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1화
평소 엉뚱한 모습만 봐왔는데, 저런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니 말문이 막혔다.
윤혜리도 나만큼이나 넋이 나갔는지, 입을 떡 하니 벌린 채 최현의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최현은 더 이상 올라오는 좀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윤혜리와 나는 귀신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4층으로 향했다.
4층에 올라서자, 얼굴에 묻은 혈흔을 닦아내는 이정우와 정진영, 전완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정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물었다.
“계단 상황은?”
“3층 초입까지 안전해요. 4층은요?”
“4층 동아리방까지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바로 내려가도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우는 가볍게 손을 털며 계단으로 향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살육이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좀비라 한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거북함을 피할 수 없었다.
놈들의 살점을 뚫을 때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은 뇌리에서 쉬이 잊히지 않았다.
이정우도 애써 태연한 척을 하지만, 창을 들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스럽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겠지.
하지만 동아리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사람이라서, 애써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이정우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릴 것이다.
이정우는 3층으로 내려가며 이미 차디찬 주검으로 변한 좀비들의 관자놀이에 다시 한번 창을 찔러넣었다.
확인사살까지 마치고, 다 같이 3층으로 진입해 복도에 남은 좀비들을 정리했다.
3층은 다른 층과 달리 복도의 길이가 짧았고, 복도 너머로 커다란 무도장이 있었다.
예봉각 동아리가 사용하던 무도장.
양옆의 통유리 너머로 헬스 기구들이 놓여 있고, 구석에는 샤워실도 있었다.
4층과 달리 시야가 탁 트인 장소기에, 좀비의 위치를 육안으로 살피기 수월했다.
크어어어어!
무도장에 숨어 있던 좀비들이 목젖을 갈며 달려들었다.
네 마리? 아니, 다섯 마리.
놈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성대를 그었다.
무도장에 있는 좀비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헬스장에 있는 좀비들이 문제였다.
유리를 세차게 두드리더니, 통유리를 부수고 이곳으로 달려들었다.
근육질의 좀비들.
근력부터 남다르다.
콰득!
“크흡!”
팔뚝을 물어뜯는 치악력과 허리를 붙잡는 악력에 전신으로 짜릿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왼팔을 방어하던 테이프와 책이 뜯겨나가고,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고 싶은데, 전신을 좌우로 흔드는 근력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
촥!
전완수가 다가와 좀비의 팔을 단칼에 베었다.
연달아 손목과 허리를 비틀어 좀비의 목을 베었다.
기침을 토하며 지면에 쓰러지자, 전완수는 내 모습을 훑으며 물었다.
“괜찮아? 물린 곳은.”
“괜찮아.”
“아까 팔 물린 거 아니야?”
“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거야.”
크어어어어!
숨돌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우측에서 또 다른 좀비가 달려들었다.
전완수는 재빠르게 발목과 허리를 비틀어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전완수도 최현과 함께 검도 도장을 다녔다고 하더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3층의 모든 좀비를 처리하고 계단 쪽을 쳐다보자, 계단을 방어하는 최현과 설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이어 정진영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다음 계획은 뭐야?”
마음 같아서는 숨 좀 돌리고 싶지만, 알람이 끝나기 전에 정리를 마쳐야 한다.
3분 간격으로 5번 울리도록 설정했으니, 다음 알람에 2층을 점령해야 한다.
“진영이 형이랑 정우 형은 5층으로 올라가서 뒷문 계단으로 이동해 주세요.”
“그 뒤에는?”
“2층 철문을 마이크 선으로 단단하게 고정해요. 그 뒤에 철문을 두드려서 복도에 있는 좀비들이 몰려들게 만들어주세요.”
“너희는 정문 계단으로 내려가고?”
“네, 2층 복도에 있는 좀비들을 최대한 뒷문으로 모아주셔야 돼요. 그래야 저희가 정문 계단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진영의 표정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비좁은 계단에 정진영과 이정우 둘이서 좀비들의 공세를 막아내야 하니까.
게다가 마이크 선이 풀리거나 끊어지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문으로 내려가야 하는 이쪽도 위험부담은 만만찮았다.
1층에서 올라오는 좀비들, 2층 복도에 남아 있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매점까지 들어가야 한다.
이를 정진영도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정진영과 이정우가 이동하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완수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린 언제 움직여.”
“형들이 준비되면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때 2층으로 간다.”
전완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현과 설여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2층에서 올라오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체력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바꿔.”
헌팅 나이프를 고쳐 쥐며 얘기하자, 최현과 설여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 자리를 전완수와 내가 대신하며, 이정우와 정진영의 신호를 기다렸다.
* * *
쾅! 쾅! 쾅! 쾅!
3분 정도 지났을까?
2층 반대편 계단에서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2층 복도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계단으로 올라오던 좀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체력을 두 배나 높인 내가 피로를 느낄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쉴 수 없었다.
“움직여.”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하자,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일행의 하체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렸다.
다들 지칠 대로 지쳤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지체하면 이정우와 정진영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기에, 다들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최현과 설여원은 한발 앞서 계단을 내려가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서며 사색이 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내 시야에도 2층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랄탄 소리를 듣고 일부는 1층으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바글거리는 좀비들이 2층 복도에 들어차 있었다.
눈어림으로 살펴도 족히 40마리 이상.
좀비들의 청각이 이렇게 나쁘다고?
어디까지 볼 수 있고,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 걸까.
계단 난간으로 걸어가 지랄탄이 터진 곳을 쳐다보자, 대략 열댓 마리의 좀비들이 뭉쳐 있었다.
설마, 1층에 있던 좀비들이 지랄탄을 발로 끈 건가?
2층에 들어찬 좀비들은 반대편에서 들리는 철문 두드리는 소리에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현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무리야. 저걸 무슨 수로 잡아? 들키기 전에 형들 데려오자.”
“안 돼. 여기서 포기하면 전부 물거품 되는 거야.”
“그럼 어쩌려고. 형들이 버티는 건 한계가 있잖아.”
생각하자.
생각해야 한다.
최선의 방안을 떠올려야 한다.
복도 반대편에 있는 이정우와 정진영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이정우와 정진영은 사선을 넘나들고 있을 것이다.
좀비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놈들의 시각, 청각, 후각의 범위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지가 떠올랐다.
좀비들의 청각이 뛰어나지 않다면…… 여기서 시끄럽게 굴어도 밖에 있는 놈들은 못 듣는 거 아닌가?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옆에 있는 일행에게 얘기했다.
“3층 가서 헬스 기구들 들고 와.”
“뭐?”
“2층으로 무턱대고 들어갈 필요 없어. 계단의 장점을 이용해야지.”
“어쩌자고.”
“굴릴 수 있는 물건은 다 가져와.”
최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여원은 솔선수범하여 3층으로 올라갔다.
뒤이어 양쪽에 10㎏ 무게추가 달린 기다란 바를 들고 계단으로 돌아왔다.
“남자들 보고만 있을 거야?”
설여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최현과 전완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3층으로 올라갔다.
난 설여원이 들고 있는 기다란 바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좀비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계단에서 무거운 기구를 굴렸을 때, 밖에 있는 좀비들이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2층에 있는 좀비들이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밖에 있는 좀비들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듣지 못할 것이다.
부디 내 판단이 옳기를 바라며, 하나씩 준비되는 기구들을 순서대로 바닥에 내려두었다.
계단의 모든 창문을 닫고 준비를 마친 뒤, 한 차례 숨을 가다듬으며 2층의 좀비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크르르르르-
2층 복도에 있던 좀비들이 이곳을 돌아본다.
크어어어어어!! 카하악!!
뒤이어 광기에 휩싸인 들짐승처럼 목젖을 갈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놈들이 계단의 절반까지 올라온 순간, 있는 힘껏 바닥에 놓인 30㎏의 바를 굴렸다.
텅! 텅- 텅!
계단을 올라오던 좀비들은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뒤로 엎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다급히 일어나 계단을 올라오는 놈들은 최현과 전완수가 망설임 없이 목을 도려냈다.
좀비들이 더 뭉치기 전에, 서둘러 헬스 기구들을 굴렸다.
터덩! 텅! 떵! 땡!
2층 계단은 좀비들과 헬스 기구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넘어졌던 놈들이 일어날 때면, 또 다른 기구를 굴리고 던지며 놈들의 접근을 저지했다.
계단을 울리는 파열음에 2층에 있던 좀비들과 1층의 좀비들이 목젖을 갈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더 가져와!”
뒤에 있는 설여원과 윤혜리에게 소리치자, 두 사람은 다급히 3층으로 올라가 눈에 보이는 모든 기구를 이곳으로 옮겼다.
묵직한 아령과 무도장에 있는 의자, 책상, 무게가 나가는 모든 것들을 들고 왔다.
쉴 새 없이 기구를 굴리면서도 창밖의 상황을 살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밖에 있는 좀비들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됐다.
계단을 올라오는 좀비들에게 쉴 새 없이 아령과 의자를 집어 던지고, 다수가 올라올 때면 기다란 책상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2층 계단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서로 엉키고 설킨 좀비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목이 꺾이고, 척추가 부러지는 과정에도 죽지 않고 목젖을 갈았다.
계단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기구들이 들어차자, 최현과 전완수는 천천히 밑으로 이동하며 바닥에 깔린 좀비들의 머리를 공격했다.
더는 굴릴 물건이 없기에, 나도 헌팅 나이프를 뽑아 들고 바닥에 엎어져 허우적거리는 좀비들의 관자놀이와 안구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신중해야 한다.
좀비들이 밑에 깔려 있다 한들, 방심하고 지나치다가 종아리를 잡히면 낭패다.
겹겹이 쌓인 좀비들을 신중하게 처리하며, 허리춤 높이까지 쌓인 쓰레기더미를 지나 2층으로 들어섰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슬쩍 살피자, 더는 이곳으로 올라오는 좀비가 없었다.
난 뒤에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현이랑 완수는 매점 확인해. 혜리는 두 사람 따라가고, 여원이는 나랑 같이 형들 돕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설여원과 함께 복도를 내달리며 양쪽의 동아리방을 확인했다.
2층에 있는 2개의 동아리방.
그곳에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방문은 잠겨 있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매점의 맞은편에 있는 휴게공간도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복도 끝의 모퉁이를 돌아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원형 계단으로 통하는 철문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 앞에서 괴성을 내지르며 철문을 긁고 두드리는 좀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문 앞으로 수십 구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정우와 정진영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얼마나 처절하게 버텼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며 철문 앞의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철문을 긁으며 밖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쓰던 좀비들은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끽해봐야 8마리 남짓.
기숙사를 탈출할 때는 3마리의 좀비도 버거웠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8마리의 좀비는 손쉬운 상대처럼 여겨졌다.
칼자루를 말아 쥐고, 쉴 새 없이 난도질을 가했다.
옆에서 설여원까지 가세하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수문 열리듯 좌우로 열렸다.
그 속에서 전신이 땀에 전 이정우와 정진영이 도끼눈을 뜨고 이곳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정진영은 손도끼를 고쳐 쥐며 좀비들의 두개골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8마리의 좀비는 우리의 협공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마지막 좀비가 쓰러지자, 오직 거친 숨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머릿속으로 울리는 경종과 격하게 뜀박질치는 심장의 고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사지, 텁텁해진 입안과 땀에 젖은 눈꺼풀.
거칠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폐.
하지만 일행의 눈빛만큼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삶을 향한 열의.
수십 마리의 좀비를 처리한 끝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이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살아남았다는 환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성취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