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3화
윤혜리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얘기했다.
“사과대에요. 저희 과 건물.”
사회과학대.
후문과 맞닿은 위치였다.
옥상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의구심이 들었다.
연기가 검은색이다.
“저기 사람 있는 거 같아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하자,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게 보여?”
“아니요, 연기가 검은색이잖아요.”
“그게 왜.”
“타고 있을 때 검은 연기, 전부 소각된 뒤에 흰색 연기가 피어나요. 지금…… 누군가가 고의로 불을 낸 거예요.”
“가스관이 터졌을지도 모르지.”
“폭음도 들리지 않았고, 건물 외벽에 불길도 보이지 않아요. 화재 규모도 작고.”
좀비가 불을 피우진 않았을 테고, 결국 생존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설여원은 안경을 닦은 뒤,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사과대 건물을 응시했다.
“있다.”
설여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행은 너도나도 눈살을 찌푸리며 사과대를 응시했다.
사과대 옥상에 집중하자, 난간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점처럼 보이기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윤혜리는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구조요청일까요?”
“…….”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늘에 헬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불을 피울 이유가 없다.
연기의 크기도 모닥불 정도의 규모.
그렇다면 무언가를 굽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에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과대 건물 주변에 식량 보급할 수 있는 건물 없지? 그 근처에 식당도 없잖아.”
“사과대면 후문이랑 가까우니까…… 후문 쪽 가게에서 식량 공급할 수 있지?”
후문 앞의 가게?
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후문 바로 앞에는 읍사무소 말고 아무것도 없어. 한참을 내려가야 몇 개 나오는 수준이지.”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해도, 최악의 상황만이 머릿속을 스쳤다.
난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정우를 쳐다봤다.
이정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인육의 가능성이 높아.”
“야, 상상력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인육은 선 넘었지.”
정진영이 반박하기에, 그의 말을 자르며 이정우의 의견을 거들었다.
“정우 형 말이 맞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이 긍정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바다에서 표류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성이 버티는 기간은 한 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동아리방으로 정적이 내려앉자, 눈치를 보던 전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육은 좀…….”
“식량도 없이 건물에 고립됐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야. 3일만 굶어도 동네에서 제일 먼저 밥 짓는 집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
“…….”
“천륜도 저버리는 게 굶주림이라 했어.”
단호하게 얘기하자, 더 이상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정우가 말한 대로 팀을 나누어서 움직이는 게 좋겠다.
사과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위치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동아리방을 사수할 수비병력이 필요하다.
씁쓸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A팀은 여기서 동아리방을 지켜주세요. 실습실로 이동하는 건 B팀이 맡을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정우가 이곳에 남아야 한다.
좋든 싫든 이곳의 정신적 지주는 이정우고,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니까.
이정우도 내 의견이 최선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차라리 우리가 사과대로 가는 건 어때?”
“굳이?”
설여원의 물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얘기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당할 수도 있잖아. 차라리 우리가 먼저 치는 게 좋지 않아?”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설여원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난 냉담한 표정으로 모든 일행에게 물었다.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정말 인육을 먹었다면, 우리를 사람으로 볼 것 같아? 아니면 식량이 알아서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할 것 같아.”
“…….”
“좀비를 상대하는 거랑 확연히 다른 문제야. 게다가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우린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럼 어떡해.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최선이라는 거야?”
“찝찝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발로 최악의 상황에 뛰어들 필요는 없어.”
설여원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설여원의 의견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안 된다.
일행의 표정만 봐도 혼란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막상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망설일 게 뻔하다.
그 찰나의 망설임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일행 중 한 명이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간신히 찾은 안정감도 붕괴될 것이다.
또한 괜히 나섰다가 사과대에 있는 놈들을 처리하라는 퀘스트라도 생성된다면…… 그땐 유혈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팀 내에 세심한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재형이 말대로 하자. 그게 최선인 것 같다.”
이정우의 말을 듣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B팀은 더 늦기 전에 실습실로 출발하죠. A팀은 층마다 사람이든 좀비든 올라오지 못하도록 덫 좀 만들어줘요.”
“덫? 어떤 거.”
“그건 A팀이 생각해야죠.”
“……그래.”
식량을 넣어둔 가방을 확인하며 B팀에게 이동하자고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채비에 나섰다.
팔뚝과 종아리를 1.5㎝ 두께의 책으로 보호하고, 헌팅 나이프의 상태를 확인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동아리방을 나서기 직전, 난 이정우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정우 형.”
“어.”
“형이 망설이면 안 돼요.”
이정우는 그 말을 듣고 마른침을 삼키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심에 꺼낸 말이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정우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정말 인육을 먹었다면, 당장은 거북함을 느끼더라도 추후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스스로 합리화가 가능하니까.
거북함이 자리하던 마음에 허기짐이 들어찬다면 앞으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니 사과대에 있는 놈들이 학생회관을 공격한다면, 이정우가 가장 먼저 칼을 뽑아야 한다.
그게 대표라는 자리니까.
* * *
원형 계단의 1층과 2층을 구분하는 쇠창살 앞에서 대열을 가다듬었다.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닌 전완수와 설여원을 앞뒤로 배치했다.
전완수와 내가 정면을, 정진영과 설여원이 후방을 담당하기로 했다.
“다들 테이프 제대로 감았죠?”
마지막으로 묻자, 일행은 팔뚝과 종아리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니다.”
쇠창살과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자욱한 안개가 세상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안개 밖에서 싸울 때와 안개 속에서 싸울 때는 긴장감부터 다르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오는 압박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좀비들의 습성부터 알아야겠어.’
이번 기회에 좀비에 대한 연구도 진행해야겠다.
내가 아는 라스트아크의 정보와 차이점이 있기에, 앞날을 대비해서라도 좀비에 관한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발소리를 죽인 채 머릿속으로 지형을 떠올리며 이동했다.
동아리방에서 지도를 통해 우리가 이동할 루트를 확인했기에, 그 길만 따라서 이동하면 인적이 드문 길로 이동할 수 있다.
뒷문을 나서자마자 곧장 샛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완수는 빠르게 좌우를 살피며 좀비의 유무를 파악했다.
일전에 지랄탄을 보고 밖으로 나간 좀비들은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는 정처 없이 떠도는 녀석들이기에, 바람 소리나 풀벌레 소리, 참새들의 울음소리 등에 이끌려 이동한 모양이다.
도서관 뒷문을 지날 때도 좀비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완수는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더니, 내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계속 이동해?”
“앞에 좀비들 있어?”
“아니 좀비는 없는데…… 불안해서.”
“뭐가 불안해.”
“좀비가 없어서 불안해.”
지나치게 긴장한 모양이다.
전완수에게 침착하라는 말을 남기며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심호흡을 하더니,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샛길의 좌측으로 테니스장과 배드민턴장, 족구장의 테두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씨는 푹푹 찌고, 안개 때문에 호흡도 쉽지 않았다.
고작 400m 정도 이동했을 뿐인데, 뒤따라오는 일행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크르르르르…….
테니스장의 철조망 너머에서 좀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테니스장과 샛길의 거리는 대략 30m.
후각이 여기까지 작용하는 건가?
크르르르…… 커어어…….
카학! 카하아아아…….
테니스장에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목젖을 갈자, 전완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물었다.
“저것들 냄새 맡은 거 같은데?”
“몇 마리야.”
“18마리.”
후각의 범위가 이전보다 증가한 건가?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며 전완수에게 물었다.
“저것들 이쪽 쳐다보고 있어?”
“쳐다보는 놈은 없는데 냄새 맡는 것처럼 보여. 계속 킁킁거려.”
아직 우리의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한 건 아니니,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뒤따라오는 정진영과 설여원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속도 높일게요.”
초조한 마음에 잰걸음으로 샛길을 나아갔다.
샛길의 끝에 다다르자, 세차게 철조망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어어어어!!
카하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질척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테니스장과 배드민턴장에 있던 좀비들이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다.
저렇게 소란을 일으키면 주변의 좀비들도 모여들 텐데…….
난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근처에 2층 이상의 건물 없지?”
“전부 단층이야. 공대까지 가야 5층 건물 나오지.”
“공대까지 200m 정도 남았나?”
“무슨 200m야. 400m는 되지.”
쓸데없이 학교만 넓어 가지고.
좀비들을 공대까지 끌고 가선 안 된다.
실습실에서 차량을 개조하면 소음이 발생할 게 뻔하고, 주변에 좀비가 있다면 너도나도 달려들 것이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뒤이어 좌측 대로변에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테니스장의 소란을 듣고 대로변에 있던 좀비들까지 모여드는 상황.
무슨 일이 있어도 실습실 주변은 깨끗해야 한다.
난 헌팅 나이프를 뽑아 들며 일행에게 얘기했다.
“다들 공대까지 뛰어요.”
“넌 뭐하려고.”
“미끼가 필요해요.”
“뭐?”
정진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결사반대를 표했다.
여기서 실랑이나 하며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다른 수가 없기에, 난 좌측의 철조망으로 달리며 소리쳤다.
“다 같이 죽기 싫으면 빨리 공대로 뛰어!”
철조망에 달라붙은 좀비들의 안구에 헌팅 나이프를 찔러넣고, 칼자루로 철조망을 치며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로변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테니스장으로 접근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진영이 내 곁으로 달려오려 하자, 전완수와 설여원이 그의 팔을 붙들고 공대로 뛰기 시작했다.
부디 공대에는 좀비가 없기를 바란다.
* * *
크어어어어어!!
테니스장과 배드민턴장에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철조망에 매달리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철조망이 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미끼가 될 생각이지,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다.
좀비들의 시선은 충분히 끌었으니,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고층건물이라면…….
‘도서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고, 족히 200m는 떨어진 거리였다.
아직 2층까지 안개가 들어차지 않은 시각이기에, 전력으로 달려서 곧장 2층까지 올라간다면 놈들의 탐지 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크어어어어어!!
우측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좀비들의 음성과 함께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떵! 태엥! 탱!
뒤이어 철조망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니스장에 있던 좀비들까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자욱한 안개를 뚫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신이 허기에 지배당하는 좀비들.
빠르다.
원래 저렇게 빨랐나?
카하악!!
전력으로 달리다 보니 좀비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하며 이동할 여력이 없었다.
우측에서 날아드는 좀비의 손길에 재빨리 헌팅 나이프를 휘둘렀다.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직관에 맡겨야 한다.
이래서 스탯에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이 있는 건가?
망설이거나 주춤거려선 안 된다.
찰나의 망설임이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등 뒤로 느껴지는 살기에 털끝이 곤두서고 세포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숨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한 끝에, 도서관 외벽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