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6화
내심 공명 좀비가 없기를 바라며, 안개가 자욱한 1층 정문으로 향했다.
뒤이어 거머리처럼 유리문에 달라붙은 좀비들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목젖을 갈며 유리를 두드리는 놈들.
그 소리를 듣고 (구)학생회관에서 몇몇 좀비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산불도 초기에 진화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좀비들도 뭉치면 뭉칠수록 거친 해일이 되어 밀려든다.
2층에 수용 가능한 인원이 넘으면 3층이고 4층이고 올라올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선택해야 한다.
재빨리 유리문으로 달려가 손에 쥐고 있던 쇠파이프로 있는 힘껏 유리를 가격했다.
쨍그랑!
다행히 기숙사에서 사용하는 단단한 강화유리가 아니었다.
모서리 부분을 가격하자, 일순간에 유리문이 깨지며 그 앞에 있던 좀비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한데 뒤엉켜 허우적거리는 좀비들.
놈들이 균형을 잡기 전에, 다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좀비들은 제 발로 나타난 먹잇감을 보고 일제히 목젖을 갈며 내 뒤를 쫓았다.
2층에 다다르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50m 길이의 복도를 이 악물고 전력 질주한 뒤, 다급히 좌측 모퉁이를 돌았다.
4m 앞에 보이는 철문, 그 너머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임 없이 철문을 열어젖히며 원형 계단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윤혜리가 다급히 마이크 선을 내밀었다.
윤혜리의 손에서 마이크 선을 낚아채며 재빨리 철문의 문고리에 칭칭 감았다.
쾅! 콰광!
뒤이어 2층 복도에 들어찬 좀비들이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 있던 먹잇감이 사라지고 갑작스레 철문이 나타나니,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쇠창살 앞에 있던 전완수와 최현은 갑작스러운 파열음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를 돌아봤다.
난 동기들을 쳐다보며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다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5층까지 쉬지 않고 올라갔다.
5층 철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서자, 너도나도 바닥에 쓰러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난 철문을 걸어 잠근 뒤,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랄탄 남았어?”
최현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여분의 지랄탄과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라이터로 지랄탄에 불을 붙이고, 그대로 5층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타드드드득! 타다다닥!
1층에서 들려오는 지랄탄 터지는 소리.
쇠창살에 붙어 있던 좀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일제히 목젖을 갈며 밖으로 나갔다.
사고기능이 없는 좀비들은 쇠창살 부수기를 포기하고 지랄탄을 따라갈 것이다.
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정문 계단으로 달려갔다.
바리케이드 밑으로 기어나간 뒤, 창문을 열고 (구)학생회관 쪽으로 지랄탄을 던졌다.
(구)학생회관과 (신)학생회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놈들은 건물로 들어오지 않고 지랄탄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였다.
일렁이는 안개의 표면이 서서히 멀어진다.
이는 근방에 있던 좀비들이 멀어진다는 뜻.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좀비들이 사냥을 포기할 때까지 쥐 죽은 듯이 기다리는 것.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들려오던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뒤이어 전완수와 최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전완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와락 안겼다.
“박재형 너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울먹이며 반겨줄 줄이야.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기뻐해 주니 고맙기도 했다.
뒤이어 최현의 물음이 이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아니, 여태 어디 있었던 거야?”
최현의 물음에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자. 소개할 친구도 있고.”
* * *
감염 여부부터 확인한 뒤, 설여원과 난 소리결 동아리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겪은 일을 들려주자, 다들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최현은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윤혜리는 손깍지를 끼며 고개 숙였다.
전완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좋은 사람은 꼭 먼저 죽더라.”
장병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전완수의 말에 모두가 공감을 표했다.
다소 울적해진 분위기.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혜리한테 얼추 들었어. 형들은 어떻게 된 거야?”
“아직 경영학과 건물에 있어.”
전완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되물었다.
“왜 같이 안 오고.”
“그게…… 형들이 좀비들 시선을 끌어준 덕에 나올 수 있었어.”
“자세히 얘기해 봐.”
전완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무기를 챙겨서 밖으로 나오는데, 사고기능을 지닌 좀비를 만났어.”
“공명 좀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놈 때문에 건물 근처에 있던 좀비들이 전부 몰려들었어. 형들이 공명 좀비의 시선을 끌고, 그 사이 현이랑 나는 빠져나온 거야.”
“그럼 형들은 무기도 없어?”
“있어. 정우 형은 예봉각에서 쓰던 창을 쓰고, 진영이 형은 교수 방에 있던 손도끼 하나 챙겼어.”
“가방 열어봐. 무기부터 보자.”
가방을 가리키자, 책상 앞에 있던 최현이 무기 가방을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가방 속에는 각종 무기가 들어 있었다.
칼날 길이만 족히 70㎝에 달하는 두 자루의 카타나, 각기 다른 브랜드의 헌팅 나이프 네 자루, 손도끼 하나, 레그홀스터, 20m 길이의 밧줄과 정, 망치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런 게 교수님 방에 있었다고?’
대체 무슨 취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런 걸 방에 전시해 둔단 말인가.
탐험 같은 걸 좋아하는 건가?
헌팅 나이프의 날 길이만 15~17㎝는 족히 되는 것으로 보였다.
전완수는 무기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내일 해 뜨면 형들 구하러 갈 거야.”
“…….”
“오자마자 이런 부탁하는 건 미안하지만…….”
전완수와 최현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뜸 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전완수가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 있던 최현이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재형아, 우리 좀 도와줘.”
최현의 물음에 동아리방에 있던 모든 일행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마른세수와 함께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구출하는 게 도의적으로 옳다.
또한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형들의 구출이 최우선이었다.
두 사람을 구출하면 클리어 조건인 6인이 완성되니까.
하지만 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을뿐더러, 예상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았다.
난 폐부에 들어찬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완수랑 현이 능력은 뭐야.”
“난 가브리엘, 현이는 데니.”
전완수는 설여원과 같은 가브리엘.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한 사람이 늘었으니 사주경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에 최현의 능력은 데니.
독심술이 가능한 데니는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현의 능력은 추후 쉘터에 진입하거나, 생존자와 관련된 퀘스트 진행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난 눈썹을 긁적이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형들의 직업은 뭔데?”
“둘 다 레이첼이야.”
레이첼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힐러가 둘이나 된다고?
그렇다면 또 말이 달라지지.
위험부담을 떠안더라도 무조건 구출해야 한다.
라스트아크는 기본적으로 로그라이크 게임.
뒤로 갈수록 난이도는 말도 안 되게 어려워지고, 크고 작은 부상은 숨 쉬는 것처럼 자주 발생한다.
레이첼에게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은 없지만, 그 외의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각성 퀘스트까지 완료하면 잘린 신체 부위도 도로 붙이는 기적의 의술을 지닌 게 레이첼이었다.
난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레그홀스터와 헌팅 나이프를 챙기며 얘기했다.
“다들 무기 하나씩 고르고, 책상 앞으로 모여.”
전완수와 최현은 각자 카타나를 손에 쥐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뒤늦게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완수랑 현이, 둘 다 검도 배웠다고 그랬지?”
“기억하네? 현이가 에이스였지.”
전완수는 싱겁게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카타나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휘두르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더니, 칼집에 넣는 자세도 품격있어 보였다.
반면에 최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이 많은 모습.
예전에 들은 기억이 맞다면, 어깨부상으로 인해 각광받는 에이스 자리에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런 최현이 검을 들었으니,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남은 무기는 헌팅 나이프와 손도끼.
윤혜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혜리는 마음에 드는 거 없어?”
“아, 저는…… 지금 쓰는 무기 계속 쓸게요.”
윤혜리가 쓰는 무기는 낡고 허름한 창.
예봉각에서 무술 시범에 사용하던 창이었고, 손잡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윤혜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윤혜리는 이곳에 두는 게 좋겠다.
가뜩이나 변수가 많은 상황에, 윤혜리를 데려가는 건 짐이 될 수 있다.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쭈뼛거리며 전완수와 최현의 표정을 살폈다.
이에 전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도 골라.”
“그래도 돼?”
“재형이랑 같이 왔으면 이제 우리 편이지.”
“…….”
설여원은 이마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헌팅 나이프를 챙겼다.
각자 무기를 챙긴 뒤, 책상 앞으로 모였다.
난 설여원이 만든 지도를 펼치며 경영학과 건물과 (신)학생회관의 위치를 표시했다.
경영학과로 가는 최적의 루트를 확인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까지 세웠다.
약 1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두 가지 계획을 세우고, 모든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해 뜨면 출발한다.”
* * *
한여름이라 그런지, 새벽 4시만 되어도 세상은 조금씩 빛이 들기 시작했다.
깊은 잠에 빠진 일행을 흔들어 깨운 뒤,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다들 화장실로 걸어가 찬물로 세수하고, 한층 맑아진 정신으로 무기를 챙겼다.
난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어제 세운 계획을 복기했다.
뒷문 앞의 샛길로 이동하는 게 가장 빠르지만, 도서관 후문에 좀비들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다.
한번 좀비들을 정리하면 편리한 이동루트가 되겠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또한 도서관 쪽을 안전하게 벗어나더라도, 그 너머에 있는 테니스장과 족구장, 공터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은 뒷문으로 나가자마자 우측의 (신)학생회관 주차장으로 들어선 뒤, 그 앞에 있는 절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절벽 너머에는 대운동장이 위치하기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경영학과로 이동하는 게 1차 계획이었다.
단점이라면 대운동장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기에, 좀비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
하지만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닌 전완수와 설여원이 있으니 충분히 회피기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운동장은 사방이 뻥 뚫린 만큼, 가브리엘의 능력이 빛을 발할 것이다.
“재형아, 슬슬 출발하자.”
등 뒤로 전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을 돌아보자, 다들 전완근과 발목, 종아리에 잡지나 신문지 등을 감아서 테이프로 고정해둔 상태였다.
오직 윤혜리만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 숙이고 있었다.
윤혜리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본인 스스로 부족하다 느끼면 데려가 봐야 짐이다.
“괜찮아.”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자, 윤혜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더는 윤혜리를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토닥이며 얘기했다.
“혜리는 지금처럼 동아리방을 지켜줘.”
“……네.”
“대신 하나만 기억해.”
나지막하게 얘기하자, 윤혜리는 슬며시 고개를 들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언젠가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땐 망설이지 말아줘.”
“…….”
윤혜리는 대답 대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리에게 사심이 있거나, 그녀를 아껴서 양해하는 게 아니었다.
전완수와 최현, 설여원, 그리고 나까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라스트아크 플레이어였다.
반면에 윤혜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생존자.
윤혜리는 자책을 많이 하는 성격이기에, 조금씩 타이르며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귀찮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윤혜리도 우리 동아리 사람이었다.
일행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윤혜리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물론 윤혜리가 끝까지 각성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나온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난 레그홀스터에 넣어둔 헌팅 나이프를 뽑으며 일행에게 얘기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