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6화
아크가 대피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잠시나마 정적이 내려앉았다.
설여원은 팔짱을 낀 채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저번에도 아크에 도착해서 생각하자고 일단락된 거 아니야?”
“여원이 말이 맞아. 메인 퀘스트가 두 번째 에피소드랑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우리야 좋은 거지. 굳이 지금부터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안 그래?”
정진영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전완수와 최현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난 바닥에 내려둔 기름통을 전완수와 최현에게 건네며 얘기했다.
“지금은 처음 계획대로 주유소부터 확인하고…….”
탕!!
그 순간, 근방에서 들려온 총성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체를 숙였다.
최현은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내게 물었다.
“뭐야, 설마 이쪽 겨눈 거야?”
고막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파열음이었다.
어림잡아도 근방 200m 내외.
하지만 이곳으로 탄알이 날아들진 않았다.
지금은 도처에 좀비들이 깔려 있기에, 좀비를 보고 격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난 최현과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둘은 들어가서 실내에 있는 사람들한테 알려. 창문 닫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넌 어쩌려고, 여원이랑 진영이 형은?”
전완수가 머뭇거리기에,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상황 파악하고 돌아갈게.”
“야 인마, 좀비랑 싸우는 거랑 다른 문제야! 잘못하면 총 맞는다고!”
“그렇다고 아파트로 이동하게 둘 순 없잖아? 여원이가 있으니 괜찮아. 군인들 이동 루트만 확인할게.”
전완수가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옆에 있던 최현이 그의 팔을 잡으며 얘기했다.
“재형이가 괜찮다잖아.”
“…….”
전완수는 설여원과 정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둘 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내 뜻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들고 있던 쇠뇌를 내게 건네며 얘기했다.
“정찰만 하고 돌아와.”
“무리하는 일 없을 거야. 정우 형한테도 대신 전해줘.”
전완수와 최현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103동으로 향했다.
총성을 듣고 103동 입구로 나온 이덕배와 이현배는 전완수와 최현의 손에 이끌려 다시금 8층으로 올라갔다.
군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건 부담스럽지만, 우리에겐 설여원이 있다.
시야 확보가 가능한 이쪽이 더 유리하다.
난 설여원과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좌측 빌라 기억 나죠? 어제 우리가 왔던 길이요.”
“알아. 거기로 이동하자고?”
“소리가 그쪽에서 들렸어요. 좀비들도 왼쪽에 있는 놈들부터 움직이는 추세고.”
정진영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손도끼를 손에 쥐었다.
설여원은 내려두었던 쇠뇌를 견착하며 내게 얘기했다.
“이번엔 내가 선두. 재형이랑 진영 오빠가 후방 봐줘요.”
설여원을 필두로, 우린 비좁은 골목으로 이동했다.
* * *
타탕! 타탕!
카하악! 크어어어!!
총성과 가까워지자,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린 4층 빌라의 옥상에 자리 잡고 좀비들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설여원은 망원경을 들고 어느 한 지점을 살피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얘기했다.
“100마리가 넘어. 근방의 좀비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어.”
“군인들 모습은 보여?”
“두 명. 여기서 100m 거리야.”
“둘이서 좀비들을 막아내고 있다고?”
“커다란 트럭 위에서 버티고 있어. 저대로 두면 오래 못 버틸 거야.”
설여원은 군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뒤이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얘기했다.
“엎드려!”
영문은 몰라도, 설여원의 말에 따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쾅!!
뒤이어 전신이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수류탄을 투척한 건가?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전신의 털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총포를 이용한 전투는 아군의 정신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멍한 정신으로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켜, 옥상 난간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대략 60m 앞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설여원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귀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의 굉음으로 인해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였다.
난 번쩍이는 총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단 두 명의 군인.
좀비를 사살하기 위함이라면 최소한 분대 단위로 움직여야 할 텐데, 두 명이서 이동하는 게 말이 되나?
뒤이어 옆에 있던 정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야, 저것들 혹시 탈영병 아니야?”
“탈영병이요?”
“무슨 군인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싸워? 체계가 없잖아. 그리고 군대가 움직이면 운송 차량도 있어야 하는데, 저것들 트럭 위에서 싸우고 있다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두 눈을 껌벅이며 정신을 다잡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망원경을 들고 군인들의 모습을 살폈다.
“둘이서 뭐라고 얘기하는 거 같은데…… 분위기가 군인 같지는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상명하복 느낌이 없어.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움직이는 것도 자기들 마음대로고.”
정말 탈영병인가?
난 설여원과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둘 다 따라와요.”
“어디 가려고?”
설여원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에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얘기했다.
“탈영병이면 구출해야지.”
“미쳤어? 총 들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구출해? 잘못하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어.”
“총알이 무제한은 아니잖아. 상황 봐서 탈출 루트 확보해 주고, 저 사람들한테 정보를 얻어야 돼.”
“무슨 정보. 목숨 걸어가면서까지 얻어야 할 정보가 어디 있다고 그래?”
“저기 있는 둘, 금호강 건너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야.”
설여원은 입술을 달싹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내가 생각한 바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 봐. 새벽에 금호강 건너에서 총성이 들렸어. 그건 좀비들이 많다는 뜻이잖아? 생존자들이 제대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면 예전의 이곳처럼 좀비가 정리된 상태여야 정상이야.”
“금호강 건너의 은신처가 이미 함락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그렇지.”
“군인들이 생존자를 사살하는 총성인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정보가 필요하다는 거야. 좀비를 쏜 건지, 생존자를 쏜 건지.”
설여원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희연이 본가가 금호강 건너잖아. 아직 모르겠어?”
“이해가 안 돼.”
“완수랑 현이를 봐. 부모님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퀘스트가 완료됐잖아? 본가 일대의 상황만 파악하면 퀘스트가 완료되는 거야.”
“그 둘은 친동생한테 전해 들어서 완료된 거잖아.”
“그래, 전해 들었지. 아직 모르겠어?”
“……저기 있는 군인들한테 금호강 일대의 상황을 전해 들으면 희연이도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거야?”
“그렇지. 우리가 위험부담을 떠안고 금호강 건너로 이동할 필요가 없는 거야.”
설여원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여전히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만약 저 둘을 구출했는데 우릴 협박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탄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탄알도 없는 군인이 우릴 어떻게 협박해? 우린 쇠뇌를 들고 있는데.”
설여원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정진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재형이 말대로 해보자. 빌라촌만 잘 활용하면 좀비들 따돌릴 수 있어.”
“오빠, 잘 생각해야 돼요. 저기 있는 군인들이 무전기라도 들고 있으면…….”
쾅!!
그 순간, 또다시 굉음이 울리며 좀비들의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몇 개나 던지는 거야?
정진영은 난간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얘기했다.
“야, 좀비들 얼추 정리되고 있는 거 같은데?”
정진영의 말을 따라 설여원은 난간 너머를 살폈다.
한참이나 군인들을 응시하던 설여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얘기했다.
“화력으로 찍어눌렀어.”
“좀비들이 전멸했다고?”
“아니, 아직 남긴 했는데…… 20마리가 안 돼. 거의 전멸이야.”
“군인들은? 여전히 소총 견착하고 있어?”
설여원은 대답 대신 망원경으로 군인들의 행동을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총알 다 떨어진 거 같아. 총구에 뭘 달고 있어.”
그러자 옆에 있던 정진영이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착검이네. 탄알 다 떨어진 거야.”
이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탄알이 남아도 착검은 할 수 있어요.”
“좀비가 20마리는 있다잖아. 탄알이 남았으면 트럭 위에서 사살해야지, 미쳤다고 근접전을 하겠어?”
난 잠깐의 고심 끝에 설여원과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좀 더 붙어서 확인하죠. 따라와요.”
* * *
빌라 옥상을 타고 넘으며 최대한 군인들의 근처로 접근했다.
뒤이어 좀비들과 싸우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막혔어!”
“벽 쪽으로 붙어! 등 보이지 마!”
내려가서 저들을 돕는 게 좋을까?
아니야, 잔뜩 긴장한 저들은 좀비와 우리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군복이 아니면 일단 공격할 게 뻔하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설여원이 쇠뇌를 견착하며 1층을 조준했다.
퉁-!
순식간에 발사된 볼트는 지면에 있는 좀비의 정수를 뚫고 들어갔다.
크어어어어!!
그러자 몇몇 좀비들이 이곳을 쳐다보며 빌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소리야.”
벽에 붙은 채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던 군인들은 좀비의 정수리에 박힌 쇠뇌 촉을 보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설여원이 쇠뇌를 발사한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난 헌팅 나이프를 고쳐 쥐며 다급히 빌라의 계단으로 향했다.
카하아악!! 크어어어!!
계단을 울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난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접근한 좀비들의 안구에 일사불란하게 칼끝을 내질렀다.
찌르고, 뽑고, 찌르고, 뽑고, 가볍게 스탭을 밟으며 좀비들을 처리했다.
카하악!!
좌측에서 난간을 타고 올라온 좀비가 질척한 타액을 뱉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재빨리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려 했지만, 다른 좀비의 안구에 박혀 뽑히지 않았다.
날이 무뎌진 건가?
손에 쥐고 있던 헌팅 나이프를 놓고, 좌측에서 달려드는 좀비의 안면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뻑!!
손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
좀비의 안면이 일그러지며 몸이 꺾이는 모습을 보였다.
[99%]
그와 동시에 보호대의 내구도가 1% 감소했다.
어젯밤, 대장 좀비를 처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보호대의 내구도는 3분에 1%씩 재충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자가재생기능이 있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80% 이상 손상되면 12시간의 복구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20% 밑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조절만 잘하면 주먹으로도 싸울 수 있다.
현재 내 근력 수치는 22.
일반인의 4배, 혹은 6배나 강한 힘을 지녔다.
증가한 수치만 봐도 좀비들의 안면을 충분히 으스러뜨릴 수 있지만, 팔을 뻗으며 발생하는 속도까지 생각하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예 주먹으로 싸워봐?’
뻑! 빡! 퍽! 떠걱!
계단에 들어찬 좀비들의 안면에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지르며 길을 뚫었다.
헌팅 나이프로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간결하고, 물 흐르듯 동작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온 9마리의 좀비를 순식간에 처리하고, 좀비의 안구에 박힌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찌릿-
“윽!”
그러자 손목과 팔꿈치, 어깨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좀비들을 때려죽일 땐 타격감에 취해 몰랐는데, 증가한 근력을 뼈마디가 버티지 못했다.
이래서 골밀도 스탯이 생성된 건가?
“재형아.”
뒤이어 정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정진영을 돌아봤다.
정진영은 어벙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너, 너 방금 뭐야. 방금…… 주먹으로 때려잡은 거야? 좀비를?”
“형.”
“미친 거 아니야? 무슨 주먹으로 때리는데 사람 뼈가 플라스틱처럼 으깨지냐고!”
“아니 형…….”
“에덤 개사기네! 이 자식 주먹이 쇳덩어리잖아!”
정진영은 금세 화색을 띠며 내 등짝을 때렸다.
작은 충격에도 어깻죽지부터 손끝까지, 뼈마디가 짜르르 울렸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형, 저 팔 부러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