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0화
태연하게 말을 잇던 설여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뒤이어 내 팔을 잡아끌며 버스에 밀착했다.
표정에서부터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에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동해야 돼.”
“왜, 몇 마리나 되는데?”
“저건…… 저게 뭐지?”
설여원의 대답에 의구심만 점점 커졌다.
대체 뭘 봤기에 이러는 거지?
설여원은 불안한 표정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불렀다.
“재형아.”
“왜.”
“라스트아크에…… 기어 다니는 좀비도 있어?”
“뭐?”
“좀비들이 기어오고 있어.”
좀비들이 기어 다녀?
설마 발소리를 죽이려고?
발소리를 죽인다는 건…… 아파트에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문득, 낮에 죽였던 상체만 남은 좀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놈이 정찰병이었나?
난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거리는 얼마나 돼.”
“…….”
“여원아.”
“…….”
“설여원?”
“못 막아. 어서 떠나야 돼.”
설여원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설여원의 어깨를 흔들며 진지하게 물었다.
“긴장하지 말고 찬찬히 얘기해 봐. 뭘 본 거야.”
“너무 많아. 못해도 500마리.”
500마리라는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은 차량에 기름도 없고, 철판도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좀비카를 이용할 수도 없고, 500마리가 넘는 좀비와 육탄전을 벌이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저토록 많은 좀비들이 어디 숨겨두었다가 이제야 나타난…….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우릴 이용한 건가?’
정찰병을 처리한 뒤에도 대장 좀비의 공격은 없었다.
수하가 많았다면 정찰병이 당했다는 걸 눈치챈 순간 공격했겠지.
대장 좀비도 실개천 생존자들과의 전투로 인해 다수의 수하를 잃은 것이다.
얼마나 수하가 적으면 하체가 절단된 좀비를 정찰병으로 두었겠는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아니, 못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분명 거리를 거니는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이곳의 생존자들이 좀비들을 정리했을 테니, 수하로 만들 좀비가 없었을 것이다.
즉, 대장 좀비는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우리의 모습을 관찰하고, 우리가 고등학교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왔다는 결론이 나온다.
로터리에서 좀비들을 따돌린 줄 알았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대장 좀비가 고등학교에 남은 좀비들을 수하로 만든 모양이다.
고등학교로 향하는 우측 길에서 좀비들이 다가오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고등학교의 좀비들로 머릿수를 채우고, 지쳐 있는 우리를 기습하려는 속셈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실소가 터졌다.
치밀하다고 해야 좋을까, 옹졸하다고 해야 좋을까.
지능을 지닌 좀비가 수하를 거느릴 수 있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톡톡히 보여주는 예시였다.
“찾았다!”
그 순간, 버스에서 정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명하게 들리는 정진영의 목소리에, 설여원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 * *
정진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전기를 들고 해맑게 웃었다.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고, 설여원에게 바깥 상황을 살피라고 손짓했다.
설여원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살피더니, 금세 상체를 숙이며 읊조렸다.
“소리 들었나 봐. 안 움직여.”
“지금도 부하들 기어 다녀?”
“어, 존나 징그러워.”
500마리의 좀비가 일제히 기어 다닌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기어 다니는 거지?
대장 좀비도 전투를 통해 깨달은 게 있는 건가?
하긴, 평범한 사람은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어렵다.
일전의 경험한 봐도,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닌 설여원과 전완수도 납작 엎드린 좀비는 쉽게 못 찾는 모습을 보였다.
난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원아, 너 쇠뇌 쏴본 적 있어?”
“있겠니?”
“그럼 이번 기회에 쏴봐.”
무슨 일이 있어도 대장부터 잡고 싸워야 한다.
대장 좀비가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면 물량에 잡아먹힐 것이다.
난 버스에 놓인 쇠뇌를 들고 설여원에게 건네주었다.
설여원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쇠뇌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신 없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 이거 사거리도 모르는데? 좀비들이랑 아직 60m는 떨어져 있어.”
“딱 좋은 거리야. 여기서 좀비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 너밖에 없어.”
설여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쇠뇌를 견착하고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내게 얘기했다.
“내가 셋 세면 창문 열어줘.”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하나, 둘, 셋!”
셋에 맞추어 창문을 열자, 설여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딘가를 조준하는 모습을 보였다.
숨까지 참으며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더니, 눈도 깜박이지 않고 쇠뇌를 발사했다.
퉁!
퍽-!
크어어어어어어!!!
적막만이 흐르던 어둠 속으로 좀비의 포효가 들려왔다.
맞춘 건가?
퉁! 퉁! 퉁!
설여원은 연달아 쇠뇌를 발사하더니, 정진영과 내게 소리쳤다.
“튀어!”
설여원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03동으로 달렸다.
치지직- 삑.
-밖에 무슨 일이야!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정우의 목소리.
좀비들의 포효를 들은 모양이다.
난 다급히 무전기를 들며 외쳤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두두두두두두두두-
크어어어어어어!!
카하아악!! 카학!!!
지면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이성을 갉아먹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500마리가 넘는 좀비들이, 일제히 두 발 딛고 일어나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슬쩍 뒤를 돌아보자,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정진영과 설여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둘 다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온 힘을 다해 줄행랑치고 있었다.
정문 바리케이드를 지나 103동 입구에 다다르자, 계단을 막아선 바리케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비좁은 틈이 생기며 이정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들어와!”
몸을 틀어도 지나가기 어려운 비좁은 통로.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억지로 몸을 쑤셔 넣었다.
가장 뒤에 있던 설여원까지 들어온 순간, 발치까지 다다른 좀비들이 일제히 바리케이드를 밀치기 시작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좀비들의 물량에 이정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밀어!”
바리케이드 앞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바리케이드를 밀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텅! 터덩! 탕!
좀비들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바리케이드가 아니었다.
이건…… 계단을 봉쇄하기 위해 쌓아 올린 짐짝이나 다름없었다.
2층 계단에 있던 10대 아이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1층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난 3층까지 대피한 뒤,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장 좀비는?”
“안 죽었어.”
“다 빗나간 거야?”
“제일 처음 쏜 게 머리에 맞은 거 같은데, 그 뒤엔 다 빗나갔어. 좀비들 사이에 숨어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좀비들이 달려드는 것으로 보아 즉사는 아니더라도, 분명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첫발부터 헤드샷이었다.
난 바깥 상황을 살피며 설여원에게 물었다.
“대장 좀비 어디로 도망치는지 모른다고 했지?”
“저쪽 빌라로 뛰는 거 같았는데, 정확하겐 모르겠어.”
설여원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방향은 얼추 알겠는데, 빌라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들 올라가요! 4층까지!”
2층에서 들려오는 전완수의 목소리.
생존자들은 다급히 4층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슬쩍 고개를 내밀고 1층의 상황을 살피자, 좀비들이 비좁은 입구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완수의 말을 따라 나 역시 4층까지 올라가자, 계단의 한쪽 측면에 쌓아 올린 잡동사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차 바리케이드도 만들어둔 건가?
챙그랑! 챙강!
크어어어어! 카하악!!
뒤이어 1층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우는 4층에 서서 생존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한 뒤, 모두가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측면에 쌓아둔 잡동사니들을 잡아당겼다.
1차 바리케이드로 103동의 입구를 막고, 3층과 4층 사이도 잡다한 물건들로 틀어막는 모습.
좀비들의 속력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고, 다수의 좀비가 일제히 달려들지 못하는 구도.
탄탄한 바리케이드를 만들 필요 없이, 물량전에 어울리는 방안이었다.
“흐아앙…… 엄마…….”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정우는 손도끼를 손에 쥐며 주변 생존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덕배 아저씨, 현배 아저씨, 만석 아저씨, 호진이는 5층 계단에서 쇠뇌 장전하고 좀비들 올라오면 쏴요. 완수랑 현이는 정면 담당, 내가 옆으로 새는 좀비들 처리한다.”
“저, 저희도 싸울 수 있어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프라이팬과 식칼을 들고 이정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정우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더니, 뒤에 있는 박재우와 황덕록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재우랑 덕록이는 여기 있는 애들이랑 어머님들 데리고 5층으로 가.”
“싸울 수 있다고요!”
10대 후반의 남학생 중 한 명이 오기를 부리자, 이정우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얘기했다.
“올라가서 싸우라고.”
“…….”
“저기 있는 좀비들 조금만 있으면 벽 타고 올라올 거야. 애들 다 죽게 둘 거야?”
“…….”
남학생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함께 5층으로 올라갔다.
평범한 좀비라면 아무리 물량이 많아도 비좁은 계단만 확실하게 막으면 승산이 있다.
쇠뇌도 있기에 좀비들이 뭉치지 않도록 중간에서 끊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저놈들은 대장 좀비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니까.
1층에 쌓인 시체들을 밟고 단번에 2층으로 진입할지도 모르고, 창틀을 이용해 외벽을 타고 오를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달려드는 좀비들이 아니라, 대장 좀비의 명령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정우도 이를 알기에 외벽을 타고 오를 좀비들을 대비하는 것으로 보였다.
“재우랑 덕록이는 5층 창가 확인해! 좀비들 기어 올라오면 전부 떨어뜨려야 돼!”
“네!”
“희연이는 좀비들 위치 브리핑하고 혜리는 쇠뇌 촉 옮겨!”
이정우의 빠른 지시로 우왕좌왕하던 생존자들은 금세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뒤이어 설여원이 내 팔을 흔들며 물었다.
“우린 어떡해. 우리는 어디 담당해?”
“따라와.”
“사람들 여기 있는데 어디가?”
“본진으로 들어가야지.”
“……뭐?”
설여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난 설여원의 옆에 있는 정진영에게 물었다.
“형, 우리 밧줄이랑 클립 어디 있어요?”
“아까 버스에서 가방 들고 내린 사람이 누구지?”
정진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가장 앞줄에서 좀비들을 처리하는 최현을 불렀다.
“현아 가방 어디 있어!”
“무슨 가방이요!”
“밧줄이랑 클립, 정, 이런 거 넣어둔 가방!”
“7층! 7층 702호!”
정진영이 7층으로 올라가고, 난 5층에 있는 박재우를 불렀다.
“재우야 망원경 어디 있어.”
“망원경도 7층. 가방 옆에 봐봐.”
박재우의 말을 듣고 재빨리 702호로 향했다.
현관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놓인 여러 가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밧줄과 클립, 망원경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곧장 102동이 보이는 창가로 달려갔다.
대략 15m 거리에 102동이 위치한다.
102동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자, 그 모습을 발견한 설여원이 다급히 내 팔뚝을 붙잡았다.
“너 설마 저길 넘어가려고? 미쳤어? 여기 7층이야!”
“다른 방법 있어? 계단은 좀비들 때문에 꽉 막혔는데.”
“이건 미친 짓이잖아!”
그러자 뒤따라온 정진영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잠깐만, 여기서 102동까지 밧줄을 연결하겠다는 거야? 고정은 어떻게 하려고?”
“제가 1층으로 내려가서 102동으로 이동할 거예요. 제가 도착하면 쇠뇌에 밧줄 연결해서 건네줘요.”
“우리도 밧줄 잡고 내려가면 되는데 굳이 연결하려고?”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죠. 10살도 안 된 애들이 밧줄 잡고 어떻게 내려와요.”
“…….”
“만약 103동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이 밧줄 없이는 탈출 못 해요.”
정진영은 뒤늦게 아, 하는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밧줄의 끝을 기둥에 묶으며 얘기했다.
“너 먼저 내려가. 뒤따라갈게.”
“아니요. 형은 여기서 사람들 도와서…….”
“의무병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