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3화
돌아오는 길에도 김희연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어느 쪽 사람인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과대에 있던 남자를 본인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나서던 순간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심적인 안정만 취하면 충분히 좋은 동료가 될 것이다.
암담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 정신을 놓았지만,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 좋아질 것이다.
방문을 닫고 일행을 돌아보자, 이정우는 얼추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 많았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윤혜리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엷은 미소를 짓더니, 수줍게 눈인사를 건네며 김희연의 곁으로 걸어갔다.
난 구석에 놓인 소파에 누우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지금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달랬다.
오늘, 내 생에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였다.
좀비가 아니라, 감정을 지닌 사람을.
나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동아리방에 돌아오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락함이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해도 되는 걸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이토록 심적인 안정감을 주는 줄 몰랐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는데, 벌써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마를 짚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니, 노곤한 마음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꿰매기 위해, 지금의 몽롱함에 몸을 맡겼다.
* * *
아득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창가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아침노을.
벌써 아침인가?
정말 간만에, 누가 업어가도 모르도록 깊은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 간에 상체를 일으키자, 흐릿하던 말소리가 선명해졌다.
“어? 재형이! 일어났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전완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완수도 푹 쉰 모양이다.
이에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아침부터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마.”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일행이 동아리방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다들 거기서 뭐해?”
“재형아! 너도 얘 좀 봐봐. 엄청 귀여워.”
설여원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사람들 사이의 무언가를 쳐다보자, 흰색 털로 뒤덮인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자, 웬 강아지가 동아리방에 있다.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헥헥 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강아지.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거 래브라도 리트리버 아니야?”
“맞아, 아직 4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 너무 귀엽지?”
“어디서 온 거야?”
“몰라? 진영이 오빠가 데려왔어.”
정진영을 쳐다보자, 그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얘기했다.
“새벽에 정찰 도는데 2층에서 뭐가 올라오더라고.”
“안개를 뚫고요?”
“어, 좀비라고 하기에는 그림자가 너무 작아서 유심히 쳐다봤더니, 갑자기 나한테 달려드는 거야.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데, 내 앞에 앉아서 꼬리를 흔들더라고.”
교내에 나무와 숲이 많다 보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밤에, 모든 수업이 끝난 뒤에 동네 사람들이 강아지를 끌고 나왔다.
이 녀석도 주인이랑 산책을 나왔다가 이렇게 된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강아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자, 목줄에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장군이.
암컷이었다.
좀비에게 물린 자국은 없고, 눈동자도 평범한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동물도 인간처럼 안개에 면역이 있는 개체가 있는 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자, 윤혜리와 설여원, 심지어 김희연까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뒤이어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재형아. 우리 혹시.”
“저걸 어떻게 키워.”
단칼에 거절하자, 설여원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윤혜리와 김희연의 표정도 시무룩하게 변했다.
당장에 식량 걱정은 없지만, 입이 하나 늘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중을 생각한다면…… 정들기 전에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냉담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쳐다보자, 옆에 있던 이정우가 나를 불렀다.
“재형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이정우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자, 그는 담배를 꺼내 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형 비흡연자 아니었어요?”
“오래 살아서 뭐해.”
이정우는 싱겁게 웃으며 내게 담배를 건네주었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그는 폐부에 들어찬 회색 연기를 내뱉으며 얘기했다.
“저 강아지, 우리가 키우자.”
이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형,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돼요. 저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버리는 게 맞아. 근데 사람이 어떻게 이성적으로만 살아.”
“…….”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정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애들 표정 봤어?”
이번에도 대답을 흐리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껏 애들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본 적 있어?”
“그건…….”
“한 달간 같이 있으면서 처음 봤다. 애들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이정우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조금 전 동아리방에 있던 일행의 표정은 안개가 퍼진 뒤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정우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난간에 비비며 얘기했다.
“넌 사람이 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냐.”
“…….”
“사는 이유, 생각해 본 적 없지?”
“……네.”
“이유가 있어야지, 목적이 있어야 하고.”
“…….”
“우리가 아크로 가는 거? 좋아, 나도 찬성이야. 그런데 활력이 있어야지. 매 순간 살아남기 급급하면 애들이 안 지칠까?”
이정우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항상 냉정하게 얘기하지만, 정작 나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나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있으니까.
만약 동아리방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정감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내가 버텨낼 수 있었을까?
고개 숙인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자, 이정우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얘기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팀의 대장은 네가 맡는 게 맞아.”
“네? 아니에요, 형이 있는데 제가 왜…….”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것 말고 내가 너보다 나은 게 뭔데?”
“…….”
“대표는 항상 이성적이어야지.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니까. 하지만 너무 이성적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어.”
이정우의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내 방식대로 일행을 이끌면 생존엔 유리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행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질 것이다.
일전의 일만 봐도 그러했다.
김희연이 나타나고, 이정우와 말다툼을 할 때 일행이 지었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언젠가는 내게 반발심을 가지는 이들도 나오겠지.
이정우의 말이 이해돼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난…… 항상 최선의 방안을 떠올렸다.
언제나 옳은 방안을 떠올렸지만, 그게 현명한 방안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아직 스물하나에 불과한 내게, 일행의 감정까지 신경 쓰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이정우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얘기했다.
“우리가 짐승처럼 살아남는다면, 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
“그러니 이번엔 내가 부탁할게. 저 강아지, 우리가 키우자.”
이정우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여원과 윤혜리, 김희연의 웃는 얼굴이 눈에 밟힌다.
그들의 웃는 얼굴은 볼 때면…… 지금의 미쳐버린 세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 * *
동아리방으로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다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걱정하는 표정.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서 항상 저런 표정만 봤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다들 불안해했다.
난 민망한 마음에 목덜미를 주무르며 얘기했다.
“너희, 장군이 잘 키울 수 있겠어?”
설여원과 윤혜리, 김희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키우자.”
윤혜리는 환하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뒤이어 내 앞으로 달려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은가?
설여원도 입가로 번지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앙다문 채 장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동아리방의 분위기가, 공기부터 달라진 기분이었다.
전완수와 최현도 싱겁게 웃으며 장군이를 쳐다보더니, 씰룩이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각자 할 일은 해야지? A팀 슬슬 운동하러 갈 시간이다.”
“넵!”
윤혜리는 힘차게 대답하며 가장 먼저 3층 헬스장으로 향했다.
항상 피곤한 안색으로 향하더니, 오늘은 활력이 샘솟는 모양이다.
괜스레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항상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장군이가 나타난 뒤로 조금은 환기된 기분.
이정우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최현과 함께 헬스장으로 향했다.
A팀이 모두 헬스장으로 향하자, 구석에 있던 전완수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린 언제 출발해? 사과대 정리도 끝났으니 다시 실습실 가야지.”
“오전 8시니까…… A팀 운동 끝나면 출발하자.”
전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다.
난 설여원과 전완수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완수랑 여원이, 둘 다 괜찮아?”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금세 의도를 파악하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괜찮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전완수의 대답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미안하다, 너희한테 부담 줘서.”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자, 설여원이 다가와 내 등짝을 때리며 얘기했다.
“어허! 네가 약해지면 쓰나.”
“…….”
“그만큼 우리를 믿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전완수도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충격요법이라 생각할게.”
“다들 고맙다.”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민망한 거였나?
내 입으로 얘기하고도, 괜스레 부끄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희연은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며 얘기했다.
“저기…… 전 B팀인가요?”
아차, 김희연을 깜박했네.
난 김희연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김희연 씨는 괜찮아요?”
“네? 아,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움츠린다.
여전히 어색함이 있고, 나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모습.
“김희연 씨는 A팀이랑 같이 움직여주세요.”
“A팀이요? 아, 방금 나간 분들이 A팀이죠?”
“네, 저희 팀에 들어온 이상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해야 합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자, 김희연은 금세 화색을 띠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 혜리랑 동기예요.”
저렇게 수줍게 얘기할 일인가.
난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방금 나간 정우 형한테 물어봐. 잘 설명해 주실 거야.”
“네!”
김희연은 해맑게 웃으며 3층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여원은 콧방귀를 뀌며 얘기했다.
“윤혜리나 김희연이나, 둘 다 특징이 확실하네.”
“뭐가.”
“둘 다 귀여워.”
“너 눈빛이 음흉해.”
농담을 던지자, 설여원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다짜고짜 내 팔뚝을 때렸다.
“나 남자 좋아하거든?”
“누가 뭐래? 그냥 음흉하다고.”
설여원은 입으로 효과음을 넣으며 내게 주먹을 날렸다.
물론 약하게 때리긴 하지만, 툭하면 때린다.
손버릇인가?
그래도 설여원의 밝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 *
A팀이 돌아오고, B팀은 실습실로 향할 채비에 나섰다.
난 안개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학생회관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 상황을 살폈다.
우리가 이동할 길을 눈어림으로나마 살펴두기 위함이었다.
‘뒷문으로 나가면 하나, 주차장에 둘.’
안개 속을 거니는 몇몇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놈들은 알 수 없지만, 뒷문 근처에 있는 놈들은 육안으로 살필 수 있었다.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다시금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내 시선을 붙잡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방금 뭐가 반짝이지 않았나?’
잘못 봤나?
지면은 온통 안개로 잠식된 상태.
빛이 나올 구멍은 없었다.
역시 잘못 본…….
번-쩍.
그 순간, 좌측에서 햇빛을 반사하는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도서관 건너편에 있는 종합강의동에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을 응시한 순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