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7화
원형 계단은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어젯밤 몰려들었던 좀비들이 밖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전완수에게 창밖을 살피라고 지시했다.
전완수는 2층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뒷문을 조심스레 열고 밖으로 나가자, 자욱한 안개 속으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완수와 내가 앞장서고, 최현과 설여원이 후방을 담당했다.
벽면에 기대어 곧장 우측으로 이동하자, 주차장에 있는 7대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뒤에 있던 설여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설여원은 가방에서 커다란 통과 호스를 꺼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설여원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드라이버를 꺼내어 차량의 주유구를 뜯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호스를 입에 물고 차량에 있는 휘발유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플라워디자인과 건물 앞에서 봤던 불길이 떠오른다.
기름을 어디서 구했나 했더니, 저렇게 뽑아낸 건가?
설여원은 여분의 호스를 꺼내며 일행에게 얘기했다.
“혹시 모르니 너희도 뽑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언제든 환영이다.
나도 호스를 물고 설여원의 분부에 따라 차량의 휘발유를 뽑아냈다.
몇 번의 실수로 휘발유가 입에 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차츰 적응되기 시작했다.
4대의 차량에서 대략 5L의 기름을 뽑아냈다.
최현은 입가에 묻은 휘발유를 닦으며 얘기했다.
“전부 들고 가는 건 어려울 거 같은데?”
기동력이 곧 생명과 연결되는 상황.
5L의 휘발유를 들고 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2L의 휘발유는 동아리방으로 옮기고, 남자들이 각 1L씩 들고 이동하기로 했다.
주차장의 우측으로 소나무들이 자리 잡은 둔덕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들을 가로질러 15m가량 들어가자, 높이 6m에 달하는 절벽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깨에 메고 있던 20m 길이의 밧줄을 풀어 나무에 묶고, 한 사람씩 조심스레 절벽을 내려갔다.
가장 먼저 절벽을 내려간 전완수는 좀비의 유무를 확인하고 이동 경로를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최현까지 내려오자, 전완수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대운동장 입구에 좀비 아홉 마리. 대략 30m는 떨어져 있어.”
이에 나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공명 좀비는.”
“눈으로만 보고 어떻게 알아? 자극을 줘야 알지.”
“대운동장 안쪽은 확인 못 했어?”
“좀비들이 입구부터 있다는 건 안쪽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거 아니야?”
시작부터 틀어지면 안 된다.
어떻게든 운동장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된다.
“운동장 근처에 다른 길은 없어?”
“대운동장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여기 외벽 따라서 이동해도 돼.”
“……여기?”
끝도 없이 펼쳐진 비포장도로.
게다가 사람이 지나다니기엔 지나치게 좁은 길폭.
좌측은 절벽이 위치하고, 우측은 3m 높이의 대운동장 외벽이 위치한다.
곳곳에 지뢰처럼 깔린 낙엽과 나뭇가지도 조심해야 한다.
말문이 막혀서 이마를 긁적이자, 전완수는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사람이 이용하는 길은 아니지만 가장 안전한 건 사실이고.”
대운동장은 높이 3m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 너머는 계단식 관중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좀비들이 위에서 추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서로 마주할 일이 없다.
다른 수가 없기에, 전완수의 말대로 외벽을 따라 크게 돌아가기로 했다.
앞서가는 전완수는 지면에 즐비한 낙엽을 발로 밀치며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뒤따르는 나도 낙엽과 나뭇가지를 발로 밀치며 계속해서 외벽을 살폈다.
혹시라도 소리를 듣고 이곳을 바라보는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외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가뜩이나 좁은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언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운동장의 모서리 부근에 도달해서 우측으로 돌자, 완전히 길이 막히고 5m 높이의 가파른 경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전완수는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뒤를 돌아보며 되돌아가자고 손짓했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이 길이 아니면 안전한 경로가 없다.
“비켜.”
“어쩌려고, 저 절벽이라도 오르게?”
“어.”
전완수는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붕어처럼 입술을 벙긋거렸다.
난 가방 속에서 정과 밧줄을 꺼내어 5m 높이의 경사를 바라봤다.
눅눅한 운무 때문에 지반이 약해진 상태기에, 지반이 무게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완수도 불안하지, 내 곁에 바싹 붙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겠어? 너 클라이밍 해본 적 없잖아.”
“경사가 가파른 건 맞지만, 90도는 아니잖아.”
“그래도 떨어지면 위험할 거 같은데.”
“내가 체육학원 다닐 때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뭔지 알아?”
“……뭔데.”
“안 되면 될 때까지.”
싱겁게 웃으며 허리춤 높이에 정을 박아넣고, 어깨에 밧줄을 걸친 채 오른발을 올렸다.
길이 30㎝의 정을 25㎝ 정도 쑤셔 넣어서 그런지, 지반이 흘러내리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연달아 50㎝ 간격으로 정을 쑤셔 넣으며 발판을 만들고, 조심스레 절벽을 기어올랐다.
후두둑-
대략 4m 정도 올랐을까?
지반이 버티지 못하고 흙무더기와 함께 왼발을 받치던 정이 떨어졌다.
밑에 있던 전완수는 재빨리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깔았다.
덕분에 정이 떨어지며 발생하는 파찰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왼발이 지지대를 잃으며 모든 무게가 오른발에 실리자, 오른발을 지지하던 정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위로 갈수록 지반이 무른 모습을 보였다.
까드득 이를 갈며 재빨리 좌측에 정을 쑤셔 넣고, 왼발을 그곳에 걸쳤다.
더는 발판을 만들며 안전하게 오를 시간이 없다.
‘힘 빠지기 전에 올라가야 돼.’
양손에 정을 하나씩 쥐고, 전신의 무게를 두 팔로 버티며 위로 올라갔다.
이 악물고 남은 1m 높이를 숨도 쉬지 않고 올랐다.
후둑-
왼손에 쥐고 있는 정이 미끄러지는 찰나, 오른손으로 절벽의 끝을 짚을 수 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절벽 위에 상체를 반쯤 걸치고, 지렁이처럼 기어서 완등했다.
절벽을 오르자마자 바닥에 대(大)자로 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힘을 쓴 탓에 근육이 놀란 것 같다.
두 팔로 느껴지는 잔잔한 떨림과 심장의 고동에 집중했다.
마지막 순간에 느낀 아찔함에 전신으로 전율이 퍼지고,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피자, 자욱한 운무와 나무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좀비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가장 굵은 나무에 밧줄을 묶고, 밑에 있는 일행에게 던졌다.
가장 먼저 설여원이 올라오고, 그 뒤에 최현, 마지막으로 전완수까지 안전하게 올라왔다.
전완수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싱겁게 웃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야.”
“나도 죽는 줄 알았다.”
덩달아 싱겁게 웃으며 일행의 모습을 살폈다.
설여원은 올라오는 길에 모든 정을 수거했는지, 8개의 정을 내게 건네주었다.
흙이 묻은 정을 탈탈 털어 가방에 넣고, 다시금 상황에 집중했다.
전완수는 주변을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탄성을 뱉으며 얘기했다.
“야, 저거 보여?”
“뭐.”
“대운동장에 좀비들.”
“난 안개 때문에 안 보여.”
“200마리는 될 거 같은데?”
대운동장으로 들어갔으면 무덤을 파는 꼴이 됐을 것이다.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지만, 다친 사람 없이 안전하게 왔다는 사실에 만족해야겠다.
전완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응시하더니, 손가락으로 어느 한 점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쪽에 내려가는 길 있는 거 같은데?”
“안내해.”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 * *
내려가는 길은 한층 수월했다.
올라올 때처럼 벽을 타는 일도 없었고, 사람이 지나다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길은 아니고, 관리자가 드나드는 통로 정도로 예상되었다.
앞서가던 전완수는 4차선 도로를 살피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재형아, 길 건너 쉼터에 좀비 4마리.”
“어디쯤이야. 손가락으로 가리켜.”
“저쪽.”
손가락의 각도로 보아, 좀비들은 평지가 아닌 고지대에 있는 모양이다.
위치를 파악하고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지금부터 좀비들 처리하면서 들어간다. 다들 집중해.”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자고?”
“다른 길 있어?”
전완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학교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경영학과 건물.
예쁘게 조성된 조경이 일품이지만, 단점이라면 뒷문이 없었다.
정문을 넓게 뚫었다는 게 특징.
그나마 쪽문이 있지만, 그쪽은 주차장과 맞닿은 위치였다.
이곳에서 쪽문의 상황은 확인할 수 없었다.
쪽문의 상황을 확인하려면 최소한 정원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정원으로 들어서면 좀비들에게 발각될 게 뻔하니, 굳이 쪽문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전완수와 최현은 카타나를 뽑으며 몇 차례 숨을 가다듬었다.
설여원도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표정을 확인하고, 전완수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습한 공기와 눅눅한 안개가 두 볼을 스친다.
전신에 힘을 주며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두 눈 부릅뜬 채 4차선 도로를 건넜다.
뒤이어 정원으로 이어지는 높다란 계단이 나타나고, 그 위를 서성이는 좀비들의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르…….
인기척을 느낀 좀비들은 일제히 미동을 멈추고 이곳을 돌아봤다.
크어어어어!!
뒤이어 귓가를 스치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재빨리 오른팔을 치켜들며 눈앞의 좀비에게 헌팅 나이프를 내질렀다.
깔끔하게 안구를 뚫고 들어간 헌팅 나이프는 순식간에 좀비의 뇌수를 헤집었다.
이게 무기의 중요성인가?
쇠파이프보다 몇 배는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숨도 쉬지 않고 헌팅 나이프를 뽑은 뒤, 우측에서 달려드는 좀비의 성대를 그었다.
좌측에 있던 좀비는 뒤따라온 전완수와 최현이 일도양단 내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정원의 모습을 살피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읊조렸다.
“온다.”
크어어어어어어!!
다수의 발소리와 함께 좀비들의 육성이 터져 나왔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노도와 같이 달려드는 다수의 인영.
난 전완수를 쳐다보며 외쳤다.
“산개!”
어젯밤 우리가 세운 계획의 두 번째 단계.
좀비들이 경영학과 건물에 머물 경우, 실내로 진입하기 위해선 미끼가 필요하다.
일전에 기숙사를 벗어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좀비들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학교의 뒤편으로 저수지가 위치하기에, 그곳으로 좀비들을 유인해야 한다.
전완수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쥐고 재빨리 알람을 켰다.
여러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좀비들의 시선은 전완수에게 쏠렸다.
전완수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며 머릿속의 지도를 떠올렸다.
경영학과는 학교의 우측 가장자리에 위치한 건물.
4차선 도로의 끝에 다다르면 진입 금지표지와 함께 흙길이 나타난다.
저수지로 이어지는 흙길.
전완수와 내가 좀비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최현과 설여원은 재빨리 우측으로 달려가 연못에 뛰어들었다.
정원이 조성될 당시, 가로 3m 세로 5m 길이의 연못도 조성되었다.
연못에 들어가 좀비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들의 다음 임무였다.
좀비들이 사라지면 최현과 설여원이 실내로 진입해서 형들을 데리고 나오면 된다.
부디 계획대로 흘러가서, 모두가 무탈하기를 바란다.
전완수와 함께 무성한 수풀을 뚫고 저수지를 향해 달렸다.
허리춤 높이의 풀숲을 헌팅 나이프로 쳐내고, 나뭇가지에 옷이 찢기고 생채기가 생겨도 멈출 수 없었다.
저수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코 쉴 수 없었다.
앞서가던 전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달리더니,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재형아, 재형아! 저 앞에 저수지!”
“다리까지 뛰어!”
저수지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
성인 둘이 서면 꽉 막히는 비좁은 다리였다.
생존율을 높이려면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크어어어어어어!!
발치까지 다다른 좀비들의 육성이 목덜미를 더듬었다.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자, 불도저처럼 수풀을 뚫고 들어오는 다수의 좀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