공에서 수십 번 회전하며 위치를 바꾸는 동전.

텁!

동전을 붙잡자, 이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 손등을 응시했다.

난 이정우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다가, 손에 쥔 동전을 있는 힘껏 뒷산으로 던져버렸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동전을 보고, 이정우는 얼빠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에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걱정이 사라졌네요?”

“…….”

“어떤 면이 나왔을 거 같아요?”

“아니 그걸…….”

“마지막에 생각한 면, 그거대로 해요.”

“…….”

“결과가 어떻든 악역은 제가 맡을 테니까.”

해결될 고민이면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면 고민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해결되지 않을 고민을 붙잡고 출발선에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일단 땅을 박차고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이 많아져서 이정우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그래왔던 것처럼, 일단 시작하면 된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든, 그 결과가 우리에게 답을 줄 테니까.

이정우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얘기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후회 안 해요. 한번 해보니까, 악역이 제 스타일이더라고요.”

이정우는 싱겁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뒤이어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들어가자, 바빠지겠네.”

* * *

거실에 모인 생존자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얘기했다.

다들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생존자들의 대표 격인 이덕배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현배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니,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학생이 하고 싶은 말은…… 우리더러 같이 움직이자는 거지?”

“선택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정우는 이전보다 안정적이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이덕배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선택은 무슨 선택? 너희들 말이 사실이면 우리한테 선택권은 없어. 세 번째 에피소드? 거기로 들어가면 독 안개가 퍼진다며.”

“그걸 선택하라는 게 아닙니다. 저희의 지시에 따르겠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나더러 학생의 지시를 따르라고?”

이덕배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말아쥐자, 옆에 있던 이현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형님, 지금까지 저 학생들이 하라는 대로 해서 손해 본 거 있어요?”

“게임 좀 안다고 우리 목숨을 맡기라는 거 아니야! 이게 게임이야? 사람 목숨이 걸린 현실이라고!”

“형님,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같이 힘을 합치자는 거지.”

“힘을 합치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아크? 그게 부산에 있다며. 그런데 왜 수성구랑 구미, 포항까지 가야 돼?”

“학생들 퀘스트가 거기 있다잖아요. 그걸 해결해야 아큰가 뭔가에 들어갈 수 있고.”

“퀘스트를 클리어한 사람만 아크에 들어갈 수 있으면 우리는 뭔데? 우리 같은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우린 입장권을 어디서 구하냐고.”

이덕배의 말에 박재우가 슬쩍 오른손을 들며 얘기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왜, 근거야 뭐야.”

“게임에서도 그랬거든요. 민간인은 출입증 없이도 아크에 들어갈 수 있는데, 저희 같은 플레이어는 능력을 지니는 대신 입장권이 필요한 거예요.”

박재우의 말에 이덕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최만석이 입을 열었다.

“우린 학생들처럼 능력 못 얻어?”

최만석의 질문은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확신이 없기에,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 주었다.

“저희 중에도 플레이어가 아니었던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면서 플레이어로 등극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쩌면 두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럼 우리도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거네?”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장단점이 있죠. 일반인은 퀘스트에 자유롭다는 장점만큼 능력이 없다는 단점이 있고, 플레이어는 능력을 지닌 대신 퀘스트라는 제약이 있고요.”

이현배와 최만석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이덕배를 쳐다봤다.

여전히 고민이 많아 보이는 모습.

쉽게 말하면 초능력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팀을 이루는 상황이다.

이덕배는 혹시 모를 불합리한 요소를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여러분이 일반인이라고 해서 불합리한 일을 겪진 않을 거예요. 저희가 무리한 요구나 부탁을 하지도 않을 거고요.”

“…….”

“솔직하게 말하면 여러분과 여기서 헤어지는 게 우리에겐 이롭습니다. 아이들도 많고, 전투 인력이라면 덕배 아저씨, 현배 아저씨, 만석 아저씨, 그리고 호진이가 전부니까요.”

“그럼 왜 우리랑 같이 가겠다는 거야?”

“단순한 호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너무 덤덤하게 얘기했나?

이덕배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이덕배라도, 단순한 호의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매일이 생사의 갈림길이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아둔한 짓이니까.

난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희 팀의 대표는 여기 있는 정우 형이에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갈라지자는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우 형이 반대했어요.”

이정우를 가리키며 얘기하자,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이정우에게 쏠렸다.

이덕배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이정우를 쳐다보더니,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우 학생, 저 말이 사실이야?”

“맞습니다.”

“이유가 뭐지? 나도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내가 학생들이라도 우리를 두고 갈 텐데, 굳이 데려가려는 이유를 모르겠어. 납득시켜줄 수 있겠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당한 이유와 근거로 납득시켜야 하는 세상.

들으면서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현 상황이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불신을 새겼는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덕배는 대학생들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있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정우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10세 미만의 아이만 6명이었다.

4살에서 7살 사이의 아이들.

이덕배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함묵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려움, 걱정, 불안 등이 뒤섞여 시무룩한 표정의 아이들.

자의든 타의든, 한번 어른들에게 버려짐을 겪은 아이들이었다.

이덕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미간을 찌푸리더니,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나는…… 뭘 하면 되겠나? 내가 자네들과 함께 한다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본인이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할 텐데, 먼저 자존심을 내려놓는 이덕배의 모습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저런 마음만 지니고 있다면, 분명 필요한 순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난 이덕배와 눈높이를 맞추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이들 곁에 있어 주시면 됩니다.”

이덕배는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난 뒤에 있는 결인들을 쳐다봤다.

상의도 하지 않고 이정우와 내가 내린 결단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정우와 내 의견에 따라주는 모습을 보였다.

냉장고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설여원도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기분 묘하네.”

“왜?”

“옳은 선택인 거 같은데, 무거운 느낌?”

설여원의 말에 결인들은 공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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