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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38화 (38/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8화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임의 최종 목표는 라스트아크의 클리어.

진행 중인 퀘스트 목록이 비어 있어야 하고, 모든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상태여야 한다.

만약 퀘스트를 공유했다가 우리 중 한 명이라도 S등급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다 같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트롤리 딜레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

이정우의 말을 해석하면, 실패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버려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소 극단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모두를 살리기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메인 퀘스트 공유는…… 안 하는 게 좋겠네요.”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에,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그보다, 지금은 무기부터 수급하는 게 급선무 같아요. 변종이 나온 이상 저희도 총이든 쇠뇌든, 원거리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군부대라도 털까?”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

“있지. 이 근처에 특공, 야수교, 공병단, 예비군 부대까지 있어. 대구로 나가면 공군 기지도 있고.”

전완수의 설명에 가만히 있던 윤혜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 그럼 군인들이 구출하러 올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

불안한 건 알겠지만, 이제 와서 구조대를 바랄 수는 없다.

옆에 있던 설여원은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안개가 퍼지고 한 달도 넘게 지났어. 구조대는 생각도 하지 마.”

“군인도 면역력이 있는 사람이 존재할 거 아니에요.”

“생활관에서 자다가 감염됐다고 생각해 봐. 감염자가 옆 사람을 물면 파국이지.”

“아무리 그래도…….”

윤혜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그 모습을 답답하게 여긴 설여원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둘 다 진정해. 그쪽도 사정이 있겠지. 근처에 군부대가 있다는 건 희소식이야. 차량 개조 끝나면 확인하러 가자.”

왈! 왈왈!

그 순간, 장군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짖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꼬리를 축 내린 채 창밖을 향해 짖는 장군이.

김희연은 장군이를 품에 안으며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였다.

“장군아 왜 그래. 장군아, 쉿. 조용.”

그러자 장군이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김희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모두가 장군이를 쳐다볼 때,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장군이는…… 분명 창밖을 보고 짖었다.

키리릭-

뒤이어 낡은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외벽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전신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운에 잡념으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비워졌다.

설마.

난 동아리방에 있는 모든 일행에게 외쳤다.

“창문 가려!”

한발 앞서 움직이자,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일행도 덩달아 새하얀 도화지로 창문을 가리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등지고, 창가로 드리우는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영?

아니, 저건 인영이 아니다.

변종의 그림자가 새하얀 도화지를 물들였다.

* * *

모든 일행에게 문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창문에 매달린 그림자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배…… 고파, 배고파?”

윤혜리와 김희연은 라스트아크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설여원은 헌팅 나이프를 말아쥐며 내게 속삭였다.

“여기로 들어올 가능성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달려들지 않아.”

우리의 대화 소리와 장군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에 먹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우리가 (신)학생회관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설마 뒷문에서 좀비들과 싸우는 걸 지켜본 건가?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육안으로 먹잇감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변종이 자리를 피할 때까지 쥐 죽은 듯이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먹잇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상, 변종은 이 건물 전체를 샅샅이 살필 테니까.

난 일행을 돌아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다들 움직이지 말아요. 숨도 쉬지 마.”

일행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유리 너머의 변종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뒤이어 유리에 비친 변종의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고민하는 건가?

그래, 변종에게는 지능이 존재한다.

지금도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쿵, 쿵, 쿵.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변종은 기다랗게 빼든 머리를 유리에 바짝 붙이며 이마로 유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실내를 살피려는 움직임.

유리에 붙인 도화지가 걸리적거리는 건가?

쿵! 쿵!

점점 거세게 유리를 두드린다.

헌팅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맺혔다.

저 돌덩이 같은 머리로 유리를 두드리면……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마른침을 삼키며 일행에게 천천히 복도로 나가라고 했다.

유리가 깨진다면…… 변종과 술래잡기를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키에에에에에에엑!!

변종은 괴성을 내지르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파찰음에 가까운 날카로운 소리에, 우린 눈살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유리를 벽으로 인지한 건가?

육안에 의존하는 녀석이기에, 유리 너머의 도화지를 보고 벽으로 인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현은 두 눈을 껌벅이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뒤이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난 다급히 최현의 입을 틀어막고 변종의 행동을 직시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비명이었다.

이명이 들리는 와중에 입을 열면, 분명 데시벨 조절이 안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장군이는 김희연의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떨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김희연은 장군이의 입을 가렸다.

크어어어어…… 크하아아악!

뒤이어 학생회관 주변 일대를 울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변종의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좀비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에 매달려 있던 변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건물 외벽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 간 거야?”

전완수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일행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변종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또 다른 위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종의 울음소리가 좀비들을 자극했다.

자극받은 좀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두두두두두두두-

크어어어어어어!!

창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오감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

마치 말발굽 소리를 닮아 있었다.

한두 마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울음소리와 발소리만 들어도 감당하기 버거운 숫자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물었다.

“이거 설마…….”

“다들 바리케이드로 이동해요.”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얘기하자, 이정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좀비들의 청력은 30m가 한계라며?”

“변종의 울음소리 형도 들었잖아요. 그걸 못 들으면 이상하죠.”

내가 말한 30m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발소리를 인지하는 범위지, 변종의 울음소리를 인지하는 범위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방이 뻥 뚫린 5층에서 그토록 크게 울었으니, 소리는 더 멀리까지 뻗어 나갔을 것이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창가로 걸어갔다.

슬쩍 도화지를 걷어 바깥 상황을 살피자, 붉게 물든 노을 덕에 주변 경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자욱한 안개의 표면이 꿀렁거린다.

50마리? 100마리?

숫자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수의 좀비가, 변종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퇴로마저 끊어버리겠다는 듯이, 도서관과 (구)학생회관, 심지어 대운동장에서도 모여들고 있었다.

변종의 울음소리는 좀비들을 자극했고, 그 결과는 억울하게도 우리가 감내해야 한다.

무기를 챙기던 정진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물었다.

“만약 변종까지 나타나면 어쩌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어차피 학생회관을 포기하면 우린 굶어 죽어요. 도망갈 곳도 없고요.”

냉정하게 현 상황을 설명하자, 가만히 있던 전완수가 카타나를 뽑아 들며 얘기했다.

“좀비카 운전도 못 해봤는데 죽을 수는 없지.”

이런 상황에 농담이라니.

하지만 전완수의 말은 동아리방에 들어찬 암울한 기운을 환기시켰다.

일행은 결의를 다지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학생회관을 지키거나, 여기서 다 죽거나.

생사는 모두 하늘의 뜻이니 우린 최선을 다할 뿐이다.

크어어어어어!!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계단을 울렸다.

벌써 정문으로 들어온 건가?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리케이드 앞으로 향하고, 윤혜리와 김희연은 마이크와 쇠파이프, 통기타와 밧줄 등을 들고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비들이 2층에서 멈추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었지만, 내 기대를 단숨에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좀비들은 쉬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소리가 5층에서 들렸으니, 5층을 목표로 달려들고 있었다.

크어어어어어!!!

계단의 난간 사이로 1층을 살핀 순간, 반사적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계단을 올라오는 좀비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이 심장을 옥죄어오고, 느슨해졌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좀비들이 바리케이드 앞에 다다른 순간.

쾅!!! 콰드드득! 쾅!!

바리케이드에 돌진한 좀비들은 서로 얽히고설키기 시작했다.

책상과 의자 사이의 빈틈으로 양팔을 뻗으며 우리의 살점을 탐한다.

난 까드득 이를 갈며 온몸으로 바리케이드를 막았다.

“버텨!!”

이정우와 최현, 전완수는 두 눈 부릅뜨고 좀비들의 안구를 꿰뚫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선 윤혜리와 김희연은 통기타와 각종 도구를 5층 계단으로 던지며 좀비들의 속도를 저하시켰다.

바퀴벌레처럼 바글거리는 좀비들은 서로를 밀치고 짓밟고, 머리가 깨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5층으로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바리케이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진영과 나, 최현, 설여원은 온몸으로 바리케이드를 밀치며 무너지지 않도록 버텼다.

이정우와 전완수는 기다란 무기를 이용해 바리케이드에 붙은 좀비들의 안구를 침착하게 꿰뚫었다.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계단에 들어찬 좀비들은 지금껏 경험한 물량의 몇 배나 되었고, 바리케이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아무리 바리케이드의 무게중심을 잡고 버틴다 해도, 시간은 좀비들의 편이었다.

“잠깐만, 혜리야 잠깐!”

윤혜리가 붉은색 통기타를 5층 계단에 집어 던지려는 찰나, 정진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윤혜리가 정진영의 목소리를 듣고 주춤거리자, 그는 바리케이드의 압력으로 인해 상체가 들썩이는 와중에도 윤혜리를 향해 외쳤다.

“그 기타는 안 돼!”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기타 걱정이라니.

난 정진영을 째려보며 외쳤다.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저 기타를 부수는 건 우리 소리결의 역사를 부수는 거라고!”

“무슨 역사 타령이야!”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던져?’

위에서 밑으로.

윤혜리와 김희연은 각종 물건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큰 타격은 없지만, 좀비들의 압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차피 물건을 던진다면…… 더 효과적인 걸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

난 윤혜리와 김희연을 쳐다보며 외쳤다.

“휘발유 들고 와!”

윤혜리는 뒤늦게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후다닥 동아리방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차량에서 뽑아온 휘발유를 5층 계단에 쏟아부었다.

A팀은 B팀이 없는 동안 (신)학생회관 근처의 모든 차량에서 휘발유를 뽑았다.

10L 이상의 휘발유가 동아리방에 있었다.

추후 좀비카가 완성되면 사용하려고 아껴둔 휘발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윤혜리와 김희연은 5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향해 쉴 새 없이 휘발유를 부은 뒤, 주머니에 넣어둔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300원짜리 라이터.

두 사람은 불을 켜고 넋이 나간 모습을 보였다.

라이터를 던지면 불이 꺼지고, 들고 있으면 불이 붙지 않으니 당황한 모양이다.

사람도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놀라면 기계처럼 고장 난다.

난 김희연을 향해 소리쳤다.

“종이 들고 와서 불붙이면 되잖아!”

김희연은 그제야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후다닥 동아리방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동그랗게 뭉쳐둔 신문지에 불을 붙이며 계단을 향해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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