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7화
보호대를 벗고 두 팔의 상태를 확인해 보니, 살점이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진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기겁하더니, 다급히 양팔을 치료해 주었다.
이래선 골밀도만 높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피부가 너무 연약하다.
다른 스탯도 최대치로 올리면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려나?
정진영은 치료를 마치고 내 양손을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움직여봐. 지금은 어때?”
“이제 괜찮아요.”
“야 인마, 내가 안 따라왔으면 어쩔 뻔했어?”
난 싱겁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다시금 보호대를 착용하고, 헌팅 나이프를 쥐고 1층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모든 좀비가 정리된 상태였고, 두 명의 군인은 총기를 내려둔 채 양손을 들고 있었다.
옥상에서 설여원이 쇠뇌를 겨누고 있기에, 둘 다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두 남자는 정진영과 나를 발견하고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읊조렸다.
“새, 생존자?”
“생존자 처음 봐?”
“몇 명이나 됩니까. 이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한 거예요?”
표정이 묘하다.
생존자를 학살하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의 표정에선 기대감이 엿보였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군대는 어디 있지?”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대답하기 어렵다는 건가?
손에 쥐고 있던 헌팅 나이프를 목젖에 갖다 대자, 남자들은 기겁하며 대답했다.
“그, 금호강 건너.”
“너희는 뭐야. 탈영병이야?”
남자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영의 예상이 맞았다.
크어어어어…….
먼발치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앞으로 몇 분 내에 다른 곳에 있던 좀비들이 모여들 것이다.
이에 남자들의 소총을 빼앗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정진영이 남자들의 뒤에서 쇠뇌를 겨누고, 난 그들을 인솔해 빌라 옥상으로 향했다.
* * *
탈영병들을 데리고 103동 807호로 돌아왔다.
이들의 이름은 이병훈과 김석원.
둘 다 상병이었다.
소총과 대검, 무전기를 빼앗은 채 거실 바닥에 무릎 꿇리고, 심문을 시작했다.
이병훈과 김석원은 스물에 동반 입대해서 군 복무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이덕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가 너희들 개인사 얘기하래? 금호강 건너에서 뭐 했냐고!”
이덕배가 윽박지르자, 두 사람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이에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면, 두 사람이 피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제야 밖으로 나왔는지, 차근차근 얘기해요.”
이병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퍼석한 입술을 핥더니,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랐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어요.”
정체불명의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은 새벽, 생활관에 있던 병사들이 발작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군부대는 아비규환에 빠졌다고 한다.
물리면 감염된다는 정보가 없었기에,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실탄 허가 명령도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 맨손으로 좀비들을 어떻게 제압하겠는가?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이 가장 먼저 대검을 들고 좀비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여단장이 실탄 사용을 허가했다고 한다.
실탄 허가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사이 태반의 병사가 사망하거나, 감염되었다고 한다.
굳이 상황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당시의 참상이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자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상황은 더욱 암담했을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는 데 20분이 걸렸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완전무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뒤이어 상부로부터 지시가 내려왔고, 여단장은 생존한 2대대와 3대대의 병사들을 이끌고 육본으로 이동했다.
부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까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했기에, 여단장의 빈자리를 작전 과장이 인수인계 받았다고 한다.
작전 과장은 1대대를 진두지휘하며 부대 내 수비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남은 병력은 2개 소대가 전부.
중대 규모도 안 되는, 대대라는 말조차 우습게 들리는 인원이었다고 한다.
사태를 수습한 뒤에 위성통신을 통해 상부와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기하라는 명령이 전부였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보름 전에 끊겼고, 물자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 가족의 안부를 걱정한 병사들, 자유를 갈망하는 병사들이 속속 탈영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극상이 벌어졌다.
작전 과장이 탈영병들의 손에 사망하고, 체계가 무너졌다고 한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마당에 연락도 끊긴 본부의 명령을 가만히 앉아서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난 씁쓸한 표정으로 부엌에 있는 이덕배를 쳐다봤다.
이덕배는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떨군 채 들지 못했다.
난 탈영병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이름으로 부를게요. 이병훈, 김석원 씨.”
“…….”
두 사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김석원에게 물었다.
“김석원 씨, 전체적인 상황을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새벽에, 금호강 건너에서 들려온 총성은 뭡니까? 두 분이 격발한 거예요?”
“아, 그건 여단을 탈출한 뒤의 상황인데…… 그것도 말씀드릴게요.”
김석원이 편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그에게 물병을 건넸다.
그는 목이 많이 탔는지,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옷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뒤이어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부대 내에서 병사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소대장이 있었다고 한다.
소대장 박성훈 중위.
남자답고, 이성적이며,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사망한 작전과장의 시신을 보고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살아남은 병사들을 모아 연설을 했다.
-지금부터 작전 과장님의 모든 권한을 내가 인계한다. 위계질서를 잃은 군인은 용병이나 다름없다. 나와 군인으로 살아남을 병사들만 이곳에 남도록.
그의 말에 몇몇 병사들의 질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군인이기를 택하면, 계속 이곳에 남아 여단 수비에 집중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박성훈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군인이다. 고로, 지금부터 너희들과 함께 생존자 수색을 시작할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위계질서를 잃은 군인은 용병이나 다름없다! 더는 개인 활동을 용납할 수 없으니, 용병으로 살아갈 놈들은 지금 당장 저 밖으로 나가고, 나와 함께 싸울 병사들만 이곳에 남도록!
부모님의 안부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사를 걱정한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탈영하고, 소대장은 남은 병력으로 생존자 수색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대장 박성훈이 가장 먼저 도착한 지역이 금호강 건너였고, 그곳에서 좀비들과의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석원과 이병훈은 전투 과정에 탈영을 결심했다.
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물었다.
“여단을 빠져나오자마자 탈영을 결심했다, 이겁니까?”
“…….”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운을 떼지 못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최현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김석원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대뜸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김석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최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김석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저쪽, 군인 아파트 살아요?”
“그걸 어떻게…….”
최현의 능력은 독심술.
데니의 능력을 이용해 김석원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모양이다.
최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게 얘기했다.
“재형아, 상황이 많이 안 좋다.”
“왜, 금호강 건너에 좀비가 많아?”
“좀비도 좀비지만, 아무래도 알파가 있는 거 같다.”
알파라면…… 알파 변종을 말하는 건가?
일명 거미.
김석원은 얼빠진 표정으로 최현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뒤이어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몰라도 돼요. 설명하자면 길어.”
최현은 김석원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파 변종만 3마리는 되는 거 같고, 좀비들도 수천 마리는 되는 거 같아.”
“데니의 능력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감정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상대방의 생각이나 기억도 읽을 수 있어. 일단 여기 있는 군인들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
김석원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자, 옆에 있던 이병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다, 당신 뭐야? 초능력, 뭐 그런 거야?”
“비슷하지.”
최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이병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그럼 군인 아파트, 거기는 안전해? 거기 상황도 볼 수 있어?”
“아까 내가 한 얘기 못 들었어? 생각이랑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거지, 천리안이 있는 건 아니야.”
“대체 그런 능력을 어떻게…….”
“설명하기 귀찮은데…….”
최현은 입맛을 다시며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짓했다.
라스트아크에 대해서 얘기해도 괜찮냐는 표정이었다.
이미 데니의 능력을 보여줬으니 숨길 수도 없지 않은가?
오른손을 휘젓자, 최현은 라스트아크의 배경부터 캐릭터의 능력, 설정, 변종에 대한 것까지 설명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실개천 너머의 생존자들은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최만석이 이덕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봐 덕배, 자네는 알고 있었어? 아니, 지금 이걸 나더러 믿으라고?”
“나도 처음엔 자네랑 똑같은 반응이었어. 하지만 자네도 두 눈으로 봤잖아? 이 학생들의 능력은 진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떻게 믿어?”
“못 믿겠으면 저기 있는 재형 학생이랑 팔씨름이라도 해봐. 저 친구 힘이 장사니까.”
최만석은 망설임 없이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팔씨름 자세를 취하며 손목을 푸는 최만석.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팔뚝을 지니고 있었다.
못 믿겠다고 하니, 직접 보여줘야지 어쩌겠는가.
난 그의 손을 잡고 살짝 악력을 더했다.
“아아아!! 아아악!!”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 그는 지렁이처럼 온몸을 비틀며 난리를 쳤다.
손을 놓아주자, 최만석은 오른손을 덜덜 떨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내 얼굴을 쳐다봤다.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동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곧 스케치북을 들고 왔던 5세 남짓의 아이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삼촌 슈퍼맨이야?”
“…….”
“하늘도 날 수 있어?”
그러자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아가 쭈뼛거리며 얘기했다.
“슈퍼맨은 외국인이야. 그리고 파란 옷 입어야 돼.”
“진짜? 그럼 삼촌은 슈퍼맨 아니야?”
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시금치 많이 먹으면 아저씨처럼 강해질 수 있어.”
고작 스물하나의 나이, 나 스스로 아저씨라 표현하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병훈과 김석원은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뒤이어 김석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저, 저기…… 그럼 혹시 저 끝에 있는 군인 아파트도 여기처럼 생존자가 있나요?”
옆에 있던 이병훈도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었다.
탈영한 이유가 이거였나?
금호강 건너에 있던 이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군인들이 이곳은 수색 범위에서 제외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둘이서 나왔겠지.
난 부엌에 있는 이덕배를 쳐다봤다.
실개천 너머의 상황은 나보다 이덕배가 잘 아니까.
이덕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눈살을 찌푸리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군인 아파트는…… 이미 좀비들의 손에 넘어간 모양이다.
김석원과 이병훈이 자세한 설명을 바라기에, 난 이덕배를 쳐다보며 설명을 부탁했다.
이덕배는 이마를 문지르며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거긴…… 안개 퍼지고 일주일도 안 돼서 전멸했어.”
이덕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군인들은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이덕배는 이 자리가 석연치 않은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옆에 있던 이현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저쪽, 학교 앞 원룸촌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살았어요. 여기 실개천 너머의 상황을 알게 된 건 한 달 전이 처음이고, 그때 이곳의 대표를 하고 있던 분이 알려줬습니다.”
“…….”
“여기를 은신처로 잡은 게 가장 외진 아파트라서 그런 거고, 큰길에 있는 아파트는 진즉에 좀비들한테 포위돼서 전멸했다고.”
두 명의 군인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상황을 지켜보던 이정우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난…… 말없이 이정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