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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29화 (29/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9화

이정우는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을 읊조렸다.

“슬슬 장마도 시작될 텐데, 큰일이네.”

“그건 그때 생각하죠.”

“그건 그렇고, 여기 있던 시신들은 뭐야?”

“원래 적당히 실험하고 자려고 했는데, 1층에 유리문이 없다 보니 몇 놈이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그것들을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다는 거야?”

“밤에는 2층까지 안개가 올라오잖아요. 안개 따라서 2층까지 올라온 놈들만 끌고 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어떡해?”

“어제 아무도 보초 안 정했죠?”

이정우는 그 말을 듣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에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중간에 끝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보초를 정한 기억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보초도 설 겸, 실험을 계속한 겁니다.”

이정우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 팔뚝을 토닥였다.

어제는 다들 피곤한 나머지 일찍이 잠을 청했다.

때문에 보초를 정하지 않고, 다들 단잠에 빠져들었다.

3층에 좀비들을 두고 동아리방으로 올라갈 수 없었기에, 난 해가 뜰 때까지 홀로 보초를 서며 실험을 이어간 것이다.

얼추 상황파악이 끝나자, 다들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설여원도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내 손에 쥐어진 대걸레를 빼앗으며 얘기했다.

“올라가서 쉬어. 뒷정리는 우리가 할게.”

“아니,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일이 있다는 말에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사과대부터 정리하죠.”

“사과대를? 지금?”

이정우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묻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우 형 말씀대로 장마가 시작되면 신경 쓸 게 더 많아질 거예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사과대 퀘스트부터 완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사과대에 있는 놈들도 김희연이 없어진 걸 알아챘을 테니,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야 합니다.”

뒤가 안전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다소 위험하지만, 지금은 걸리적거리는 존재부터 처리하는 게 옳다.

기숙사에 있는 대장 좀비도 슬슬 신경 써야 한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대장 좀비도 기숙사 정리를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더 늦기 전에 사과대를 정리하고 퀘스트를 완료한 뒤, 차량 개조를 끝내야 한다.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밖으로 나올까? 식량 구하는 게 두려워서 서로 잡아먹는 놈들인데.”

이정우가 되묻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일단 김희연부터 깨우는 게 어때요? 김희연이 사과대에서 왔으면 정보가 있지 않을까요?”

모든 건 시간 싸움.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할 때도, 단 하루를 허투루 쓰는 바람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우선순위부터 정하고 집중해야 한다.

난 설여원의 의견에 동의하며 얘기했다.

“김희연부터 깨우죠.”

“진영아, 혜리랑 같이 가서 김희연 깨워줘.”

이정우가 얘기하자, 정진영은 윤혜리와 함께 5층으로 올라갔다.

이정우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눈썹을 긁적이며 물었다.

“계획은 있는 거지?”

“무슨 계획이요?”

“사과대로 가자며. 안전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각오해야죠.”

덤덤하게 대답하자, 이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좀비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이정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사과대에 있는 살인귀까지 신경 쓰며 나아갈 여력은 없고,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기 전에 사과대 퀘스트도 완료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 하나는 끝을 봐야 한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김희연은 윤혜리의 부축을 받아 3층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기력이 쇠한 모습이었지만, 어제보다 정신은 맑아 보였다.

김희연은 3층에 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정우는 김희연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김희연 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네.”

김희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납니까?”

이정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김희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 숙였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발 다가서자, 윤혜리는 대뜸 진정하라는 말을 꺼냈다.

멋쩍은 마음에 한숨을 내쉬자, 김희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저 정말 죄송하지만…… 기억이…… 잘 안 나요.”

“마지막 기억이 어디예요.”

“마지막 기억이…….”

무섭고 두려운 건 알겠는데, 듣는 입장에선 속 터진다.

난 답답한 마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왔냐는 겁니다. 그거부터 얘기해 봐요.”

김희연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김희연은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과대 302호에 있었어요.”

사과대라는 말에 일행의 표정으로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김희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의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난 가만히 팔짱을 끼며 김희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 *

김희연은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빈 강의실에서 2학기 축제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사과대 건물에 김희연 씨 말고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학생회장 오빠랑 부회장 오빠랑…….”

학생회 출신인 모양이다.

김희연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아홉, 여자는 열둘이었다.

김희연은 떨리는 양손을 꼭 붙잡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퍼진 시점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두렵고, 불안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턱없이 부족한 식량으로 인해 3일 만에 안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고, 그 과정에 남자 넷과 여자 일곱이 좀비로 변했다고 한다.

안개에 면역을 지니고 있던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은 다시금 강의실로 돌아와 구조대를 기다리게 되었고, 그때부터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반사적으로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면역을 지닌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확률 문제에 옳고 그름을 어떻게 따지겠는가?

머릿속의 잡념은 접어두고, 김희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과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단 하나의 식량도 없는 상태로, 화장실에서 물만 마시며 버텼다고 한다.

보름이 지나도록 구조대가 오지 않자 남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오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과격해졌다고 한다.

여자들도 처음에는 말리려고 했지만, 점차 지칠 대로 지쳐서 그들을 말릴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다 며칠 전, 화근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부회장과 회장 사이에 마찰이 생겼고, 평소 다혈질적인 성향이 강하던 부회장이 참다못해 회장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회장은 쓰러지는 과정에 책상 모서리에 목덜미를 찍혔고, 게거품을 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뒤로 정신을 놓아버린 부회장의 광기가 시작된 것이다.

몇 날 며칠을 굶었기에, 부회장은 회장의 시신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 살점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우리가 발견한 사과대 옥상에서 피어난 연기.

그게 회장의 시신을 불에 익히며 발생한 연기였다.

3일만 굶어도 동네에서 가장 먼저 밥 짓는 집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옥상에서 퍼지는 굽는 냄새에 다른 학생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김희연은 그날의 참상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정우는 바닥에 내려둔 500ml 생수를 건네며 얘기했다.

“천천히 마시면서 얘기해요. 진정하고.”

“…….”

김희연은 생수를 마시며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얘기했다.

“그러다…… 남자들 사이에 주먹질이 오갔어요.”

“고기를 두고 싸운 겁니까?”

“아니요, 맨정신을 유지하던 총무 오빠랑 당장에 허기짐을 못 이긴 다른 사람들이 싸웠어요.”

김희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성을 유지하던 총무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사람이 개처럼 맞아 죽은 것이다.

광기에 빠진 남자들은 살점으로 배를 채웠고, 그 모습을 눈뜨고 지켜본 여자들은 공황에 빠졌다고 한다.

겁에 질린 여자들에게 부회장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먹어, 너희도 먹고 싶잖아.

여자들이 거부반응을 보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본색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 뒈지기 싫으면 빨리 와서 처먹어.

눈치를 보던 여자들은 결국 부회장의 곁으로 걸어가 같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 김희연과 다른 여자는, 그 자리에서 가축 취급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희연의 눈가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윤혜리는 김희연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누군데? 끝까지 안 먹은 사람이 누구야?”

“소정이…….”

“소, 소정이?”

소정이가 누군지 몰라도, 윤혜리도 아는 사람인 모양이다.

윤혜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정이는, 소정이는 지금 어디 있어?”

윤혜리의 물음에 김희연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굳이 뒷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소정이란 여자가 먼저 식량이 되고, 다음이 김희연이었던 모양이다.

모든 상황을 눈 뜨고 지켜본 김희연은 정신을 놓아버렸고, 사과대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정신을 놓은 채 탈출한 모양이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남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오는 길에 좀비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이정우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학생회관으로 올 생각을 한 겁니까?”

김희연은 양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힘겹게 대답했다.

“저도, 저도 활동하는 동아리가 있어요.”

학생회에 동아리까지.

여러모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동아리명을 묻자, 김희연은 봉사동아리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봉사활동을 주로 하는 동아리라면 4층에 있다.

교내에 평판도 좋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봉사활동을 가는 곳으로 유명했다.

과에서 배신감을 느낀 김희연은, 무의식적으로 동아리방을 찾은 모양이다.

이정우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물었다.

“올 때 어떻게 왔는지 기억 안 나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죽기 싫다는 생각으로 매일 울다가……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숲이었고, 그 뒤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기, 소리결 동아리방이었어요.”

“숲이요? 거기가 어딥니까.”

“잘은 기억이 안 나고…… 은행나무가 많았던 거 같은데…….”

은행나무라는 말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도가 그려졌다.

그래, 왜 굳이 농구코트만 생각했을까.

일전에 이정우와 정진영을 구출할 무렵, 대운동장의 옆에 위치한 숲이 은행나무 숲이었다.

은행나무 숲을 가로지르면 인문대로 통하는 등나무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이동하면 경영학과 건물의 주차장이 나온다.

일전에 좀비들을 처리했으니, 그곳은 좀비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을 돌아가는 길이지만, 농구코트를 지나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것이다.

난 일행의 얼굴을 훑으며 얘기했다.

“저랑 완수, 여원이만 사과대로 갑니다. 다른 분들은 동아리방 지켜줘요.”

갑작스러운 말에 다들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지목당한 전완수와 설여원도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너희 셋이 가겠다고? 너무 위험해. 다 같이 움직이는 게 맞아.”

“아니에요. 사과대에 있는 놈들의 숫자도 알았고, 무장상태도 알았습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오히려 독이에요.”

“위험을 떠안을 필요 없어.”

“다 같이 움직이면 오히려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요. 사과대까지 은밀하게 진입하는 게 관건입니다.”

이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최현이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왜 빼고 가? 나도 같이 가.”

“마음만 받을게.”

최현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정우과 정진영의 눈치를 봤다.

이정우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물었다.

“그만큼 확신이 있으니 셋만 가겠다는 거지?”

“네, 그리고 한 명 더 데려갑니다.”

“누구.”

“김희연 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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