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8화
“빨리와!”
전완수를 따라 다리의 중앙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자세를 잡고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뒤를 돌아보자, 수십 마리의 좀비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다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수십 마리의 좀비가 비좁은 다리로 몰려들다 보니, 밀려난 좀비들은 저수지에 빠지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리로 진입하는 좀비보다 저수지에 빠지는 좀비들이 몇 배는 많은 상황.
예상했던 결과에 흡족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곳으로 달려오는 좀비들을 보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직 안 끝났어.’
두 눈 부릅뜨며 코앞으로 접근한 좀비의 안구에 헌팅 나이프를 찔러넣었다.
뒤따라오는 좀비들을 저지하기 위해 안구에 박힌 헌팅 나이프를 뽑으며 쓰러지는 좀비의 복부에 발길질을 가했다.
안구가 꿰뚫린 좀비는 두 마리의 좀비를 다리 밖으로 밀치며 쓰러졌다.
크어어어어!
하지만 비좁은 틈을 파고든 좀비 하나가 목젖을 갈며 내 안면을 향해 팔을 뻗었다.
푹!
전완수는 좀비의 가슴을 카타나로 꿰뚫은 뒤, 까드득 이를 갈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뒤에 있는 녀석들까지 순식간에 카타나에 관통당하며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전완수는 두 팔을 파르르 떨더니,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외쳤다.
“빨리 처리해!”
카타나에 꿰뚫린 좀비들은 비좁은 다리를 막아서는 역할이 되었다.
전완수가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난 칼자루를 말아 쥐며 옆으로 새는 놈들을 쉴 새 없이 처리했다.
끼익- 끼이익-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로 인해 습기를 먹은 나무는 좀비들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리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물속의 좀비들은 죽었으려나?
불안한 마음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잡념이 스쳤다.
그럴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코앞의 좀비들에게 집중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살아남는 게 급선무니까.
정신없이 좀비들의 안구와 성대, 관자놀이를 사선으로 그으며 남은 좀비들의 숫자를 살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좀비들.
그어어어어…… 어어어어…….
그 순간, 다리의 초입에서 공명 좀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우리에게 접근하던 좀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좀비들이 무슨 행동을 취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난 얼굴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닦으며 전완수에게 물었다.
“저것들 뭐하는 거야. 왜 멈춘 거야?”
“재형아.”
전완수는 퍼석한 입술을 핥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공명 좀비가 인식한 거 같다.”
“뭐를.”
“여기가 저수지라는 거.”
태반의 좀비가 사망한 끝에, 공명 좀비가 지형을 파악한 모양이다.
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건가?
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몇 마리나 남았어.”
전완수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좀비들의 숫자를 살피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42마리.”
둘이서 처리하기엔 버거운 숫자.
좀비들이 선공을 취하지 않으니, 반대로 우리가 갇힌 꼴이 되었다.
난 뒤편을 살피며 물었다.
“반대편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지?”
“산이야.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든 뚫어야 돼.”
전완수의 설명을 듣고 가방 속에 넣어둔 휘발유를 꺼냈다.
다리에 휘발유를 뿌리며 뒷걸음질 치자, 전완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다른 방법 있어?”
“뒤는 산이라니까? 산에서 조난당하고 싶어?”
“좀비들부터 따돌리는 게 우선이야.”
“…….”
전완수는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세차게 혀를 차며 덩달아 가방을 열었다.
전완수와 함께 휘발유를 뿌리며 뒷걸음질 치자,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좀비들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젖을 갈며 망설이는 좀비들.
좀비들을 수하로 부리는 건 대장 좀비에게만 주어진 능력.
대장 좀비가 군의 장교라면, 공명 좀비는 통신병일 뿐.
대장 좀비는 전술을 짜는 게 가능하지만, 공명 좀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명 좀비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은 먹잇감이 저기 있다, 멈춰라, 공격해라, 모여라, 등의 일차원적인 지시가 한계.
크어어어어어!!
참다못한 좀비들이 일제히 목젖을 갈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라이터!”
전완수를 향해 외치자,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라이터를 다리 위로 던졌다.
화르륵-!
다리 위로 불길이 치솟자, 달려들던 좀비들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자연대에서 설여원이 나를 구해주며 사용한 방법이 통한다.
좀비들은 불을 보면 망설이는 모습을…….
그어어어어-
하지만 공명 좀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망설이던 좀비들은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며 불길을 뚫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신에 불이 옮겨붙든 말든, 사냥감을 향한 집념만이 남은 좀비들.
다수의 좀비가 일제히 다리로 진입하자, 도중에 저수지로 떨어지는 좀비들도 보이고,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는 좀비도 보였다.
“내가 막고, 네가 공격.”
전완수는 양손으로 카타나를 쥐며 한발 앞서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이전처럼 좀비들을 꿰뚫으며 온 힘을 다해 버티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질세라 나도 쉴 새 없이 헌팅 나이프를 휘둘렀다.
불이 붙은 와중에도 이빨을 들이밀고 양팔을 휘젓는 좀비들.
발악하는 좀비들로 인해 전완근에 감아둔 테이프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공책이 헐렁거린다.
불길은 좀비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효과가 있지만, 우리에게도 타격이 있었다.
전완수의 옷에 불이 옮겨붙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였다.
빈틈이 생기자, 좀비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온 좀비에게 발길질을 가하고, 눈코 뜰 새 없이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 악물고 좀비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찰나.
카학!
성대가 제대로 잘려나가지 않은 좀비가 내 옆구리를 붙잡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전완수는 두 눈 휘둥그레 뜨며 어깻죽지로 좀비를 밀쳤다.
좀비는 쓰러졌지만, 내 옆구리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살점이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신음을 토하는 와중에도 좀비들의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버티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시야가 아찔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얼얼한 통증에 신음을 토하며 쓰러지자, 전완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리를 막아섰다.
쉴 새 없이 카타나를 휘두르며 좀비들을 도륙 내지만, 좀비들의 공세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습기를 먹은 나무다리라서 그런지,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윽!”
전완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는지, 좀비들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모습.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헌팅 나이프를 고쳐 쥐며 전완수를 도왔다.
하지만 전황은 기울었고, 다리를 건너온 좀비들이 많아질수록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밀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엄습하자, 지난날을 복기하게 되었다.
둘이서 미끼가 되는 게 무리였나?
아니면 경영학과의 좀비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건가?
내 주제도 모르면서, 형들을 구하겠다고 오만하게 나온 게 문제였나?
절망스러운 상황에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직 안 끝났어.’
하지만 여기서 삶을 포기할 수 없다.
까드득 이를 갈며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현실을 떨쳐내고, 발악에 가까운 몸짓으로 저항했다.
“재형아!!”
그 순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완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설여원?’
뒤이어 좀비들의 압박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오던 좀비들이 반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코앞의 좀비를 처리한 뒤, 재빨리 전완수의 곁으로 달려갔다.
전완수를 바닥에 쓰러진 채 두 마리의 좀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황급히 좀비들을 처리하고 전완수의 전신을 살폈다.
전완수는 발목을 붙잡은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린 건가?
다급히 그의 발목을 살폈지만, 좀비에게 물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발목 왜!”
놀란 마음에 외치자, 전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제대로, 제대로 접질렸어.”
뒷걸음치는 와중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다.
카하아악!
방심한 순간, 등 뒤로 좀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상체를 비틀어 헌팅 나이프를 내질렀다.
하지만 내 칼끝이 닿기 전에, 좀비의 목젖을 뚫고 나오는 헌팅 나이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좀비는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떨더니, 비바람에 쓰러지는 갈대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그 너머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설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여원의 뒤로 최현의 얼굴이 보이고, 그 뒤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정우와 정진영.
“재형아, 완수야!”
형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리 곁으로 달려왔다.
뒤이어 전완수와 내 몸에 양손을 갖다 대고 레이첼의 능력을 사용했다.
형들의 손끝으로 은은한 빛이 맴돌자, 타들어 가는 통증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대(大)자로 뻗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칠흑 같던 현실에, 설여원의 등장은 하나의 등불과도 같았다.
* * *
전완수와 내가 건물 주변의 좀비들을 전부 데려온 덕에 설여원과 최현은 안전하게 건물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층을 확인해도 이정우와 정진영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려는 찰나, 옥상에서 인기척을 느꼈다고 한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소리.
좀비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옥상에 갇혀 있던 이정우와 정진영이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계단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 최현과 이정우, 정진영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한다.
본래 계획은 설여원과 최현이 형들을 구출한 뒤에 곧장 (신)학생회관으로 이동하는 것이었지만, 설여원이 결사반대를 했다고 한다.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이럴 줄 알았어. 또 무리할 것 같더라.”
말은 퉁명스럽게 하지만, 눈빛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에 덩달아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무슨 생각으로 다리에 불을 지른 거야? 뒷일은 생각 안 해?”
“뒷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좀비들부터 따돌리고 산자락을 따라서 이동하려고 했지.”
“해 떨어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본인이 그랬으면서 무슨 산을 타겠다고…….”
한참이나 설여원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자 구석에 앉아 있던 전완수가 귀를 파며 입을 열었다.
“설여원, 우리랑 동갑 아니냐?”
“……어, 왜.”
“왜 엄마 같냐.”
“죽을래?”
설여원이 주먹을 말아쥐며 때리는 시늉을 하자, 전완수는 낄낄거리며 정진영의 뒤에 숨었다.
이정우는 설여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이며 얘기했다.
“고맙습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저 재형이랑 동갑이에요.”
이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내 얼굴을 쳐다보며 설여원과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이에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가서 얘기하죠.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야죠.”
동아리방에 혼자 남은 윤혜리가 걱정이다.
* * *
왔던 길을 되짚으며 신중하게 이동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마다 밧줄을 연결해 두었기에, 돌아가는 길은 한층 수월했다.
대운동장의 좀비들을 피해 (신)학생회관의 뒷문으로 진입했다.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발소리를 죽이라고 한 뒤 한발 앞서 5층으로 향했다.
크르르르르…….
각 층과 계단의 경계를 이루는 철문 너머에서 좀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2층, 3층, 심지어 4층까지.
2층에만 좀비들이 가득한 줄 알았는데, 일부가 4층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제발 5층까지 올라온 좀비는 없기를.
5층 복도로 진입하자마자 좀비들의 유무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윤혜리는 어디 있는 거지?
동아리방에 있는 건가?
초조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바리케이드 앞에 주저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윤혜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윤혜리를 어깨를 흔들자, 그녀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붉게 충혈된 좀비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이었다.
뒤따라온 일행도 윤혜리의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혜리도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의 자초지종만 설명해도 오늘 밤은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