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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34화 (34/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4화

종합강의동 꼭대기 창가에 있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양팔을 흔들었다.

족히 400m에서 500m는 떨어진 거리.

거울을 이용해서 빛을 반사시킨 모양이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커다란 도화지에 큼지막하게 글자를 적어 창가로 들고 왔다.

너무 멀어서 안 보인다.

‘김희연.’

무의식적으로 김희연이 떠올랐다.

시력이 2.0이라고 했지?

동아리방으로 내려가 김희연을 데려오자,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도화지에 적힌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안녕…… 하세요?”

세상이 망한 마당에 첫인사로 안녕하세요라니?

창가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금 글자를 적더니, 완성된 문장을 창가로 들이밀었다.

김희연은 도화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의구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뭐라고 적혀 있어?”

“그게…… 실례지만 저희 좀 구해주세요, 라고…….”

덩달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머리에 나사 빠진 놈들인가?

* * *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김희연은 내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보기에, 내게 먼저 물었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어?”

“그게…… 저 사람들도 죽일 거예요?”

“뭐?”

김희연의 말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내 이미지가 이렇구나.

내가 아무나 죽이는 미친놈으로 보이는 건가?

난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건 만나보고 결정해야지.”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건 어때요?”

“저놈들이 우리 위치를 아는데?”

“혹시라도 일이 안 좋게 흘러갈 수도 있으니까…….”

김희연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아니지,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지.

밑에 있는 일행과 상의해야겠다.

내가 대표도 아닌데 독단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고 판단하면 된다.

김희연과 함께 동아리방으로 내려가자, 다들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김희연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를 데려간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길게 끌 필요 없이, 모든 일행을 책상 앞으로 부르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방금 희연이랑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생존자?”

정진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정우를 쳐다봤다.

이정우는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종합강의동 7층이요. 제일 좌측 창가에 있었어요.”

“몇 명인지 확인했어?”

“너무 멀어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희연이 추가설명을 덧붙였다.

“창가에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고…… 둘 다 남자였어요.”

김희연의 말을 듣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긴, 글자도 확인할 정도면 성별 정도는 쉽게 구분할 수 있겠지.

이정우는 김희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기나 다른 특징은?”

“무기는 못 봤어요. 그런데…… 둘 다 좀 이상해요.”

“이상해? 뭐가. 사과대 놈들이랑 같은 부류야?”

이상하다는 말에 이정우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과대 사건을 겪은 게 바로 어제였다.

이정우가 얼굴을 들이밀며 묻자, 김희연은 주춤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대신 설명해 달라는 건가?

난 머리를 긁적이며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이정우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살아남은 게 이상하다는 거야?”

“다짜고짜 저희한테 구해달라고…… 그것도 실례지만 저희 좀 구해주세요, 라고 하더라고요.”

“실례지만?”

이정우도 이해가 안 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진영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미친놈들 아니야?”

지금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에게 위치가 발각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이 들도록 만드는 행위니까.

그런데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저희 좀 구해주세요’라니?

뒤이어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창가에 있던 남자들…… 굶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김희연의 말에 난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종합강의동 근처에 식당이 있나? 아니면 종합강의동에 태양광 패널 유무 아는 사람?”

“아마 있을걸? 제일 최근에 지은 건물이잖아.”

전완수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옆에 있던 최현이 거들었다.

“최근에 지은 게 아니라 재건축한 거지. 몇 달 전에 태양광 패널 옮기는 거 봤어. 거기 연구실이 많아서 아마 설치했을걸?”

“식당은?”

“식당은 없지.”

식량을 보충할 구멍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설여원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가자, 여기서 얘기해 봐야 답은 안 나와.”

“종합강의동으로 가려면 도서관이랑 중앙광장을 지나가야 돼. 위험부담이 커.”

“다른 길은 없어?”

“공대 쪽으로 돌아서 이동해야 돼. 엄청 돌아가는 거지. 게다가 공대에서 종합강의동으로 나가는 길이 대로라서 좀비들의 숫자도 알 수 없고.”

설여원은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를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어느 지점을 톡톡 건드리며 얘기했다.

“공대에서 종합강의동으로 가는 길에 자연대 있는 거지? 너무 돌아가는데?”

“그래서 가로질러 가는 도서관이 있는 거야.”

설여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만 정리하면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하지만 굳이?

위험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

신학생회관에서 공대로 이동하는 길은 얼추 정리가 끝났고, 공대에서 차를 끌고 나올 때도 뒷길을 이용하면 된다.

정문으로 향하는 대로를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여원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이마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버려 두자. 우리가 그쪽으로 못 간다면, 그쪽도 이곳으로 못 오는 거 아니야?”

설여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대 사건을 겪은 뒤로, 지나치게 생존자를 신경 쓰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든 상대방이 우리의 은거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이정우는 팔짱을 끼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단 여원이 말대로 하자. B팀은 실습실에 집중해 줘. 종합강의동에 있는 놈들은 A팀이 신경 쓸 테니.”

“형, 현이 데려가도 될까요?”

내가 최현의 이름을 꺼내자, 가만히 앉아 있던 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 갑자기 왜.”

“차량 개조에 속도를 붙이려면 일손이 더 필요해.”

최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이 그의 심경을 대변한다.

최현은 지금껏 안개 밖에 있는 좀비들만 상대해 왔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좀비들과 싸우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그래도 검도를 배우며 기른 운동신경이 있으니, 금방 적응하리라 생각한다.

최현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정우도 반대하지 않았다.

전완수는 최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야, 긴장되냐?”

“아니거든?”

“푸하핫! 긴장했네. 표정에서 딱 보이는구먼.”

“긴장해서 너 찌를지도?”

“아, 미안.”

두 사람의 농담에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금 밝아졌다.

이정우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나를 불렀다.

“재형아, 넌 퀘스트 보상 뭐 받았어?”

“맞다, 깜박하고 있었네요.”

난이도 C의 살인귀 처단.

사과대에 있던 철민이란 남자의 비명이 들린 뒤로 퀘스트가 완료됐다.

확인할 겨를이 없어서 계속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확인하지 않았다.

시스템창을 확인하자, 완료된 퀘스트가 표시되었다.

[살인귀 처단: 난이도 C(Clear).]

-지급된 아이템: 응급키트

전동 칼갈이와 응급키트 중에 고르는 줄 알았는데, 선택권이 없었다.

일행의 보상을 묻자, 이정우와 정진영을 제외한 모두가 응급키트를 받았다.

‘퀘스트 완료하고 받는 아이템은 존재하는데, 왜 상점은 없는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측 상단의 홀로그램을 켜고 공란을 살폈다.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할 때는 이곳에 상점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점도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사라진 건가?

“저기…….”

눈치를 보고 있던 김희연이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었다.

아차, 김희연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이정우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형, B팀은 실습실로 이동할 테니 희연이한테 라스트아크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

안건이 얼추 정리됐기에, 난 목장갑을 착용하며 얘기했다.

“움직이죠.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 * *

불과 10분 전만 해도 따사롭던 햇살이 구름에 숨었다.

안개의 농도도 평소보다 짙어졌다.

시야는 더욱 차단되었고, 습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좀비들의 습격은 없었지만, 실습실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뒤따라오던 전완수는 인중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얘기했다.

“비 올 거 같다.”

“그걸 어떻게 알아.”

“새가 낮게 날잖아.”

안개 속에서 가로로 빗금을 그으며 날아가는 새들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전완수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이거 서울놈이라 모르나 보네. 새가 낮게 날면 비 온다는 뜻이야.”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그러자 뒤따라오던 최현이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완수야, 지금 장마철 아니냐?”

“지금이 7월 말이니까…… 원래는 장마가 끝나야 정상이지.”

“이번 장마는 너무 늦는데?”

날짜를 확인한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모르겠지만, 얼추 계산해 보면 지금은 7월 말.

이것도 안개 때문인가?

지난 한 달간 단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다.

전완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장마 시작되면 설마 변종까지 나오는 거 아니야?”

“변종은 두 번째 에피소드 중후반에나 나오잖아.”

최현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전완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라스트아크 스토리라인이 다 무너졌으니 그러지.”

전완수와 최현의 대화를 들으며 나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라스트아크의 설정.

날씨가 눅눅해지면 좀비들의 진화가 빨라지고 신체 능력이 증가한다.

난 게임을 플레이하며 엔딩에 집착한 나머지 라스트아크의 설정을 대부분 읽지 않았다.

매번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오는 영상마저 스킵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에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완수야, 그거 말고 다른 설정은 또 없어?”

“설정? 뭐 어떤 거. 캐릭터 설정?”

“캐릭터 설정? 그런 것도 있었어?”

“넌 캐릭터 설정도 안 읽어보고 게임 했냐?”

“캐릭터 능력만 보고했지.”

“봐봐, 내 말 맞지? 이 자식 에덤 화이트 고집한 것도 설정 안 읽어서 그런 거라니까?”

설정과 에덤 화이트에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

전완수에게 에덤 화이트의 캐릭터 배경을 묻자, 그는 콧방귀를 뀌며 얘기했다.

“에덤 화이트는 전직 군인 출신이야. 연구실에서 실험당하던 군인.”

“인체실험?”

“어, 파병 나갔다가 다리 하나 잃었거든. 그런데 인체실험으로 다리가 재생된 거지.”

“몰랐어. 그런 걸 누가 읽어.”

“너 조립할 때도 설명서 안 읽는 편이지?”

멋쩍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전완수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좀비 바이러스는 원래 죽지 않는 군인을 만들기 위한 실험이었고, 실험의 위험성을 깨달은 에덤이 연구실을 폭파시키고 도망친 거야. 그런데 연구실에 있던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퍼지면서 안개가 형성된 거지.”

“그럼 이 모든 게 에덤 화이트 때문이야?”

“어, 그래서 에덤 능력이 강화잖아. 신체 강화. 쓰레기라고 불리는 건 초반에 너무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있고, 캐릭터 설정 때문도 있고.”

나만 몰랐나?

구레나룻을 긁적이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자,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쉿.”

그 순간, 옆에 있던 정진영이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꺼내 들며 사주경계에 나섰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들리는 소리도 없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완수는 주변에 보이는 것이 없자, 정진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형 왜요. 뭐라도 봤어요?”

“앞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들리는 거라곤 바람 소리뿐이었다.

실습실로 향하는 샛길은 바람길로 통하기에, 다른 곳에 비해 바람이 거센 편이었다.

설여원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무슨 소리요?”

“낡은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정진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낡은 수레바퀴 소리.

첫 번째 변종이 나타날 때, 놈의 입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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