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0화
이정우가 향한 곳은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이었다.
학생들의 왕래가 적은 곳이기에, 1층과 2층 사이로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때 2층 매장의 옆으로 당구장이 있었고, 계산하지 않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선배들에게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층마다 계단과 복도를 구분하는 철문이 설치되어 있기에, 4층과 3층을 무시하고 곧장 2층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2층 철문 앞에 도달하자, 이정우는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다들 집중해.”
난 고개를 끄덕이며 레그홀스터에 차고 있던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모든 일행이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고, 마른침을 삼키며 이정우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정우는 철문에 감아둔 마이크 선을 풀며 조심스레 열었다.
크르르르르-
이정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살짝 열었던 철문을 닫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가장 뒷줄에 있는 내게 어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후다닥 5층까지 올라가자, 다른 일행도 서둘러 내 뒤를 따랐다.
이정우는 5층 복도에 들어서며 이마를 문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이정우에게 쏠리자, 그는 세차게 혀를 차며 얘기했다.
“못 들어가. 너무 많다.”
“몇 마리나 있어요?”
“발 디딜 틈도 없이 복도에 꽉 차 있어.”
이정우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뒤에 있던 최현이 물었다.
“형, 우리 식량 하나도 없어요?”
최현의 물음에 이정우는 정진영을 쳐다봤다.
그동안 정진영이 식량 담당이었나?
정진영은 눈썹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먹을 건 하나도 없고, 500ml 생수 8개가 전부야.”
정진영의 대답에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든 저 길을 뚫어야 한다는 건데…….
난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안개가 1층만 뒤덮은 아침 시간.
후각은 걱정할 필요 없고, 놈들의 시각과 청각만 조심하면 된다.
난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현아, 지랄탄 몇 개 남았어?”
“이제 하나밖에 없어.”
남은 지랄탄은 하나.
그 하나로 2층에 모여 있는 좀비들을 유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서 남은 배터리를 확인했다.
남은 배터리 8%.
알람 설정은 가능한 수준.
이정우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일단 3층이랑 4층부터 정리하죠.”
“거긴 왜.”
“2층에 좀비들이 많다면서요? 무턱대고 들어갈 수 없으니 활동 범위부터 넓혀야 합니다.”
“3, 4층으로 가려면 정문 계단으로 들어가야 돼. 소리가 울려서 2층에 있는 놈들이 올라오면 어쩌려고.”
“유인해야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이정우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최현에게 지랄탄을 받은 뒤, 휴대폰으로 알람을 설정하며 말을 이었다.
“안전하게 싸우기 위해선 1층에서 소란을 일으켜야 합니다. 2층에 있는 놈들이 조금이라도 내려가도록.”
“2층도 못 지나가는데 어떻게 1층에서 소란을 일으키겠다는 거야.”
“5층 계단 난간 사이로 지랄탄을 던질 거예요. 좀비들은 소리를 따라 1층까지 내려가겠죠. 그리고 제 휴대폰은 알람 설정해서 밖에 화단으로 던지는 겁니다.”
“밖으로?”
“지랄탄만 터뜨리면 건물 주변에 있는 좀비들이 내부로 들어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밖으로 알람을 던져서 (구)학생회관 앞의 좀비들은 알람을 쫓아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들 얼추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정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거기까진 알겠는데, 결국 2층을 정리하다 보면 1층에 있는 좀비들이 다시 올라오지 않을까? 계단에서 싸우면 소리가 울리는데, 1층에 있는 놈들이 모르겠어?”
“2층은 정문과 후문 계단에서 동시에 공격해야 돼요. 좀비들의 시선을 좌우로 나뉘도록.”
“정문은 그렇다 쳐도, 원형 계단 쪽은 너도 들어서 알잖아.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데 어떻게 공격하려고?”
“문고리에 마이크 선을 감아두면 2층 복도에 있는 좀비들도 쉽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좀비들이 철문을 밀치면 마이크 선 때문에 살짝만 열리겠죠.”
“살짝 열린 빈틈으로 공격하라는 거야?”
정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소 위험부담이 있지만,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좀비들의 시신이 철문 앞에 쌓이면 놈들도 쉽게 철문을 부수고 나오지 못할 거예요. 좀비들의 머릿수부터 줄여야 합니다.”
“만약 줄이 끊어지면 어쩌려고. 마이크 선이 그렇게 단단해?”
“웬만해선 안 끊어져요. 화재 건물에서 마이크 선을 잡고 탈출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정우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내가 고안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좋아. 재형이 말대로 4층이랑 3층부터 정리한다. 반대하는 사람 없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우는 일행의 무기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4층으로 가려면 정문 계단으로 내려가야 돼. 나랑 진영이, 완수가 4층 복도로 들어갈 테니까 나머지는 계단 쪽 봐줘.”
* * *
바리케이드 하단부 상자를 치우고,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갔다.
난 휴대폰 알람을 3분 뒤로 설정한 뒤, 창가로 걸어갔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휴대폰이 고장 나면 낭패기에, 학생회관 앞의 화단으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소리를 가장 크게 설정했으니, 웬만해선 건물에서 일어나는 소음을 듣지 못할 것이다.
화단으로 휴대폰을 던진 뒤,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알람이 울리면 바로 움직입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3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침묵이 내려앉고, 모두가 청각을 곤두세운 채 휴대폰 알람을 기다렸다.
띵- 띵- 띵- 굿모닝- 빠빠빠빠!
크어어어어어!!
오래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좀비들의 발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지랄탄에 불을 붙인 뒤, 계단 난간 사이의 틈으로 던졌다.
따다다다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랄탄이 1층까지 떨어지자, 각층에 있던 좀비들이 1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건 예상대로.
이정우는 계단을 내려가는 좀비들을 보고 이동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재빠르게 5층과 4층 사이의 연결부로 향했다.
저 멀리, 4층 복도를 거니는 존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절며 정처 없이 거니는 좀비들.
인간에겐 알람 소리와 지랄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4층 복도 중심부에 있는 좀비들은 소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아직 좀비들의 감각은 진화하지 않았다.
어림잡아 일곱.
이정우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슬쩍 살핀 뒤,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눈을 가리키더니, 밑을 가리키며 손가락 3개를 펼쳤다.
밑에 3마리 있다는 뜻인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레그홀스터에 차고 있던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4층 복도에 들어서면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좀비들이 달려들 것이다.
이정우는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힘껏 숨을 들이켜며 4층 복도로 향했다.
4층에 있던 좀비들은 이정우의 발소리를 듣고 일제히 뒤를 돌아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젖을 갈았다.
내 역할은 3층에서 올라오는 좀비들의 저지.
3층 계단에 있던 좀비들도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카하아악!!
칼자루를 꽉 쥐고, 코앞으로 다가온 좀비의 목젖을 향해 헌팅 나이프를 휘둘렀다.
서걱-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목선.
성대를 말끔하게 썰어버리는 헌팅 나이프의 예리함.
우측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좀비의 모습에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려는 찰나.
푹!
최현의 카타나가 좀비의 안구를 꿰뚫었다.
최현은 좀비의 안구를 꿰뚫자마자 왼발로 놈의 상체를 밀쳤다.
뒤따라 올라오던 좀비는 안구가 꿰뚫린 놈에게 밀려 뒤로 엎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난 두 눈을 부릅뜨며 헌팅 나이프를 반대로 고쳐 쥐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밑에 깔린 좀비의 안구에 헌팅 나이프를 박아넣었다.
순식간에 세 마리를 처리하고,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살폈다.
눈어림으로 살펴도 3층 복도에만 10마리 이상의 좀비가 있다.
카각! 카하악!!
3층에 있던 좀비들이 내 모습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일곱 마리.
3층과 4층 사이로 좀비들이 몰려든다.
최현과 설여원은 다급히 내 곁으로 다가와 대형을 갖추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과 전신으로 퍼지는 긴장감에 집중하며 일사불란하게 좀비들을 처리했다.
크어어어어어!!
안구를 꿰뚫는 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다수를 상대하기엔 동작이 비효율적이었다.
목을 노려야 한다.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왼손은 가드를 올리듯이 들고, 오른손으로 쉴 새 없이 헌팅 나이프를 휘둘렀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면, 목이 끊긴 좀비는 20초에서 30초간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쓰러진 놈들에게 발목을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위치상 고지대를 선점한 우리가 유리하기에, 동작은 간결해지고 체력적인 소모도 적었다.
본능에 잠식된 좀비들은 얼굴을 치켜들고 달려들기에, 덕분에 목을 베기도 쉬웠다.
문제는 최현.
양옆에 설여원과 내가 있기에, 기다란 카타나를 사용하는 최현은 행동에 제약이 많았다.
마음껏 휘두를 수 없으니 찌르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젠장-!”
그 순간, 옆에서 최현의 신음이 들려왔다.
곁눈질로 최현의 모습을 살피자, 그의 카타나가 좀비의 두개골에 박혀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최현은 카타나를 뽑아내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며 좀비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텁.
그와 동시에 쓰러지던 좀비가 최현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 앞에 있는 좀비도 처리하기 버거운데, 최현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잡아!”
불특정 다수에게 외치는 찰나, 최현의 상체를 잡아끄는 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윤혜리가 달려와 최현의 상체를 뒤로 잡아끌고 있었다.
최현이 윤혜리와 함께 뒤로 엎어지자, 방어선에 빈틈이 생겼다.
최현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우측으로 한걸음 움직이자, 우측에 있던 설여원도 덩달아 좌측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최현의 모습을 설여원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하악!
좌측 벽에 기대어 올라온 좀비가 도끼눈을 뜨며 내게 달려들었다.
재빨리 왼팔로 놈의 하관을 밀어붙이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헌팅 나이프로 안구를 찔렀다.
왼팔을 물어뜯은 놈은 걸쭉한 피를 토하며 지면에 엎어졌다.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팔을 감싸고 있던 테이프의 일부가 찢어지며 2㎝ 두께의 책이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팔을 방패로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
4층은 아직도 정리가 덜 된 건가?
두 눈을 홉뜨며 4층을 살피자, 시기 좋게 달려오는 전완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세차게 흔들며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설여원도 이를 발견했는지, 한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 5마리의 좀비가 남은 상황.
더 몰려들기 전에 이동해야 된다.
“다 올라가.”
뒤에서 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카타나를 양손으로 쥐며 분기에 찬 모습을 보였다.
조금 전까지 죽다 살았으면서,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라 화가 난 것으로 보였다.
카타나의 특성상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마음껏 휘두를 수 없으니, 방해하지 말고 올라가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혼자 두고 어떻게 도망쳐.
난 몇 걸음 물러서며 최현의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껏 찌르기만 반복하던 최현은, 마치 검도를 하듯이 카타나를 고쳐 쥐며 쏜살같이 좀비들에게 접근했다.
절도 있는 동작.
빠르고 정확한 공격.
예전에 검도 유망주였다고 하더니,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카하악!
하지만 인간을 상대하는 것과 좀비를 상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
다리가 잘려나간 좀비가 지면에 엎어지는가 싶더니, 최현의 발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급히 최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푹!
최현의 손에 쥐어진 카타나가 허공에서 수려한 호선을 그리더니, 좀비의 관자놀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직격했다.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건가?
관자놀이가 꿰뚫린 좀비는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최현은 칼날을 비틀어 뽑음과 동시에 코앞의 좀비를 사선으로 그어버렸다.
마치 대나무가 잘려나가듯, 깔끔하게 좀비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연이어 팔꿈치와 손목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하체가 떨어져 나간 좀비의 목을 날려버렸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순식간에 좀비 다섯 마리를 처리하고, 최현은 폐부에 들어찬 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