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5화
윤혜리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농구코트도 못 벗어나서 춤사랑 사람들은 전부 물렸고, 예봉각 사람들은 시간 벌겠다고 하더니……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농구코트라면 여기서 500m도 못 가서 전멸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윤혜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깍지를 끼고 있는 윤혜리의 양손이 잔잔하게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윤혜리를 보채기보다, 심란한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윤혜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춤사랑 사람들이 물리는 동안…… 저희는 도망쳤어요.”
“…….”
“도와주고 싶었는데, 정말 도와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윤혜리의 어깨가 잔잔하게 떨렸다.
난 윤혜리를 토닥이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는가.
다들 맨정신이 아니었을 테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성을 붙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 도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직감과 본능만이 존재할 뿐이다.
씁쓸한 마음에 시선을 회피하자, 윤혜리는 한 차례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동아리방에서 숨만 쉬고 살았어요.”
숨만 쉬고 살아?
최현과 전완수는 라스트아크의 직업이 부여됐을 텐데?
현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혹시 현이랑 완수가 특이한 행동은 하지 않았어?”
“특이한 행동이요?”
“유독 안개 속에서 잘 보인다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 안 했어?”
“라스트아크요?”
윤혜리의 입에서 나온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리도 라스트아크를 아는 건가?
“혜리 너도 라스트아크 했어?”
“아니요, 저는 아니고…… 저 빼고 다들 라스트아크 얘기를 했어요.”
“진영이 형이랑 정우 형도? 언제.”
“농구코트에서 돌아온 뒤로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완수 오빠가 갑자기 퀘스트 생겼다고 그러더니 너도나도 퀘스트 열렸다고 그랬어요.”
문득, 내게 퀘스트가 처음 생성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 역시 보름 동안 아무런 퀘스트도 생성되지 않다가,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라는 S급 퀘스트가 열리면서 라스트아크 Hell 모드를 클리어하라는 메인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지금의 미쳐버린 세상이 라스트아크와 동일하다는 걸 메인 퀘스트가 생성된 뒤에야 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했던 사람이라도, S급 퀘스트가 생성되지 않으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가?
난 윤혜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퀘스트. 퀘스트 내용도 알아?”
“그게…… 완수 오빠가 부모님 걱정하면서 신세 한탄하다가 갑자기 그런 거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네, 완수 오빠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집에 가야겠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다른 오빠들이 뭐라 했거든요. 누구는 부모님 걱정 안 되는 줄 아냐면서.”
“그랬더니 퀘스트가 생성된 거야?”
“네, 그때 오빠 얘기도 나왔어요.”
내 얘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윤혜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얘기했다.
“오빠가 만날 라스트아크 얘기했다면서요? 게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재형 오빠라고, 재형 오빠를 찾아야 한다고 다들 그랬어요.”
“너 빼고 다들 플레이어라는 거지?”
“네.”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하지 않은 사람 중, 안개에 면역 지닌 생존자는 윤혜리가 유일했다.
10명 중 1명꼴.
착잡한 마음에 눈썹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안개가 퍼지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 본격적으로 움직인 거야?”
“네, 정우 오빠를 중심으로 다들 마음 단단히 먹기로 했어요. 끝까지 살아남자고, 이 세상이 라스트아크처럼 변했다면 분명 살아남는 방법도 있을 거라고.”
암울하던 분위기를 이정우가 환기하고, 일행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모양이다.
그럼 이정우가 이 팀의 대표라는 뜻이고, 정신적 지주와도 같다.
이정우가 대표라면 나도 동의한다.
말수가 적어서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생각이 깊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식량은 어떻게 공급하고? 2층 매점에서 가져온 거야?”
“동아리방에 냉장고 있잖아요. 냉장고에 남은 음식으로 버티다가, 최근에 매점을 털었어요.”
아, 그래.
소리결에는 각종 군것질거리와 음료수로 가득한 냉장고가 있었다.
동아리방에서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은 전부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잠깐, 냉장고?’
냉장고가 돌아간다면 전력이 들어온다는 말이 아닌가?
(신)학생회관은 태양광 패널이 제대로 작동하는 모양이다.
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환호했다.
매점이 돌아간다면 (신)학생회관 1층에 있는 식당도 전력이 들어오지 않을까?
그럼 냉동식품도 온전하겠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윤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무기 구하러 갔어요.”
“무기? 무슨 무기.”
“예봉각에 있던 사람이 그랬거든요. 경영학과 교수님 방에 각종 무기가 있다고.”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윤혜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긴가민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무슨 일본도라고 그러던데…… 카타나였나? 그리고 무슨 헌팅 나이프? 그런 게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가능한가?
진검을 소지하는 건 법적으로 불가능할 텐데.
허가받은 건가?
경영학과 교수가 그런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니, 독특한 취미다.
어떻게 들고 들어왔는지 몰라도, 우리에겐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다 같이 무기 구하러 간 거야?”
“네, 오늘 낮에 경역학과 건물로 갔어요.”
벌써 해가 떨어진 저녁 시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언제까지 도착하겠다는 말도 없었어?”
“그런 말은 없었어요.”
경영학과 건물이라면 (신)학생회관 뒷문으로 나가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었다.
뒷문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은 두 명이 나란히 서는 것도 버거운 비좁은 계단이었고, 곧장 도서관 후문과 공대로 이어지는 샛길, 경영학과 건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위치한다.
지금 찾으러 나가야 하나?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세상이 어둠에 잠식된 시각이다.
밖에 나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나도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
지금은 동기들과 형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며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난 윤혜리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혜리는 여원이 상태 확인한 뒤에 같이 동아리방 들어가 있어.”
“네? 오, 오빠는요?”
“야간 근무서는 사람은 있어야지.”
“아…… 하지만 오빠도 확인해야 하는데……”
“내 벗은 몸이 그렇게 보고 싶어?”
“아, 아니요. 그럼 일단…….”
타닷- 타다닷-
그 순간, 귓가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모든 소음이 사라진 세상.
작은 물방울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리는 세상이었다.
청각을 곤두세우자, 소리의 근원지가 건물 밖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쇠파이프를 손에 쥐고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앞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뒷문으로 향하는 원형 계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다급히 반대편 복도의 창가로 달려가자, 자욱한 안개의 표면이 일렁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본관에 있던 좀비들이 쫓아온 건가?
아니다, 놈들이 쫓아왔다면 뒷문이 아니라 정문으로 들어와야 정상이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개 속을 응시하자, 가방에 무언가를 잔뜩 넣고 달려오는 인간의 걸음걸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
크어어어어!!
동시에 생존자를 뒤따르는 다수의 좀비도 확인할 수 있었다.
* * *
난 원형 계단으로 이어지는 철문을 열어젖히고, 계단 난간에 기대어 1층을 내려다봤다.
“닫아! 빨리 닫아!”
“나도 알아 인마!”
자욱한 안개로 인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전완수와 최현의 목소리.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다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내 발소리를 들은 건가?
전완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혜리니? 혜리야!”
“나다 이놈들아!”
잠깐의 정적 끝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재형?”
“그래!”
이윽고 1층에 도착하자, 전신에 혈흔을 뒤집어쓴 최현과 전완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당혹감이 들었지만,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정우 형이랑 진영이 형은? 같이 나갔다며.”
“너 뭐야, 언제 왔어.”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하고 지금은…….”
크어어어어!!
쾅!!
뒤이어 뒷문을 두드리는 좀비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뒷문의 하단에 꽂아둔 나뭇조각이 움푹 파이며 5㎝ 정도 문이 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안 잠그고 뭐 하는 거야! 빨리 잠가!”
“이 문 고장 나서 안 잠겨!”
전완수는 온몸으로 뒷문을 막으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최현은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더니, 바지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츠으으으- 타닷! 탁! 따다다닥!
일명 ‘지랄탄’이라 불리는 폭죽이었다.
밝은 빛을 내뿜으며 사방으로 터지는 지랄탄 덕분에 좀비들의 시선을 잠시나마 돌릴 수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전완수는 내 옷깃을 쥐고 1층과 2층 사이의 쇠창살 앞으로 향했다.
안전지대에 들어서자마자 미닫이 쇠창살을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하지만 지랄탄은 금세 잦아들었고, 건물 밖에 있던 좀비들은 다시금 뒷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뒷문이 꽉 막히자, 몇 놈이 건물을 크게 돌아 정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신)학생회관 뒷문은 도서관 후문과 맞닿은 위치였고, 정문은 (구)학생회관과 고작 10m 거리였다.
저렇게 괴성을 내지르며 뛰어다니면 도서관과 (구)학생회관의 좀비들이 모여들 것이다.
저들 사이에 공명 좀비가 없더라도, 다수의 좀비가 모여들면 끝이다.
안개가 차오른 2층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물량을 앞세워 위로 올라올 테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밖에 있는 수십 마리의 좀비를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타개책을 떠올린 끝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공명 좀비가 섞여 있으면 물거품이 되는 방안이지만,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상책이었다.
맞불을 놓아야 한다.
난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여기서 버텨.”
“뭐?”
“좀비들 정문으로 돌아오잖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여기서 버티고 있으라고!”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다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5층까지 쉬지 않고 올라가자, 잔뜩 겁에 질린 윤혜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 윤혜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동아리방에 쇠사슬이나 마이크 선 있어?”
“마, 마이크 선이요? 네네, 있어요.”
“그거 들고 2층에서 대기해.”
“네?”
윤혜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기에,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얘기했다.
“각 층의 철문은 전부 잠겨 있는 거지?”
“네?”
“원형 계단으로 통하는 철문 말이야! 저런 거!”
코앞에 있는 철문을 가리켰다.
커다란 양문형 철문.
(신)학생회관은 복도와 계단을 가로막는 철문이 층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윤혜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3층이랑 4층은 문고리가 쇠사슬로 묶여 있어요. 경비 아저씨가 항상 잠가두는 문이라서…….”
“됐고, 2층은.”
“2층이요? 2층은 열려 있어요. 당구장 공사 때문에 자재들 옮긴다고 계속 열어둔…….”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가?
윤혜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난 윤혜리를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했다.
“잘 들어. 내가 2층 복도로 좀비들 유인할 거야. 좀비들이 2층까지 따라오면 곧장 뒷문 계단으로 이동할 테니까, 내가 나오면 문고리에 쇠사슬이든 마이크 선이든 감아.”
“네? 그, 그게 무슨…….”
“시키는 대로 해!”
윤혜리는 반박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로 곧장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정문 계단으로 향했다.
바리케이드 하단의 상자를 치우고 계단을 내려가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반복했다.
학생회관을 둘러싼 좀비들을 밖으로 유인할 방법이 없으니, 놈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학생회관에 가두는 게 이롭다.
좀비들의 청각이 퍼지는 거리를 생각했을 때, 시발점이 되는 (신)학생회관 주변의 좀비들만 가두면 더는 몰려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급한 불을 끄는 게 우선이니, 들어온 좀비들을 처리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계단에 즐비한 좀비들의 시신이 우리의 체취도 지워줄 테니, 놈들이 위로 올라올 가능성도 희박하다.
진압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이 번지기 전에,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맞불을 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