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5화
10대 학생들은 아침을 먹으며 어젯밤의 일을 무용담처럼 얘기했다.
“이거, 이 막대기로 외벽 타고 올라오는 좀비들을 막 찌르니까! 그놈이 글쎄 이 막대기를 붙잡고 매달리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엣 지랄. 계집애처럼 비명 지르면서 숨는 거 다 봤는데.”
10대 학생들의 쾌활한 모습에 식사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밝은 분위기의 거실과 달리,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재형이 네 생각에는 총성을 무시하는 게 이롭다는 거야?”
“네, 군인들이 너무 늦게 움직이는 게 마음에 걸려요. 게다가 좀비들의 청각이 예민하다는 건 군인들도 알 거예요. 대놓고 총을 격발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모조리 죽일 생각으로 냅다 갈겼다는 거지?”
“그렇죠.”
이정우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설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뒤이어 옆에 있던 이덕배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재형 학생 말에 동감이야. 자그마치 두 달을 방치했어. 이건 생존자를 수색하는 게 아니라, 말살하려고 나온 거야.”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을 쏴 죽인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네요. 그래도 아군인데…….”
이정우가 말끝을 흐리자, 이덕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아군? 전쟁에 적군 아군이 어디 있어. 자네 진내 폭격이라고 들어봤나? 브로큰 애로우.”
“그게 뭡니까?”
“저지선이 뚫리고 진지까지 적군이 들어왔을 때,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아군 진지에 폭격을 가하는 거야. 그게 군인이라고.”
“…….”
“지금 상황이 전시 상황이랑 뭐가 달라? 전쟁 나면 가장 먼저 통신기지부터 박살 내는 게 상책이야. 물은 나오는데 전기만 끊긴 거, 이상하지 않아?”
이덕배가 열을 내며 설명하자, 이정우는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회피했다.
뒤이어 맞은편에 있던 설여원이 콧잔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덕배 아저씨 말씀은 처음부터 군인들이 민간인 구출을 계획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지. 따지고 보면 생화학전이나 다름없잖아? 하루아침에 안개가 퍼졌으니 군부대도 난리였을 거라고. 밤새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을 거고, 타개책이 없다는 판단으로 민간인 통제에 들어갔을 거야.”
“민간인 통제요? 저흰 통제받은 게 없잖아요.”
“통신국을 봉쇄하고 휴대폰부터 먹통으로 만드는 거지. 혼란만 야기할 게 뻔하니까.”
“우리를 가둬두고 좀비로 변할 때까지 둔 뒤에, 이제 와서 모조리 죽인다는 거예요?”
“그게 제일 깔끔하고 편한 방법이니까. 대도시도 버거운 마당에 위에 있는 높으신 양반들이 우리 같은 읍, 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신경 쓰겠어?”
이덕배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혜리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한껏 기대하고 있다가, 그 기대가 절망으로 변하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김희연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윤혜리를 따라 들어갔다.
박재우와 황덕록도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리와 김희연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위로는 내 영역 밖이기에,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최현과 전완수는 거실에 앉아 동생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얼핏 귓가로 들리는 이야기로 보아,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안개가 퍼진 초기에, 학교에 남은 자녀들을 걱정한 학부모들이 구조대를 꾸려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조금 전까지 활기를 띠던 분위기는 급격히 암울하게 변했다.
난 마른세수를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너무 앞서가지 말죠. 당장 급한 일부터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버스랑 승합차도 수리해야 하고, 주유도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오늘은 정비시간을 갖죠.”
이정우는 팔짱을 끼며 내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자 이덕배의 옆에 있던 이현배가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아! 주유소라면 근처에 있어. 여기서 100m만 가면 나와. 내가 안내할 테니까…….”
“저도 압니다. 어제 좀비들 발견했을 때, 여원이가 주유소 위치 확인했어요. 여러분은 재우랑 덕록이 따라서 차량 수리랑 바리케이드 공사에 집중해 주세요.”
“아…… 그래. 알았네.”
이현배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내 말에 따라주었다.
뒤이어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던 이정우가 슬쩍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재형아, 잠깐 나 좀 볼까?”
“네.”
이정우를 따라 거실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이불, 바닥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티끌 먼지.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고독만이 남은 공간이었다.
이정우는 방문을 닫고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엄지로 바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야?”
“사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길에 거쳐야 하는 지역이 많은데, 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기에,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정우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완수랑 현이 부모님만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엉키네.”
“역시…… 두고 가는 게 최선일까요?”
“양심을 따질 상황이 아닌 건 맞아. 하지만…… 눈에 밟히네.”
나도 동감이다.
두고 가자니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고, 함께 가자니 짐이 되는 상황.
이정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앞면이 나오면 데려가는 거, 뒷면이 나오면 버리고 가는 거.”
“아니 형,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을 동전에 맡기는 건 좀…….”
“그럼 어떻게 하자고.”
난 착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지금은 정비부터 하죠. 어제 고단했잖아요. 하루만 여유롭게 있고 싶어요.”
“……네 뜻이 그렇다면.”
이정우는 들고 있던 동전을 주머니에 넣은 뒤, 한발 앞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아저씨!”
그러자 방문 앞에 있던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정우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아이들은 스케치북을 펼치며 해맑게 웃었다.
스케치북으로 좀비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 졸라맨처럼 보이는 몇몇 남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고 좀비들과 싸우는 남자.
이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40대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애들아, 삼촌도 쉬어야지. 삼촌 쉬게 비켜주자.”
“…….”
40대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거실로 돌아가자, 10대 남학생이 슬쩍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저기…… 형.”
“……어.”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심 부끄러운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저들을 버리고 갈지, 데려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불편해서, 도저히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헛기침과 함께 설여원을 불렀다.
“여원아, 슬슬 나가자.”
“나가? 어딜.”
“주유소 다녀와야지.”
“우리 둘이?”
설여원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거실에 있는 전완수와 최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전완수와 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최지혜와 전수연에게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각자의 무기를 챙겨 내 곁으로 다가왔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진영은 이덕배와 이현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친구들 쇠뇌 가져가도 괜찮죠?”
“어어, 물론이지. 필요하면 가져가.”
이덕배는 대수롭지 않게 쇠뇌를 건네주었다.
정진영은 쇠뇌 2개를 받아 내게 건네주며 물었다.
“나도 같이 가줄까?”
“괜찮아요. 형은 수비팀이잖아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여야지. 여긴 사람도 많은데, 의무병 안 필요해?”
뒤에 있는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시늉을 보였다.
전완수와 최현도 내게 선택하라고 하기에,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럼 무기 챙겨서 바리케이드 앞으로 오세요. 바깥 상황 확인하고 있을게요.”
“그래, 금방 내려갈게.”
이정우의 모습을 살피자, 그는 손깍지를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심에 잠긴 모습.
대표라는 자리는…… 여러모로 골치 아픈 자리였다.
* * *
어젯밤의 흔적이 사방에 남아 있었다.
무너진 바리케이드와 그 앞을 서성이는 좀비들.
골목에 있던 좀비들이 우리의 체취를 따라 정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시야 확보가 가능한 설여원과 전완수에게 쇠뇌를 건네주자, 두 사람은 쇠뇌를 견착하며 좀비들을 겨누었다.
퉁! 퉁!
두 발의 볼트가 가로로 빗금을 그으며 좀비들의 이마를 관통했다.
최현은 좌측의 돌담을 확인하고, 난 정면으로 걸어가 좀비들의 시신을 살폈다.
즉사하지 않은 좀비가 다른 좀비들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기에, 숨통이 확실하게 끊겼는지 확인했다.
정진영은 손도끼를 말아쥐며 주변을 살피더니, 착잡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주 난장판이네.”
새벽에 이동할 때는 안전하게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동 루트만 확인하며 접근했기에, 전체를 살피지 못했다.
지금은 심적인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주변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지가 온전한 시신이 없었다.
103동 외벽에는 머리가 터진 시신이 많았다.
대부분 추락한 시신들이었다.
103동 출입구는 서로 엉키고 설킨 좀비들의 뼈마디가 으스러진 상태였고, 정문 바리케이드 앞의 좀비들은 대부분 다리가 잘리거나, 머리에 쇠뇌 촉이 박혀 있었다.
습한 안개 때문에 시체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설여원은 들고 온 플라스틱 통을 바닥에 내려두며 얘기했다.
“한 번 움직일 때 20L씩 채울 수 있어.”
“이게 다야? 페트병이라도 들고 오지. 2L짜리 있잖아.”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식수 담을 페트병도 더 구해야 돼.”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이런 사사로운 일까지, 하나하나 챙겨야 하는 게 더 많아지는 일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10L짜리 기름통 2개를 쳐다보자, 설여원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 재형아.”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구레나룻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소리결 사람들, ‘결인’들은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여원의 물음에 전완수와 최현, 정진영까지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지금 생각할 필요 없어. 아직 차량도 손봐야 하고, 할 일이 많잖아.”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난 전완수와 최현을 쳐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현이랑 완수. 너희 퀘스트 어떻게 됐어?”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해야 하는 S급 메인 퀘스트.
전완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켜며 얘기했다.
“퀘스트는 완료됐어. 보상도 받았고. 아크 입장권.”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건…… 더는 부모님의 생사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건가?
친동생 전수연과 최지혜를 발견하고 퀘스트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찾으면 조건이 충족되는 모양이다.
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전완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전완수는 허공을 향해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됐어, 괜찮아.”
“…….”
“우울하게 있을 수는 없지. 아직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옆에 있던 최현은 퀘스트 목록을 살피며 얘기했다.
“그것보다, 메인 퀘스트 클리어하고 다른 퀘스트 생겼어.”
“어떤 퀘스트?”
“아크 탑승.”
“탑승?”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탑승은 버스나 기차,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에 탈 때 하는 말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아크가 대피소로만 사용되는 건 아닌 거 같아.”
“대피소가 아니면 뭐야.”
“두 번째 에피소드 시작할 때 나온 문장 기억나? 아크의 비밀을 밝히라는 거.”
보호대나 좀비들의 성장에 집중하느라 뒷전으로 밀린 아크의 비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최현은 퀘스트를 유심히 살피며 얘기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아크에 있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