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5화
두 사람은 3층의 모든 강의실까지 정리한 뒤, 복도에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설여원의 말대로 3층에도 좀비들이 숨어 있었다.
2층에서 소란이 발생해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정진영은 가방에 넣어둔 물통을 꺼냈다.
설여원도 한숨 돌리기 위해 가방에 넣어둔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한참이나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정진영은 설여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한쪽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너, 혹시 재형이 좋아해?”
정진영의 뜬금없는 물음에 설여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요?”
“온정신이 재형이한테 가 있는 것 같아서.”
“꼭 좋아해야 사람 걱정하나요?”
“아, 나쁜 뜻은 아니었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재형이 아니었으면 우린 공대 근처도 못 왔을 거예요.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
정진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여원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는 말이라서, 본인이 얼마나 한심한 질문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정진영은 미간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재형이 걱정하는 건 좋지만…… 지금은 좀비들 처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 정신이 다른 곳에 있으면 네가 다칠 수도 있잖아.”
“…….”
진정성이 느껴지는 정진영의 말에 설여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좀비들을 따돌리겠다고 떠난 박재형의 뒷모습이 설여원의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까 봐.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탁- 타닥- 탁-
그 순간, 귓가를 간질이는 발소리가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발소리.
설여원은 창가로 걸어가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주차장을 응시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개 속으로 보이는 인영을 살폈다.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한 설여원이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여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실습실에서 장비들을 살피고 있던 전완수는 다급해 보이는 설여원을 보고 긴장한 모습으로 물었다.
“어디가. 무슨 일이야?”
“왔어.”
전완수는 들고 있던 장비를 내려놓고 옆에 놓아둔 카타나를 손에 쥐었다.
좀비들이 몰려온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
설여원은 이곳으로 다가오는 인영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사주 경계하며 다가오던 남자는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한층 가벼워진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신에 혈흔을 묻히고 돌아온 남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설여원과 전완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잘 도착했구나.”
밋밋한 첫 마디였지만, 그런 무미건조한 말조차 설여원에게 충분했다.
설여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재형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대뜸 그의 팔뚝을 때렸다.
박재형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설여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혼자 무리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니…… 미안. 다른 방법이 안 떠올랐어.”
“또 혼자 무리해 봐. 그땐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누가 너더러 영웅 노릇 하래? 그러다 죽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 거 같아?”
설여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박재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뒤이어 설여원의 투정이 들려왔다.
“걱정하게 만들지 마.”
* * *
전완수는 차량 개조를, 정진영과 설여원은 건물에 남은 좀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진영은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너도 명줄이 길긴 길다.”
“얇고 길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싱겁게 웃으며 대답하자, 정진영도 실웃음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농담할 기력은 남았나 보네.”
“많이 남진 않았어요. 조금만 쉬고, 같이 움직이죠.”
“아니야, 정리는 여원이랑 나랑 둘이 할 테니 넌 여기서 쉬어.”
배려해 주는 건 좋지만, 앉아서 구경만 하는 건 내가 못 버틴다.
계속 달린 탓에 잠시 숨을 돌리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저도 도울게요.”
“하…… 사람이 성실하면 손해 보고 사는 거야.”
“성실한 사람만 살아남는 거죠.”
“한 마디를 안 져.”
정진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전완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과 함께 건물 정리를 시작했다.
공대의 모든 건물을 정리하고, 주차장을 포함한 근방 150m 범위의 모든 좀비들을 처리했다.
대부분의 좀비들이 인문대와 음대, 기숙사, 도서관, 학생회관 쪽에 몰려 있는 모양이다.
예상보다 공대 쪽은 좀비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주변 일대의 정리를 마치고, 실습실로 돌아와 전완수에게 도울 일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완수는 독일에서 들어온 차량을 툭툭 치며 얘기했다.
“다들 이거 뜯어내요.”
“뭐를, 앞 범퍼 뜯어내라고?”
정진영이 되묻자, 전완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진영의 입에서 탄식과 함께 “저것만 뜯어서 팔아도 얼마야” 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돈이 무용지물로 변한 세상이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산기부터 두드리게 된다.
전완수는 두툼한 철판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앞 범퍼 뜯어내고 여기 있는 골조랑 철판들 부착할 거예요.”
두께만 15㎜는 족히 될 것 같은 두꺼운 철판이었다.
무게도 상당한데, 저런 걸 달면 차가 달릴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를 눈치챈 전완수가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의심하지마. 다 된다.”
“이걸 저기 붙일 수 있어?”
“중형차는 다른 거 달아야지. 이건 어디까지나 버스용. 중형차랑 승합차는 5t나 10t 정도에서 끝낼 거야.”
“15t짜리 저거는 버스용이라고? 아니, 그보다 3대나 개조하게?”
“사람만 타냐? 짐도 넣으려면 3대는 있어야지. 15t는 삼각뿔 모양으로 만들어서 버스에 부착할 거야. 길 뚫는 용도로.”
“굳이 범퍼를 뜯어야 돼?”
“저거 다 플라스틱이야. 골조부터 덧대는 게 맞아.”
“차가 무거워서 나가려나…….”
“야, 비엠 엔진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야. 실수로 신이 창조한 엔진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차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딴지를 거는 건 무의미하다.
전완수는 신나서 이것저것 들고 오더니, 바퀴의 휠을 떼어내고 앞 유리에 이것저것 철판을 갖다 대며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뭐, 생각이 있겠지.
난 실습실에 있는 차량들을 살피며 물었다.
“완수야 아까 말한 버스, 저기 있는 관광버스 말하는 거야?”
“어, 저기에 냉장고도 있거든. 기름만 충분히 넣어주면 냉장고도 생기는 거야.”
“저걸 개조할 수 있다고?”
“원래 일 잘하는 사람은 대답부터 하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완수는 저런 녀석이다.
일행 중에 가장 추진력이 좋은 녀석.
좋게 말하면 상남자, 나쁘게 말하면 막무가내.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겠는가?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그래도 매사 부정적인 사람보다, 저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이 함께하기 더 좋은 법이다.
난 완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분부만 내리라고 했다.
태양은 중천에 떠올랐고, 저녁노을이 지기 전에 동아리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가 떨어지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기에, 서둘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 * *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든 시각, 우린 실습실을 나와 학생회관으로 돌아갈 준비에 나섰다.
전완수는 실습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매점 가서 목장갑부터 찾아봐야겠는데?”
정진영은 얼얼한 손바닥을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맨손으로 철판을 옮기고, 이것저것 뜯어내려니 손바닥이 버티지 못했다.
정작 전완수도 손가락이 집혀서 피멍이 들었으니까.
난 레그홀스터에 넣어둔 헌팅 나이프를 꺼내며 물었다.
“작업 마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다. 필요 없는 부분은 전부 떼고, 좀비들 처리하기 좋은 장비만 부착해야지. 보름 정도 안 걸리겠나?”
“좀비들 처리하기 좋은 장비가 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거 본 적 없어? 좀비카.”
“그게 실제로 가능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전완수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더니, 동아리방에 도착하면 설계도부터 상세하게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정진영은 손도끼를 손에 쥐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재형아, 너 도망칠 때 좀비들 어떻게 따돌렸어?”
“도서관에 뭉쳐 있을 거예요.”
“도서관? 우리 가는 길이잖아.”
“괜찮아요. 대부분 좀비는 도서관 실내에 있어요.”
내 뒤를 뒤쫓은 좀비들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열람실에 있을 것이다.
몇 마리가 창밖으로 떨어졌지만, 대부분은 갇혀 있다.
정진영은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도서관으로 유인한 거야?”
“네.”
“그럼 넌 어떻게 나왔어?”
“창문으로 뛰어내렸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는 말에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전완수는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더니,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초인이냐? 그게 어떻게 가능해.”
“예전에 운동했잖아. 체조 종목 배울 때 낙법도 배우거든.”
“엄청 간단한 것처럼 얘기하네.”
“간단하진 않았어. 안개 때문에 원근감이 사라지더라고.”
원근감이 사라졌다는 말에 전완수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난 죽어도 못하겠다. 땅바닥이 안 보이는데 거기로 뛰어내려? 진짜 미친놈이네.”
“미친놈이라니, 다 계산하고 움직인 거야.”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해야 정상인데, 얘는 무력이 지략을 씹어먹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게 아니라,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한 거야.”
싱겁게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기초 체력을 회복한 덕도 있고, 무기의 질도 기숙사에 갇혀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그 덕에 자신감이 붙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난 가장 앞줄로 걸어가며 얘기했다.
“나랑 여원이가 앞에, 완수랑 진영이 형이 후방 봐줘요.”
대열을 갖추고, 우린 왔던 길을 되짚으며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우리가 계획한 바를 하나하나 이루며 나아가면 좋겠다.
* * *
학생회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공대로 향할 때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튀어나오는 몇몇 좀비들이 있었지만, 일찍이 위치를 파악한 설여원과 전완수 덕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슬슬 놈들의 발소리가 귀에 익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 집에서 만화책을 보며 부모님의 눈치를 볼 때, 부모님의 발소리는 기막히게 알아채는 것처럼 말이다.
좀비들 특유의 걸음걸이가 신호탄이 되어,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놈들의 위치를 알아채는 수준이 되었다.
좀비의 안구를 꿰뚫을 때는 여전히 거북한 기분이 들지만, 예전처럼 구토감이 올라오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학생회관의 뒷문에 도착할 무렵, 그 앞을 막아선 좀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진영이 손도끼를 고쳐 쥐며 놈의 두개골을 깨뜨리려 하기에, 그의 팔을 잡으며 얘기했다.
“형, 저건 생포하죠.”
“생포? 저걸?”
“좀비들의 특성을 알아야겠어요.”
정진영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뒤에 있던 설여원과 전완수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난 가방 속에 넣어둔 3m 길이의 랜선을 들고 정진영에게 얘기했다.
“형이 시선 좀 끌어줘요.”
“내, 내가? 어떻게.”
“형한테 달려들도록 만들면 돼요.”
정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치 벌레를 보듯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정진영에게 쏠리자, 결국 손도끼를 쥐고 뒷문을 막아선 좀비에게 다가갔다.
카각…… 카하악!
냄새를 맡은 좀비는 기이하게 머리를 비틀며 정진영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나가, 손에 쥐고 있던 랜선으로 놈의 목을 감았다.
동시에 있는 힘껏 지면에 내리꽂으며 발악하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하지만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쉴 새 없이 자세를 비트는 좀비.
마치 싱싱한 활어처럼 퍼덕거렸다.
물고기도 퍼덕거리면 붙잡기 힘든데, 좀비의 발악은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이 물고기는…… 사람을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