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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27화 (27/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7화

무슨 생각으로 첫 마디를 꺼낸 걸까.

설여원이 나를 높게 평가하면서 동아리 사람들을 낮잡게 얘기했을 때, 내가 만약 동조하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면…… 설여원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간사하다고 해야 좋을지, 성숙하다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멋쩍은 마음에 목덜미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화낼 상황이긴 했어. 그래도 눈치 보이더라. 어떻게 말려야 하나 싶어서.”

정체 모를 여자가 들어오고 10분 뒤에 우리가 도착했다.

여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니, 이정우도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여자의 정체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단팥빵을 주고 책상 앞에 앉혀둔 거겠지.

나는 성급했고, 이정우는 태연했다.

서로의 속도가 다르기에 생긴 마찰.

속도는…… 천천히 맞춰가야겠다.

오늘은 마찰이 생겼지만, 평소에는 의견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하니까.

이정우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독불장군도 아니니까.

또한 다툼이 생기더라도 우리를 중재할 수 있는 정진영이 있기에, 싸움이 커지지 않도록 조율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좋은 팀이고, 좋은 사람들이다.

‘올라가면 사과부터 해야겠어.’

사과는 동생이 먼저 하는 게 보기 좋은 법.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설여원은 덩달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올라가게?”

“가야지, 너무 오래 자리 비우면 골만 깊어져.”

설여원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동아리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설여원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설여원과 함께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 * *

동아리방에 도착하자, 책상 앞에 둘러앉아 있던 일행이 이정우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정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난 이정우의 앞으로 걸어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아까는…… 죄송해요, 형.”

고개 숙여 사과하자, 이정우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어. 내 설명이 부족하기도 했고.”

“무턱대고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도 미안하다.”

이정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사과라는 게 참…… 그렇다.

조금만 자존심을 굽히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는데.

보잘것없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 때문에 관계가 틀어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진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형이 허벅지 굵어진 거 봐라. 얼마나 뛴 거야?”

“좀비들 다 때려죽일 만큼 뛰었죠.”

싱겁게 웃으며 대답하자, 책상 앞에 둘러앉아 있던 일행의 표정으로 안도감이 맴돌았다.

내가 또 윽박지를까 봐 걱정한 모양이다.

물론 이정우에게 사과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눈앞의 여자.

이 여자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난 여자를 쳐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얘기할 생각 없습니까?”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단팥빵은 이미 다 먹은 상태였고, 지금은 500ml 생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이에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현아, 데니 능력이 독심술이지?”

“이미 해봤어. 아무것도 안 읽혀.”

정신을 완전히 놓은 모양이다.

이정우는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얘기 못 했는데, 이 여자 들어오고 퀘스트가 생성됐어. 그것 때문에 쫓아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둔 거야.”

“무슨 퀘스트요?”

“공유해 줄 테니 B팀은 퀘스트 받아. 퀘스트 공유해야 보상도 많이 받지.”

이정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띠링-

뒤이어 내 눈앞으로 라스트아크의 알림창이 생성되었다.

각자의 홀로그램은 각자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다.

-퀘스트를 공유합니다.

[살인귀 처단: 난이도 C]

-살인귀를 피해 안전가옥을 대피한 김희연, 사과대의 살인귀를 처리하고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라.

-클리어 보상: 다이아몬드 코팅 휠 전동 칼갈이 or 응급키트.

-클리어 조건: 김희연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상태여야 합니다.

-제한 시간: 에피소드 ‘안전가옥’이 끝나기 전에 클리어하셔야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이름은 김희연.

이정우가 김희연을 내치지 못한 건 퀘스트 때문이었나?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화부터 냈다는 생각에 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정우는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일단…… 김희연은 여기 두는 게 맞는 거 같아. 사과대로 향하는 건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 다들 지쳤으니 쉬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에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초는 있어야지. 보초는 A팀이 설 테니, B팀은 쉬어.”

B팀은 밖에서 고생하고 왔으니, 잠이라도 편히 자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정우가 동아리방을 나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현과 윤혜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윤혜리의 팔을 잡으며 얘기했다.

“혜리는 앉아 있어.”

“아니에요. 저도 일해야죠. A팀인데.”

“넌 이 친구 맡아야지.”

넋이 나간 여자를 가리키며 얘기하자, 윤혜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김희연의 얼굴을 쳐다봤다.

윤혜리는 생각이 많은 듯,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김희연의 옆에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희연아, 내 목소리 안 들려?”

윤혜리는 김희연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김희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김희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완전히 맛이 갔다.

설여원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PTSD 같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사람이 저렇게 넋이 나간 건 처음 봤어.”

나도 동감이다.

지금까지 들어보기만 했지,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윤혜리는 김희연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그동안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과에서 처음 만나던 순간,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며 과제 걱정을 하던 순간, 축제 기간에 먹었던 파전, 사과대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같이 사진을 찍던 순간 등.

그러다 문득, 김희연의 손가락을 꿈틀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윤혜리에게 얘기했다.

“혜리야, 방금 한 얘기 계속 해봐.”

“네?”

“방금 꺼낸 얘기.”

“어, 어떤 거요?”

“사과대 고양이 얘기 다시 해보라고.”

윤혜리는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길고양이 얘기를 꺼냈다.

초코라 불리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집을 만들어준 이야기였다.

초코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사람만 보면 먼저 다가와서 애교를 부리는 개냥이.

우리 학교에서 꽤 유명한 길고양이였다.

도도한 걸음과 달리 애교가 많아서, 가방에 사료를 들고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SNS에 초코 by 정, 이라는 사료 주는 모임이 있을 정도로.

뒤이어 퀭한 동태 눈깔이던 김희연의 동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초코…….”

김희연의 입이 열렸다.

놀라서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책상 앞의 의자에 앉으며 김희연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풀려 있던 동공이 수축되고,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람 눈이 저렇게 변하는구나.

뒤이어 김희연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갑작스레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 여기 어디야. 누구세요?”

“진정하세요. 여긴 안전합니다.”

“누, 누구세요!”

김희연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윤혜리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얘기했다.

“희연아 나야. 나 기억 안 나?”

“혜, 혜리?”

김희연이 윤혜리를 알아본다.

그러자 윤혜리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윤혜리는 김희연을 와락 안으며 터지려는 울음을 힘겹게 억눌렀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김희연이란 사람, 나쁜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온 건 아닌 모양이다.

정말 정신을 놓고 여기까지 온 건가?

뒤이어 윤혜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했다.

“얘 제 친구 맞아요. 쫓아내지 말아요.”

아침까지 입을 열지 않으면 밖에 던져버리겠다고 해서 그런가?

지레 겁부터 먹었다.

멋쩍은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 신체검사 했어?”

“했어요. 제가 꼼꼼하게 살폈어요. 진짜예요. 정우 오빠한테 물어보세요. 다른 건 몰라도 물린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건 확실하게 확인했어요.”

김희연보다 윤혜리가 더욱 안달이다.

난 입맛을 다시며 김희연을 불렀다.

“김희연 씨.”

“…….”

“김희연 씨?”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더니, 이제 와서 다시 함묵한다.

“김희연 씨, 제 말 들리면…….”

“……싫어.”

순간, 김희연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라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김희연을 부르자, 축 처져 있던 김희연의 팔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희연의 손가락 마디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뒤이어 본인의 목을 벅벅 긁더니,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것 같던 두 눈이, 다시금 공황상태로 물들어간다.

그러고는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읊조렸다.

“머, 먹기 싫어. 나, 난 안 먹어. 안 먹을 거야! 먹기 싫다고!”

먹기 싫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뇌전증 환자처럼 발작을 일으켰다.

“야! 저거 왜 저래?”

상황을 지켜보던 전완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리와 김희연을 떨어뜨렸다.

“하악! 카학! 학!”

김희연은 바닥에 엎어지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쇳소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기이하게 비틀었다.

두 눈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무는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여원과 정진영은 다급히 밧줄을 가져와 김희연을 포박했다.

전완수는 카타나를 뽑아 들고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저거 왜 저래! 물린 거 아니야? 어떡해, 죽여?”

“기다려. 아직 아니야.”

좀비의 특징이라면 두 눈의 실핏줄이 터지며 붉게 충혈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김희연의 두 눈은…… 아직 사람의 것이었다.

김희연이 좀비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퀘스트가 변동되어야 정상이다.

클리어 조건에 김희연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문장이 있으니, 김희연이 좀비일 가능성은 없다.

발작증상일 수 있다.

PTSD로 인해 넋을 놓고 있던 사람이 맨정신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사람이니, 뇌 기능의 문제로 발작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뇌리를 잠식한 건가?

한동안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김희연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그제야 밧줄을 놓으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전완수는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진짜 발작이야? 저거 좀비 아니지?”

“지켜봐야지. 기절한 것 같으니 일단 옆방으로 옮기자.”

“여기 안 두고?”

“여기는…… 생존자들의 공간이니까.”

소리결 동아리방은 생존자를 위한 것.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에, 김희연은 이곳에 둘 수 없었다.

* * *

옆방에 김희연을 눕히고, 밧줄이 풀리지 않도록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때 사진동아리가 있던 동아리방.

동아리방에 암실도 있고, 매년 사진 전시회도 열고, 봉사활동도 하며 여러 방면으로 열심히 활동한 동아리였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빈방이 되었지만 말이다.

일행에게 김희연의 감시를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전완수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또 어디 가?”

“뭐라도 해야지.”

“그러니까 뭐.”

“좀비들 특성 좀 파악하려고. 춤사랑에 넣어둔 좀비 좀 확인해야겠어.”

가만히 앉아서 김희연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릴 순 없다.

뭐라도 하면서 기다려야지.

난 4층에서 실험을 진행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복도로 나섰다.

그러자 설여원이 뒤따라 나오며 얘기했다.

“조수는 있어야지.”

설여원의 말에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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