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58화
일기에는 이곳에 있던 생존자가 느낀 절망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계속해서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아빠다. 아빠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지금도 야구 배트를 쥐고 입술을 질끈 깨물던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설마 나도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탁.
아빠는……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 확인해 보니, 물컵이었다.]
[6월 26일. 아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 위에 물컵과 음식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부엌을 살피자, 여전히 식탁에 앉아 싱크대만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6월 30일. 여전히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매일같이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목젖을 가는 해괴망측한 울음소리. 마치 인간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리고 난…… 오늘 아빠와 함께 절규하는 인간들을 마주하러 나간다. 죽으려고 나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나가는 거지. 하지만 내가 죽게 된다면…… 지금의 일기가 17년 인생의 마지막 흔적이 되겠지. 그러니 이 일기를 읽게 되는 사람은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내 이름은 이예정, 꿈많고 활기찼던 17살이다.]
일기를 읽으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17년 인생.
곳곳에 보이는 눈물 자국과 번진 잉크, 떨리는 글씨체까지.
열일곱의 학생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일기였다.
착잡해진 마음을 심호흡으로 환기하고, 한층 맑아진 정신으로 다음 장을 펼쳤다.
[7월 5일. 아빠와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동안 여러 집을 돌며 생존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현배 삼촌과 만석 아저씨가 살아 있는 모습에 아빠는 또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차츰차츰 원룸촌의 대학생들도 합류하고, 동네 주민들도 구출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 남자들이 원룸촌 근방의 좀비들을 처리하고, 주변 일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어느새 아빠가 대표가 되어 생존자들을 인솔하고 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아빠가 바빠질수록, 위험에 처하는 일이 많아지니까. 최근에는 실개천 너머와 금호강 건너에도 생존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서로 정찰대를 꾸려 소통하며,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구색하고 있다.]
실개천 너머에 생존자가 있다는 글귀를 보고 전완수와 최현은 들뜬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의 본가가 실개천 너머였다.
부모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완수와 최현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뒤이어 일기의 다음 장을 보고,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7월 14일. 현배 삼촌이랑 만석 아저씨가 아빠에게 쇠뇌를 만들어보는 건 어떠냐고 했다. 쇠뇌가 뭐냐고 물었더니 석궁 같은 거라고 한다. 아빠는 30년 동안 철물점에서 일해서 그런지, 재료만 충분하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좀비들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기에, 이제 나도 안심이다. 식칼과 각종 쇠붙이를 모아 쇠뇌와 쇠뇌 촉 제작을 시작했다.]
조금 전 마트에서 봤던 화살들.
일기에 나오는 이예정 학생의 아버지가 만든 작품이었다.
[7월 21일. 쇠뇌와 쇠뇌 촉이 완성됐다. 시험 발사 과정에 쇠뇌 촉 하나가 깨지며 아빠의 볼을 스쳤다. 쇳조각이 조금만 위로 스쳤으면 실명의 위기였다고 한다. 아빠는 눈 밑으로 5㎝ 정도가 찢어졌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아무래도 흉질 것 같다.]
뒤이어 옆에 있던 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 새끼 여기로 왔나 보네.”
“누구?”
“다 안 봤어? 마지막 일기 확인해 봐.”
최현의 말을 따라 마지막 일기부터 확인했다.
[7월 25일. 바리케이드가 무너졌다. 지금껏 잘 버텨왔는데, 대학교 후문 방면에서 나타난 좀비는 한순간에 우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지능이 있는 좀비. 그놈은…… 좀비들을 수하처럼 부렸다.]
수하를 부리는 지능형 좀비.
대장 좀비다.
사과대에서 떨쳐낸 대장 좀비가 이곳을 공격한 모양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곳에 있던 생존자들이 나 때문에 해를 입은 것 같아서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생존자들의 입장에선 불똥이 튄 거나 마찬가지니까.
[사람이 많이 죽었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수백 마리의 좀비는 우리가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들을 묻어줄 여력도 없이 대피계획부터 세웠다. 시간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실개천 너머의 은신처로 대피하거나, 금호강 건너의 생존자들과 합류해야 한다.]
일기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이예정이란 학생은 대피하는 과정에 일기장을 두고 간 모양이다.
대략 10일 전의 일기가 마지막이니, 사과대에서 대장 좀비를 떨쳐낸 시기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럼 우리가 다녀온 마트는…… 이곳에 있던 생존자들이 식량 창고로 쓰던 마트였고, 급히 떠나는 바람에 챙기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얼추 상황파악을 마치고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지금은 해 떨어지고 있으니 여기서 묵고, 내일 실개천 너머로 이동하자.”
“태양광 패널은 얼마나 충전됐어요?”
“거의 다 됐어. 배터리도 여유 있고. 재우랑 덕록이가 있어서 전력은 걱정할 필요 없어.”
로즈의 능력은 모든 장비의 이해도 증가.
거기에 전력량 증가 버프도 있기에 태양광 패널의 배터리 충전 속도도 빨랐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재우는 내 옆으로 다가오며 얘기했다.
“앞으로 1시간 정도 더 충전하면 돼.”
1시간이라…….
슬슬 노을도 지고 있으니, 배터리를 충전하며 방어진 구축에 힘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정우 형 말씀대로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죠. 혜리랑 희연이는 슬슬 저녁 준비해 주고 다른 사람들은 불침번부터 정하죠.”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황덕록이 꺼낸 말이 떠올랐다.
“덕록이랑 재우는 잠시만.”
두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아까 덕록이가 그랬지? 싸우는 법 알려달라고.”
황덕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무기 들고 따라와. 아까 반대편 대로변에 좀비들 몇 마리 보이던데, 어떻게 죽이는지 보여줄게.”
“우린 무기도 없는데?”
박재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행을 돌아봤다.
이에 쇠파이프와 멍키스패너를 건네며 얘기했다.
“휘두를 수 있는 건 다 무기야.”
헌팅 나이프가 하나 남았지만, 그건 설여원과 내가 무기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서 아껴둘 생각이다.
또한 박재우와 황덕록은 둔기부터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시작부터 칼을 주면 실수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엉성하게 찌르다가 좀비에게 물릴 것이다.
두 사람은 설여원과 내가 쓰던 쇠파이프를 받아들며 마른침을 삼켰다.
뒤이어 상황을 지켜보던 설여원이 뻐근한 어깨를 풀며 얘기했다.
“길잡이는 있어야지.”
시야 확보가 가능한 설여원이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럼 나야 좋지.
설여원이 옆에 있으면 언제나 든든했다.
이정우는 내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나를 불렀다.
“재형아.”
“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알지?”
이에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게요.”
“무전기 챙겼지?”
“네.”
“조심히 다녀와.”
* * *
감빛으로 물든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 너머로 기울어가는 시각, 인적이 사라진 마트로 세 명의 남자가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쇠뇌를 견착한 채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앞에 있던 남자는 마트의 입구를 발견하고 움찔거리더니, 뒤따라오는 남자들에게 정지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 있던 40대 초반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왜요, 형님. 좀비예요?”
“발자국이야.”
“마트에 좀비가 들어갔단 겁니까?”
선두의 남자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문을 직시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카트를 끈 흔적이 있어.”
뒤에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선두의 남자는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호진이 너는 여기서 대기하고, 현배는 입구까지 따라와.”
“입구에서 뭐 하면 됩니까.”
“저 앞에 상자들 보이지? 저기서 나 엄호해.”
이현배와 천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두의 남자는 두 눈을 껌벅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발소리를 죽인 채 마트의 정문으로 이동하자, 먼발치서 들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트 내부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밖에 있는 천호진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진열대만 확인하고 나간다. 다들 뭐 챙겨야 하는지 알지?”
이현배와 천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위치로 이동했다.
하지만 3분간의 수색 작업 끝에, 그들을 기다리는 건 텅 빈 진열대였다.
식량이 털렸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어떤 놈들이 털어간 거야.”
그의 우측 볼에는 기다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뒤이어 마트 내부를 살피고 돌아온 이현배가 입을 열었다.
“형님, 아무래도 이 동네에 다른 생존자가 있는 것 같은데요. 좀비들이 통조림을 털어갔을 리는 없잖아요.”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지? 근방의 생존자들은 전부 결집했는데.”
“학교에서 내려온 대학생들 아닐까요?”
“대학생 같은 소리. 그 괴물이 대학교에서 내려왔는데 교내에 생존자가 있겠어?”
“…….”
“생존자 얘기는 그만하고, 볼트는 얼마나 남았어? 설마 볼트까지 털어간 건 아니지?”
“화살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놈들 식량만 털어갔어요.”
이현배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그의 옆에 있던 천호진이 입을 열었다.
“덕배 아저씨, 이것 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천호진이 들고 온 건 자그마한 쪽지였다.
-남은 식량은 계산대 밑에 둡니다.
설여원이 남기고 떠난 쪽지.
천호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시더니,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런 세상에 식량 털어갔으면 나쁜 놈이지.”
덕배라 불린 남자는 손에 쥔 쪽지를 바닥에 버리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이현배가 입을 열었다.
“형님, 벌써 사흘이나 됐어요. 슬슬 돌아가야 합니다.”
“식량도 없이 어떻게 돌아가? 식량 가져오겠다고 떵떵 치고 나왔는데.”
“만석 형님이 있으니 실개천 너머 생존자들도 막무가내로 나오진 못할 거예요.”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만석이도 소용없어. 난민 취급 모면하려면 식량이라도 가져가야 한다고.”
“화살만 가져가도 충분하죠.”
“화살이 아니고 볼트라고 몇 번을 말해?”
“볼트든 화살이든, 지금 그게 중요해요?”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자, 상황을 지켜보던 천호진은 안절부절못하며 얘기했다.
“아, 아저씨들 진정해요. 우리끼리 싸울 일이 아니잖아요.”
20대 초반의 천호진.
그가 우물쭈물하며 두 남자를 말리자, 40대 남자들은 세차게 혀를 차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덕배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내쉬더니,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왔을 때 식량이 하나도 없거나, 식량 털어간 놈들이 진을 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때도 지금처럼 한가한 소리나 할 수 있는지 보자고.”
“허이구, 형님이나 생각 잘하세요. 우리가 늦을수록 누가 걱정할 거 같아요? 실개천 너머 생존자들이 우리 걱정이나 하겠어요? 예정이도 생각해야죠.”
“야 인마, 예정이 생각해서 뭐든 가져가자는 거잖아?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실개천 너머 생존자들이 쫓아낼지도 모를 일이라고.”
“쫓아내면 순순히 쫓겨날 생각이에요? 어떻게든 싸워야지.”
“뭐?”
“좀비든 사람이든, 세상이 망한 마당에 그런 게 중요하냐고요. 내 사람 지키려면 좀비든 인간이든 다 때려잡아야지! 형님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그 꼴을 당하고도?”
이현배가 따지듯이 내뱉은 말에 이덕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