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64화
이덕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정으로 부순 거라고.”
“정으로 이걸 부술 수 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는 외벽의 흔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얘기했다.
“여기, 그리고 여기, 여기도, 담벼락의 약한 부위만 골라서 때렸어.”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이 바닥에서 30년을 굴렀어. 딱 보면 어디가 균열이 생기는 부위인지 알지.”
이덕배의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정을 이용했다면 사람이 부순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덕배는 담벼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얘기했다.
“밖에서 벽을 부수고 들어온 게 아니라 안에서 내려친 거야.”
그러자 이현배가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형님, 그럼 만석이 형님이 담벼락 부수고 나간 거 아니에요? 공사판에서 구른 사람은 만석 형님뿐이잖아요. 담벼락 취약한 부위 아는 사람도 만석이 형님뿐일 텐데.”
이현배의 가만히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석이라면 나도 이예정의 일기장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원룸촌 생존자들을 대표하는 게 이씨 형제와 만석이었다.
만석이란 남자가 이곳으로 탈출했다면, 이예정과 다른 생존자들도 이곳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이덕배는 담벼락 너머의 경사가 가파른 산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겉으로 크게 내색하지 않지만, 생각이 많을 것이다.
그의 딸도 이곳에 있었으니까.
난 밖으로 걸어 나가 인간의 발자국이 있는지를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수십, 수백의 발자국이 경사로로 이동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현 상황을 정리하며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가늠했다.
정문과 쪽문으로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퇴로가 막혀서 담벼락을 부수고 나갔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건을 쌓아서 담벼락을 넘어가는 게 더 빠를 텐데, 굳이 벽을 부순 이유가 뭘까.
그만큼 벽이 허술했던 건가?
아무리 허술해도 그렇지, 담벼락을 부수는 동안 좀비들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발자국의 모양이나 크기를 유심히 살피자, 다수의 어린아이가 포함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정문과 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을 가장들이 죽기 살기로 막고, 그 새에 아이들이 탈출했다는 말이 된다.
아이들이 넘기엔 담벼락이 너무 높아서, 벽을 허무는 선택을 내린 모양이다.
난 이덕배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로 올라가면 뭐가 나와요?”
“뒷산을 넘어가면 고등학교가 나와.”
“얼마나 걸려요?”
“거리가 꽤 될 텐데…….”
이덕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재형 학생.”
“네.”
“정말 미안하지만…… 수색작업 지금 진행하면 안 되겠는가?”
이덕배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서를 찾았으니, 어떻게든 결과를 보고 싶을 것이다.
이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내일까지 기다려요.”
“힘을 보태주게.”
“위험합니다. 해도 떨어졌는데 산을 어떻게 탑니까?”
“저기 있는 좀비카는 전시용인가? 이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거잖아.”
“남은 연료가 별로 없어요. 불확실한 상황에 연료를 허비할 수 없습니다.”
덤덤하게 얘기하자, 이덕배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초조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다급해도, 지금은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곳을 급습한 좀비는 평범한 좀비가 아니었다.
정확한 입구도 알고, 생존자들의 위치도 명확하게 파악한 뒤에 공격이 이루어졌다.
무턱대고 모든 동을 공격한 게 아니라, 101동과 104동의 현관만 부서진 게 그 증거였다.
이는 생존자들의 행태를 파악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뜻.
‘대장 좀비야.’
대장 좀비가 생존자들의 발자국을 확인했다면, 뒷산에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린 모든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대장 좀비의 위치를 파악하기 전에는 수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 * *
모든 동의 안전을 확보하고, 최현과 전완수의 집까지 샅샅이 살폈다.
아쉽게도 그들의 부모님은 집에 있지 않았다.
이에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퀘스트 목록에 변화는 없어?”
“없어, 여전히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라고 적혀 있어.”
“그럼…… 아직 살아계실 가능성이 높은 거네.”
전완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최현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탄하듯이 얘기했다.
“문장 똑바로 봐. 안부야, 안부를 확인하라는 내용이라고! 돌아가시기 전에 구출하라는 퀘스트가 아니잖아!”
“…….”
“이게 부모님의 시신이라도 확인하라는 말이랑 뭐가 달라.”
최현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껏 우리가 겪은 일이 있기에, 다들 내면 어딘가에 최현의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인정하진 않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내용이었다.
그러자 전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최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뭐, 부모님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가 봤어? 우리 엄마 아빠 시신이라도 봤냐고.”
최현의 한탄에 꾹꾹 눌러두었던 불안감이 터진 모양이다.
난 다급히 두 사람을 떨어뜨리며 얘기했다.
“둘 다 진정해. 까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 흥분하지 마.”
“아니 저 새끼가 말을 이상하게 하잖아.”
“…….”
나도 어찌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행의 불안감은 점점 부풀고, 희망의 불씨는 옅어져 갔다.
지금이라도 수색작업을 시작하는 게 옳은 건가?
뭐라도 해야, 몸이라도 움직여야 걱정이 사라지려나?
이정우의 표정을 살피자, 그도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고심에 잠겨 있던 이정우가 입을 열었다.
“재형아, 아파트단지에서 좀비 하나 발견했다고 했지?”
“네, 상체만 남은 좀비였어요.”
“그놈이 정찰병일 가능성은?”
그래, 대장 좀비가 이곳을 공격했다면 정찰병을 심어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합강의동에서 박재우와 황덕록을 구출하던 당시, 정찰병 때문에 그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처리한 좀비가 정말 정찰병이라면, 지금쯤 대장 좀비도 이곳에 먹잇감이 있다는 걸 파악했을 것이다.
내가 대장 좀비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
도망간 생존자들을 쫓을까, 아니면 이곳으로 돌아와 새롭게 나타난 먹잇감을 노릴까.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정우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얘기했다.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는 건 정찰병이 아니라 평범한 좀비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요?”
“생존자들, 구출하러 가자.”
“형,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움직여요? 저 뒷산 너머에 있다는 고등학교, 거기에 생존자가 있다는 확신도 없다고요. 잘못하면 길에서 자는 수가 있어요.”
“고등학교에 생존자가 없다면, 고등학교에 다시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자면 돼.”
“바리케이드 설치 끝나면 해 뜰 시간일 겁니다. 오늘은 여기서 휴식하고 내일 일찍 움직이는 게 맞아요.”
치지직- 치익-
-아아, 들리십니까? 들려요?
그 순간, 이정우가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박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우는 박재우의 목소리를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뒤늦게 박재우와 황덕록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곧장 무전기를 들고 얘기했다.
“너희 어디야?”
-여기 101동 옥상이요.
“거기서 뭐해.”
-주변 정찰하고 있었습니다.
정찰?
정찰이란 말에 박재우와 황덕록이 들고 온 물건이 떠올랐다.
드론.
난 무전기 쪽으로 입술을 갖다 대며 물었다.
“드론으로 정찰하고 있었어?”
-누고, 재형이가? 아까 고등학교 얘기하기에 날려봤지.
“찾은 거 있어?”
-아까 덕배 아저씨가 얘기한 방향으로 불빛 같은 거 보이는데?“
불빛이란 말에 이덕배는 이정우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채며 물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학생, 내 말 들려?”
-예, 잘 들립니다. 말씀하세요.
“고등학교에 불빛이 보인다고? 건물 층수가 어떻게 돼. 외벽 색깔은?”
-안개가 2층까지 찼으니까…… 4층짜리 건물인 것 같아요. 외벽은 붉은색인가? 야 덕록아, 저게 무슨 색깔이고?
-붉은색. 니 색맹이가?
-색약 인마.
이덕배는 무전기에서 들려온 대답에 들뜬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뒤이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맞아, 맞아! 4층에 붉은벽돌이면 이 동네 고등학교 맞아! 제대로 찾았어!”
반면에 이정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덕배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무전기 함부로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미안하네.”
이덕배가 무전기를 돌려주자, 이정우는 태연한 목소리로 박재우에게 물었다.
“주변에 좀비들의 움직임은 보여?”
-어…… 잠시만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박재우의 말에 이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불빛이란 말에 몇 명이 들떴는데 착오라는 말로…….”
-아니 그게…… 거리가 멀어서 드론을 좀 더 붙여봤거든요. 근데 불빛이 아니네요.
“그럼 뭔데.”
-그냥 불빛이 아니고 학교에 불붙은 거 같은데요? 3층에 화재 발생한 거 같아요.
화재?
노후화된 가스관이 폭발인가?
아니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짙게 깔린 어둠만큼이나 세상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가스관이 폭발했다면 폭음이 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정우도 여기까지 생각을 마쳤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박재우에게 물었다.
“사람 모습은 안 보여?”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불붙은 지 별로 안 된 거 같아요. 계속 번지는 중입니다.
무전기에서 들려온 말에 이덕배의 이마로 굵은 핏줄이 솟아났다.
그는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난 이덕배의 팔을 잡으며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이정우는 인중에 고인 땀방울을 닦으며 일행의 얼굴을 살피더니,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너희도 내려와. 지금 출발한다.”
이정우의 시선이 내게 꽂히자, 모든 일행이 일제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찰나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가죠.”
분위기에 이끌려 내린 선택이 아니었다.
생존자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을 지를 이유가 없다.
건물에 불을 낼 정도라면, 좀비들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다는 뜻이겠지.
다수의 좀비가 고등학교에 있다면, 우리도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고등학교가 공격받고 있다는 건 좀비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동하는 길에 기습당할 확률은 없다는 말이 된다.
좀비만 자극을 받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좀비들의 위치를 모를 때는 우리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지만, 놈들의 위치를 파악한 시점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도 자극을 받았으면 움직여야지.
내가 너무 순조롭게 동의해서 그런가?
이정우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아까 처리한 좀비가 정찰병이라면, 저기 다음엔 우리예요. 대장 좀비도 우리가 먼저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죠.”
“좋아, 다들 동의하는 거지?”
모든 일행이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난 전완수의 등을 토닥이며 얘기했다.
“완수야, 좀비카 성능 제대로 확인할 때가 왔다.”
* * *
“야 조성훈, 이대로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럼 어쩌라고. 군사도 없이 나더러 저것들 잡으라고?”
멀어지는 좀비카를 바라보는 두 남자.
이하진과 조성훈이었다.
조성훈은 좀비카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더니, 까드득 이를 갈며 읊조렸다.
“저 새끼들…… 학교에서 봤던 놈들이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 사과대에 숨어 있을 거 같다고 그랬잖아. 후문으로 나가긴 어딜 나갔다고…….”
이하진이 투덜거리듯이 얘기하자, 조성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하진을 노려봤다.
이에 이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물론…… 그렇다고 네 선택이 틀렸다는 건 아니고…….”
“애초에 네가 기숙사 매점에서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미안하다.”
이하진은 시선을 회피하며 금세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크르르르르…….
조성훈의 뒤에서 목젖을 가는 40마리의 좀비들.
사지 멀쩡한 좀비는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성훈은 수하들의 모습을 보고 세차게 혀를 차며 읊조렸다.
“군사들을 너무 많이 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