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48화
남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설여원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뭘 놀라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말은 하고 벗어야지.”
전완수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사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설여원은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예고하고 옷 벗었니?”
크어어어어어어!!
뒤이어 3층까지 올라온 좀비들이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좀비들과의 거리는 40m.
좀 더, 좀 더 와야 한다.
3층으로 올라온 좀비들은 복도의 절반까지 쉴 새 없이 달리더니, 갑자기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가장 앞에 있던 좀비가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역시.’
장마가 시작되면서 좀비들이 성장했다.
좀비들은 안개 밖에서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안전을 기한 덕에 놈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크르르르…… 카학! 카각!
놈들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더니, 상의를 던져둔 강의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체취가 진득하게 묻어난 옷.
예상대로 좀비들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고, 뒤따라 올라온 좀비들은 일행이 벗어둔 강의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3층으로 모여드는 좀비가 점점 많아지고, 2층에서 더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행에게 내려가자고 손짓하며 서둘러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계단 난간에 딱 붙어서 1층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모든 좀비가 정문에 몰려 있는 지금,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카하악! 카학!
3층에만 족히 200마리가 있는데, 바깥에도 좀비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뒷문을 막아선 좀비들이 내 모습을 보고 목젖을 갈기 시작했다.
뒷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대장 좀비가 일찍이 퇴로마저 끊어둔 건가?
정문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뒷문으로 나갈 수도 없다.
교양관에 남은 출구라면…….
‘쪽문.’
망설임 없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까지 쉬지 않고 내려가자, 바로 앞으로 매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떡볶이와 튀김 등, 학생들이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분식을 팔던 매점.
고소한 참기름 향이 그윽하게 퍼지던 복도로, 지금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만이 진동하고 있었다.
매점의 옆으로 쪽문이 있기에, 재빨리 그곳으로 이동했다.
쪽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있는데, 뒤에 있던 설여원이 물었다.
“이제 어떡해. 어디로 가?”
“일단 직진.”
“여기로 나가면 어디로 이어지는데?”
“팔각정 올라가는 언덕.”
“그게 어딘데.”
“(구)학생회관이랑 농구코트 사이의 언덕이야. 본관에서 탈출할 때 주차장 옆에 숲길 있던 거 기억나?”
“알아, 기억나.”
“거기랑 이어지는 언덕이야.”
잠금장치를 풀고 다급히 밖으로 나가자, 코끝을 찌르던 음식물 냄새가 가시며 눅눅한 습기가 두 볼을 스쳤다.
교양관 내부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위로 올라갔던 좀비들이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최현은 교양관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집중하더니,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학생회관으로 가면 안 돼?”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다리도 덜덜 떨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안 된다.
뒷문에 있던 좀비들이 우리를 발견했으니 금방 쫓아올 것이다.
학생회관에선 저 물량을 막아낼 여력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응은 단 하나.
도주.
쉴 새 없이 달리며 대장 좀비를 정신없게 만들어야 한다.
일행에게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정면의 언덕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이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목적지는 있는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다들 말 아껴요. 체력 아껴야죠.”
내가 생각한 목적지는 단 하나.
사과대.
죽은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사과대에 있는 시신을 이용해야 한다.
좀비들의 후각이 발달한 만큼, 부패된 시신의 냄새가 우리의 체취를 가려줄 것이다.
또한 사과대를 지나면 곧장 학교의 후문이 나온다.
사과대에서 일차적 연막을 펼치고, 대장 좀비가 우리의 발자취를 놓친다면 한 가지 생각밖에 못 할 것이다.
후문으로 나갔다고 생각하겠지.
크어어어어어!!!
교양관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발소리와 포효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난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다들 앞만 보고 뛰어요!”
이젠 반박할 기력도 없는 건가?
반대를 표하는 사람도 없었고, 수긍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땅한 방안이 없으니, 뭐라도 떠올리는 내 의견에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일행의 체력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 * *
“빨리 와!”
팔각정 언덕을 지나 농구코트로 접어들었지만, 좀비들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안개 때문에 이동 경로를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농구코트 바닥의 줄눈이 좌표가 되어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말해준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농구코트를 가로지르는데, 주변에서 달려드는 좀비가 없다.
어쩌면 이 근처의 좀비들도 대장 좀비가 포섭했는지도 모르겠다.
밤새 교내를 순찰하며 김민형을 찾아다닌 건가?
어쩌면 대장 좀비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라 김민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과대에서 경영대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나타나고, 길 건너 주차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보자, 다들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전력으로 몇백 미터를 달리고 있으니,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그리고 일행의 뒤로, 희뿌연 안개 속에서 일렁이는 검은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닌데, 숫자가 얼마나 많으면 내게도 보일 정도였다.
수백 마리의 좀비가 우리를 뒤쫓고 있다.
까드득 이를 갈며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주차장을 거니는 좀비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대장 좀비도 사과대와 인문대 쪽의 좀비들은 확인하지 않은 건가?
이놈들을 살려두면 우리를 뒤쫓는 좀비들의 눈이 되어줄 것이다.
재빨리 헌팅 나이프를 고쳐 쥐며 주차장을 거니는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상의를 벗으면서 양팔에 감아둔 1.5㎝ 두께의 책도 떨어졌기에, 지금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두 눈 부릅뜨고 쉴 새 없이 팔을 움직였다.
뒤따라온 설여원도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며 우측의 좀비들을 처리했다.
모든 좀비를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달려드는 놈들만 처리하며 사과대 정문으로 향했다.
사과대 정문에 발길질을 가하며 내부로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공기와 함께 시체 썩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 역한 냄새에, 난 헛구역질을 하며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봤다.
다들 건물로 들어서며 손가락으로 코를 부여잡거나, 헛구역질하며 역한 심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지하로 내려가!”
기침을 토하며 외치자, 설여원과 전완수가 길잡이가 되어 일행을 이끌었다.
가장 뒤에 있던 이정우까지 들어온 순간, 난 유리문을 걸어 잠그고 뒤를 돌아봤다.
쾅!!
카하아아악!!
한 끗 차이로 들어오지 못한 좀비들은 유리문을 두드리며 목젖을 갈기 시작했다.
유리문이 버티는 시간은 길어봐야 10초.
다급히 계단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정우인가?
지하로 내려가라니까 왜 안 가고 있는 거야.
“빨리 내려가라니까요!”
그의 곁으로 달려간 순간, 심장에서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다.
크어어어…… 카하악!
철민이다.
좀비에게 물려 죽으라고 1층에 버려둔 철민이, 좀비가 되어 나를 바라본다.
두 다리는 문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양팔은 들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아킬레스건과 대원근, 소원근을 끊었으니 당연한 결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좀비가 되어서는 느릿하게라도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 사람을 두 번이나 죽이는 취미는 없지만, 지금은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두 눈 부릅뜨고 헌팅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온 힘을 다해 좀비로 변한 철민의 안구에 칼날을 찔러넣자, 그는 경련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뒤이어 복도 반대편에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좀비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휴게실 유리를 부수고 나온 네 마리의 좀비들.
아직도 1층을 거닐고 있었던 건가?
네 마리를 상대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철민의 안구에 박힌 헌팅 나이프를 뽑으며 주변을 살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내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계단이 어디더라?
일행이 이동한 길을 모르겠다.
당황하면 안 되는데, 좀비 때문에 일행을 놓쳤다.
쾅! 콰광! 챙그랑!
곧이어 유리문에 거미줄 모양의 균열이 생기더니,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난 세차게 혀를 차며 무턱대고 복도를 내달렸다.
쉴 새 없이 좌우를 살피며 달리자, 복도 끝에 위치한 우측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몇 칸씩 건너뛰며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좌측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좀비? 일행?
안개 때문에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하 1층에도 좀비가 있는 건가?
마른침을 삼키며 반대편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어디가!”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향을 틀어 설여원의 곁으로 향했다.
좀비가 아니라 설여원이었다.
* * *
설여원의 앞에 도달하자, 그녀는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쓰러지듯 들어서자, 방이 아니라 비좁은 탕비실이었다.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설여원은 다급히 방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헉…… 헉…… 헉…….”
비좁은 탕비실로 일행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직 좀비들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
다들 숨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산소를 원하는 폐는 쉴 새 없이 펌프질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체력이 두세 배는 강한 나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몸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탕비실은 금세 더운 열기로 가득 찼다.
숨을 쉴 때마다 이산화탄소가 느껴지는 기분.
산소 부족으로 인해 한 차례 현기증까지 일었다.
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탕비실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좀비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내 뒤를 쫓아온 건가?
제발, 이곳엔 퇴로도 없고 좀비들과 싸울 여력도 없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는 근육경련에 시달렸고, 손아귀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저벅- 저벅-
크르르르르…….
복도를 거니는 좀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의 체취를 따라,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문고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문고리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대장 좀비도 슬슬 사과대에 도착했을 텐데.
발각되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을까?
크어어어어어어!!
뒤이어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1층 복도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
보다 위층에서 들려온 소리.
그러자 코앞으로 드리운 좀비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1층으로 올라가는 건가?
“꺄아아악!”
그 순간, 찢어지는 단말마가 귓가로 들려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사람의 목소린데?
의아한 마음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자, 설여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읊조렸다.
“선영.”
아…….
여태 살아 있었던 건가?
철민과 함께 옥상에서 봤던 여자.
차마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이곳에 버려두고 떠난 여자.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몰라도, 기나긴 연명의 시간도 여기까지였다.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더는 단말마가 들려오지 않았다.
뒤이어 건물을 뛰어다니는 좀비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찾는 건가?
탕비실에 갇힌 일행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내가 쥐고 있는 문고리.
이 문이 열리면 끝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분이고 수색작업을 진행한 좀비들은, 끝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크어어어!!
짧고 굵은 울음소리.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울음소리였다.
먹이가 사라졌다는 걸 알리는 울음소리.
뒤이어 복도를 울리던 좀비들의 발소리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교양관에서 겪은 일이 있기에, 발소리가 사라졌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대장 좀비가 사과대 건물을 둘러싸고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행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황덕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이런 생활이 익숙한 거야? 죽는 게 안 무서워? 허망하지 않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황덕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