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9화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굶주린 배부터 채우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탈출한 과정과 설여원과 내가 만나게 된 이야기까지 들려주자, 이정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학생회관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었을 텐데, 고맙다 재형아. 여원이도.”
이정우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더니, 일행의 표정을 훑으며 물었다.
“그럼…… 다들 현 상황은 인지하고 있는 거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정우의 옆에 있던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재형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안 그래도 무기 구한 뒤에 너 찾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네가 먼저 찾아왔네.”
“저요?”
“네가 게임을 제일 잘 아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많이 가봐야 세 번째 에피소드 초반이 끝이거든. 재형이 넌 어디까지 갔어?”
정진영의 물음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그래, 한 번씩은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고, 앞으로 함께해야 하는 동료들이다.
숨겨봐야 좋을 게 없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엔딩 봤어요.”
그 말에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진영은 말까지 더듬으며 내게 물었다.
“끄, 끝까지 다 깼다고?”
“네.”
“에피소드가 총 몇 개나 되는데?”
“제가 아는 건 다섯 개가 끝이지만, 이번엔 아닐 수도 있어요.”
“왜?”
“난이도가 다르니까요. 두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설정이 벌써 진행되고 있어요. 큰 틀은 변하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설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럼 에피소드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는 거네?”
“늘어났을 가능성도 있죠.”
정진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쳐다봤다.
그 속에서 손도끼를 꺼내더니,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무기 구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필요한 물품 확보하면서 에피소드 진행할 수 있을까?”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하죠. 아직 첫 번째 에피소드도 클리어하지 못했으니까.”
“두 번째 에피소드의 설정이 뭐였지?”
아차, 대장 좀비와 공명 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장 좀비와 공명 좀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자,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정진영은 이마를 문지르며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허탈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 좀비가 있다면…… 곧 변종도 나올 수 있다는 건가?”
변종이란 말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정우는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재형이 말대로 하나씩 해결하자고.”
뒤이어 피곤한 안색으로 내게 물었다.
“재형이 넌 직업이 뭐야.”
“에덤이요.”
“에덤? 에덤 화이트?”
“네.”
“에덤으로 클리어했다고?”
에덤이란 말에 모든 일행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덤은 첫 번째 에피소드만 클리어하면 수월해요. 첫 번째 에피소드 클리어할 때 100번도 넘게 죽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하자, 구석에 앉아 있던 최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지금은 한 번만 죽어도 끝이잖아?”
“그렇지. 우리한텐 현실이니까.”
최현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생존율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건가?
동아리방으로 침묵이 내려앉자, 카타나에 묻은 혈흔을 닦고 있던 전완수가 내게 물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다음이 뭐였지?”
“방랑자.”
“방랑자 클리어 조건이 뭔데.”
“쉘터를 찾아서 들어가야 돼.”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죽어서 쉘터가 없으면? 게임 설정대로면 안개에 면역을 지닌 사람은 20%도 안 돼. 그중에서도 좀비한테 물려서 죽은 사람이 태반일걸?”
“그건…… 나도 모르지. 애초에 깰 수 없도록 만든 게임인지도 모르고.”
너무 덤덤하게 얘기했나?
다들 암담한 표정을 지으며 함묵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일행의 표정을 훑더니,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한 차례 손뼉을 치며 얘기했다.
“자자! 뭐가 됐든, 여기 있는 사람들은 혜리 빼고 경험자 아니에요? 기운 내요. 누가 보면 벌써 끝난 줄 알겠어요.”
“여원이 너도 라스트아크 플레이어라고 했지?”
이정우의 물음에 설여원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브리엘이요.”
설여원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정진영은 오,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좀비 게임을 즐기는 여자는 많지 않으니까.
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게임의 큰 줄기를 떠올렸다.
많은 동료가 생긴 건 좋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다.
메인 캐릭터 하나가 없다.
“문제는 로즈가 없다는 거예요. 결국 게임의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로즈가 꼭 있어야 하거든요.”
로즈.
모든 장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캐릭터.
장비의 이해도라는 능력은 생존과 관련이 없기에, 에덤만큼이나 플레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덤처럼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 아니라, 게임 진행에 유리한 캐릭터니까.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는 장비 제작과 관련된 요소가 많았다.
이를 손쉽게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로즈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안전가옥의 경우도, 좀비카를 제작하여 안전가옥을 탈출하면서 종료된다.
차량 개조를 누가 하겠는가?
또한 마지막 에피소드 ‘라스트 아크’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로즈가 필수였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NPC로 설정된 주인공들이 알아서 도와주지만, 현실은 다르다.
어떻게든 로즈의 능력을 전수받은 사람을 찾아야 유리해진다.
다들 마땅한 방안이 없기에, 암담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봤다.
이정우는 일행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걱정은 나중에 하고, 지금 해결해야 하는 게 뭐지?”
“식량이죠.”
“그럼 매점부터 가자. 가서 뭐라도…….”
“안 그래도 매점 때문에 할 얘기 있어요.”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전완수와 최현, 설여원까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더러 얘기하라는 건가?
착잡한 마음에 이정우의 시선을 회피하며 얘기했다.
“지금 이 건물은…… 안전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뒷문으로 올라와서 형은 못 봤겠지만, 정문부터 2층까지 좀비들이 득실거려요.”
정진영과 이정우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설명을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전완수와 최현이 (신)학생회관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한 문제를 얘기해 주었다.
정진영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반면에 이정우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더니, 폐부에 들어찬 탁한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니까, 뒷문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좀비들이 있다는 거야?”
“네.”
이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할 일이 생겼네.”
“네?”
“내일 해 뜨면 2층부터 확보하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 위해 싸워야 하고, 살기 위해 죽음이 도사리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암담한 상황에 다들 지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
난 일행이 동요하지 않도록 애써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무기도 생겼으니 괜찮을 거야.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다들 힘내자.”
* * *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아침.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간만에 단잠을 청한 기분.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가?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간이침대마저 기숙사 침대보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껴졌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파와 의자, 다른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일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벽걸이 시계를 쳐다보자, 시침이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들 지친 몸을 이끌고 잠들었으니, 일어날 때까지 두는 게 좋겠다.
한 차례 기지개를 켜며 창가로 걸어가 바깥 상황을 살폈다.
여전히 자욱한 안개가 세상을 잠식한 풍경.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면이 보이던 세상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일어났어?”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너머로 슬쩍 돌아보자, 설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몽사몽 간에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머리가 가려운지,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두피 다 벗겨지겠다.”
“아…… 씻고 싶다.”
설여원의 꾀죄죄한 몰골을 보고 있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내 몸에서도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이 건물에 샤워실 있지 않았나?’
(신)학생회관의 3층에 헬스장이 있다.
그 옆으로 샤워실도 있으니, 매점을 확보하는 길에 헬스장도 정리해야 한다.
설여원의 목소리에 다른 일행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윤혜리는 일어나자마자 물부터 찾았고, 최현과 전완수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하품만 반복했다.
이정우와 정진영은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눈을 뜨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정진영은 남은 식량부터 확인하고, 이정우는 무기 손질을 시작했다.
난 형들의 곁으로 걸어가 물었다.
“언제 시작해요?”
이정우는 일행의 모습을 가볍게 훑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준비하고 바로 출발하자.”
이정우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사람이지만, 일 처리 하나는 굉장히 꼼꼼한 사람이었다.
판단력도 좋고, 상황 대처능력도 좋았다.
식량을 확인하던 정진영은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남은 음식이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매점 확보해야 돼.”
정진영은 세상 다시 없을 최고의 조력자였다.
이정우와 정진영의 조합은 찰떡같았다.
이정우가 뼈대를 만들면 정진영이 살을 붙이기에, 예전부터 둘의 시너지는 효과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최현은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지만 일 처리는 확실한 편이었고, 전완수는 불같은 성격을 지녔지만 그만큼 의리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1년 6개월간 봐온 사람들이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도 두터웠다.
난 외출 준비에 나서며 설여원을 쳐다봤다.
설여원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중간다리 역할인 내가 잘해야 한다.
난 설여원의 곁으로 다가가 같이 몸을 풀며 물었다.
“몸은 어때?”
“찌뿌드드하지.”
“몸살이야? 열은.”
“근육통이지 뭐. 너는 괜찮아?”
“나도 근육통.”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내자, 설여원은 싱겁게 웃으며 내 등짝을 때렸다.
뒤이어 설여원의 주변에서 쭈뼛거리는 윤혜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설여원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여원도 이를 느꼈는지, 윤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할 말 있니?”
“저…… 어제 감사해요.”
“뭐가.”
“라면이랑 통조림…… 같이 먹자고 해주셔서요.”
설여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윤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들끼리 대화하게 두고, 난 구석으로 걸어가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했다.
시야의 우측 상단에 있는 느낌표 모양을 클릭하자,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스탯: 근력 5(+2), 체력 5(+5), 반사 신경 5, 동체 시력 5, 정신력 10
-남은 포인트: 0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18/100
※100마리를 달성할 시 스킬이 개방됩니다.
라스트아크는 다른 게임처럼 HP나 MP, 지능, 민첩 같은 수치가 없었다.
좀비로부터의 생존이 주된 게임이다 보니, 신체 능력과 관련된 스탯뿐이었다.
근력은 말 그대로 힘, 체력은 HP가 아닌 기초체력을 뜻한다.
게임에서는 정신력이 높아야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떨어지지만, 현실에서 굳이 필요할까?
내가 미치지만 않으면 되는데.
저수지에서 상당히 많은 좀비를 처리한 줄 알았는데, 고작 18마리밖에 처리하지 못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좀비와 불에 타 죽은 좀비는 카운트로 인정되지 않는 건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정우는 일행의 상태를 눈어림으로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다들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그 말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리는 자연스레 짐꾼 역할이 되었다.
이정우는 일행의 무기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진영이랑 재형이가 후방, 나랑 완수가 정면, 여원이랑 현이가 좌우를 맡아. 중앙에 혜리를 싸고 움직인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다들 결의를 다졌다.
이정우는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