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4화 (14/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4화

우리를 뒤쫓는 것인지, 사냥감을 놓쳐서 포효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등에 메고 있던 가방과 설여원의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자세를 낮추며 얘기했다.

“업혀.”

설여원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오기 부리지 말고 빨리.”

설여원은 쭈뼛거리며 내 등에 업혔다.

무겁거나 가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떨떨한 정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과 귓가를 맴도는 좀비들의 발소리.

엄습하는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농구코트까지 왔으니, 이제 학생회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야, 어디로 가야 돼.’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칠흑 같은 어둠.

자욱한 안개와 어둠에 잠식된 세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빛이 사라진 세상은…… 암흑 그 자체였다.

1m 앞의 사물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여원아, 올라가는 계단 보여?”

설여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나도 안 보여.”

“그럼 족구장 같은 건?”

“아, 저쪽.”

설여원은 오른팔을 뻗어 전방 45도 방향을 가리켰다.

설여원의 손끝을 쳐다보며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족구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족구장을 벗어나자 그 너머로 자그마한 돌계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왔어.’

시야를 확보할 수 없지만, 계단만 올라가면 공터가 나온다.

(구)학생회관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

(구)학생회관의 우측으로 가파른 언덕길이 위치하고, 거기까지 올라가면 최종 목적지인 (신)학생회관에 도착할 수 있다.

설여원은 내 등에 업힌 채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왼쪽 주차장 쪽에 좀비.”

“몇 마리.”

“아홉.”

“거리는.”

“한…… 30m?”

“오른쪽에 언덕 보여? 거기는 좀비 없어?”

“언덕 앞에 정자처럼 생긴 곳에 두 마리.”

등에 업고 있던 설여원을 내려놓고, 한발 앞서 정자로 달려갔다.

크르르르…….

내 눈엔 안 보이지만, 놈들의 울음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마치 위치추적기가 반응하듯, 놈들의 위치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명확한 거리까지 계산할 수 없기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질주했다.

뻑!

앞에 메고 있는 가방을 이용해 정자에 있던 좀비에게 몸통박치기를 가했다.

앞에 있던 좀비는 뒤로 넘어지는 과정에서 나무 벤치의 모서리에 목을 부딪치고 전신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였다.

반동을 이용해 동그란 공처럼 바닥을 구르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카하악……!

바로 옆에서 들리는 좀비의 울음소리.

망설임 없이 쇠파이프를 휘두르자, 손끝으로 전해지는 타격감과 함께 놈의 두개골이 함몰됐다.

두 마리의 좀비에게 연달아 쇠파이프를 휘두른 뒤, 설여원이 있는 장소를 돌아봤다.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오는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좀비처럼 보였다.

‘밤에는 활동하면 안 되겠어.’

해가 떨어진 뒤에는 아군과 적군을 분간할 수 없었다.

뒤이어 거친 숨소리와 함께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나야.”

설여원을 부축하며 높다란 언덕을 올랐다.

30m나 이어지는 경사 40도의 언덕.

설여원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 악물고 올라왔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는지, 지면에 엎어지며 두 팔을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설여원을 부축하며 얘기했다.

“조금만 더 힘내. 거의 다 왔어.”

하지만 설여원은 부축받을 힘도 없는지, 내 손길을 뿌리치며 바닥에 엎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려고?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설여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네 발로 기어서 언덕을 올랐다.

체력 스탯을 높인 나도 숨이 거친데, 설여원은 오죽할까.

난 좀비의 유무를 살피며 한발 앞서 언덕 끝에 있는 (신)학생회관에 도달했다.

언덕을 기어오른 설여원은 반쯤 풀린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동아리, 동아리방 몇 층이야.”

“5층.”

“씨X…….”

설여원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학생회관 꼭대기 층에 위치한 동아리방.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진 설여원을 일으키며 물었다.

“업힐래?”

“됐어, 내부에 좀비들 있으면 어쩌려고.”

크어어어어!

그 순간, (구)학생회관 주차장 쪽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본관에 있던 좀비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먼발치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에, 신학생회관 정문을 열어젖히며 설여원을 밀어 넣었다.

유리문을 걸어 잠근 뒤, 설여원의 모습을 살피자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재빨리 설여원의 곁으로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이 악물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서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꿰뚫린 상태였다.

좀비들의 시신을 보고 확신이 차올랐다.

사람이 있다.

좀비들을 정리할 정도라면, 당연히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한 내 동기들일 것이다.

2층, 3층, 4층, 마침내 5층까지 다다르자, 계단에 설치된 바리케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과 의자, 상자 등으로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

보기와 다르게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작정 쌓아 올린 게 아니라 무게중심까지 생각해서 올린 건가?

세차게 바리케이드를 흔들자, 그 너머에서 정체 모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죽기 싫으면 멈춰!”

으름장을 놓지만, 굉장히 앳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이 목소리.

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난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혜리니? 혜리야?”

“어?”

당황하는 여자.

윤혜리.

내가 소속된 동아리의 후배였다.

윤혜리는 라스트아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혜리가 이곳에 있다는 건…… 동기들이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난 화색을 띠며 얘기했다.

“박재형, 나 박재형이야!”

“재형 오빠? 진짜 재형 오빠예요?”

그러자 바리케이드 밑으로 상자를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밑을 막아둔 상자가 사라지자, 사람 한 명이 간신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윤혜리는 그곳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내 얼굴을 살폈다.

낯익은 얼굴.

내가 부회장으로 있는 동아리의 신입생, 윤혜리가 맞다.

* * *

“재형 오빠!”

“인사는 나중에. 이 사람부터 받아줘.”

끙끙거리는 설여원을 바리케이드 밑으로 밀어 넣고, 뒤따라 나도 허겁지겁 들어갔다.

바리케이드 내부로 들어서자, 윤혜리는 재빨리 입구를 막고 설여원과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 여자 물렸어요?”

“아니야, 지쳐서 그래.”

“화, 확인해야 돼요.”

“들어가서 확인하자.”

피로에 젖은 몸을 이끌고 동아리방 앞으로 향하자, 등 뒤로 날붙이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윤혜리는 기다란 창을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어디서 구한 거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마른침을 삼키며 쳐다보자, 윤혜리는 미간에 힘을 주며 얘기했다.

“화, 확인하고 들어가야 돼요.”

날 의심하는 건가?

내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잘해줬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다가도, 통과의례와 같은 일이기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어떻게 해줄까. 여기서 옷이라도 벗을까?”

“아, 아니 그게…… 잠시만 기다려요.”

윤혜리는 우왕좌왕하더니, 동아리방으로 들어가서 물병을 들고 나왔다.

이럴 거면 창은 왜 들었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이거 드시고…… 저기 춤사랑에서 대기하세요.”

5층에는 총 5개의 동아리방이 존재했다.

그중 내가 부회장으로 있는 어쿠스틱 통기타 동아리 소리결.

악기가 많은 관계로 다른 방에 비해 2배는 큰 방이었다.

대략 25평 정도 될까?

그곳이 생존자들의 은신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춤사랑은 소리결의 맞은편에 위치한 동아리였다.

그곳에서 감염 여부를 확인한 뒤에 소리결 동아리방으로 넣어주는 모양이다.

설여원은 윤혜리가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여기 생존자는 몇 명이야.”

“네? 아…… 그건 왜요?”

“질문도 못 하니?”

설여원이 인상을 찌푸리자, 윤혜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나더러 어쩌라고.

어깨를 으쓱이자, 윤혜리는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나도 불청객 입장이 아닌가?

말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도와줄 여력도 없다.

대충 오른손을 휘저으며 통성명만 시켜주었다.

“이쪽은 나랑 같이 탈출한 설여원. 여기는 내 동아리 후배 윤혜리.”

강제로 통성명을 시켜주자, 윤혜리는 설여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설여원은 여전히 숨쉬기도 버거운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난 윤혜리의 쳐다보며 물었다.

“저 바리케이드 누구랑 만든 거야?”

“아, 현이 오빠랑 같이 만들었어요.”

“현이? 최현?”

역시, 동기들이 살아 있다.

윤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 * *

보름 전, 동아리방에 있던 사람들은 밤새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며 놀았다고 한다.

동방에 있던 사람은 윤혜리와 최현, 전완수, 이정우, 정진영, 그 외에 신입생과 재학생까지 합쳐서 총 14명이었다고 한다.

최현과 전완수는 내 동기였다.

두 사람은 이 동네 토박이였고, 소꿉친구부터 대학교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정우와 정진영은 동아리 선배였고, 과제를 하기 위해 동아리방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평소 동아리방에서 놀고먹고 자며 시간 보내는 일이 많았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동방에서 밤늦게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한참을 놀다가 새벽 두세 시가 넘어설 무렵,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치킨을 주문했다고 한다.

“치킨 기다리면서 창밖을 보는데…… 지금의 안개가 깔려 있었어요.”

윤혜리는 암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배달원이 안개 속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이유 없이 달려드는 그를 선배들과 동기들이 뜯어말렸다고 한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겠지.

“배달원은 어떻게 처리했어?”

“몸싸움 과정에 배달원이 넘어지면서 척추가 부러졌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어떻게 처리했냐니까.”

횡설수설하던 윤혜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처음엔 화장실에 가두고 지켜봤어요. 그런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니까…….”

윤혜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양손을 오므린 채 말을 맺지 못했다.

떠올리기 힘든 기억일 것이다.

난 윤혜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배달원은 확실하게 죽였어? 물린 사람은.”

“완수 오빠가 처리하겠다고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온몸에 피를 묻히고 돌아왔어요. 물리진 않았는데…… 옷이 축축할 정도로 피가…….”

한 성격 하는 완수가 자진해서 처리한 모양이다.

물린 사람이 없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물리지 않았으면 됐다.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좀비에게 물리면 똑같이 감염되니까.

윤혜리는 보름간 쌓인 게 많은지, 내게 투정 부리듯이 얘기했다.

“다들 공황에 빠진 상태였어요. 경찰도 오지 않고 119도 오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1층까지 내려간 적은 없어?”

“안개가 퍼지고 이틀 정도 지났나? 그때 다 같이 탈출하려고 내려갔었어요.”

안개에 대한 면역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좀비로 변했을 것이다.

난 윤혜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14명 있었다고 그랬지?”

“네.”

“몇 명이나 변했어?”

“완수 오빠랑 현이 오빠, 진영이 오빠랑 정우 오빠 빼고 전부요.”

완수랑 현이는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한 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정진영과 이정우가 변하지 않았다고?

정진영과 이정우도 윤혜리처럼 안개에 면역이 있는 건가?

윤혜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탈출하자는 얘기가 또 나왔어요.”

“무기는 충분했어?”

“3층에 헬스장이랑 예봉각 동아리방이 있으니까요.”

예봉각.

한국 전통 무예를 계승하는 동아리.

매년 동아리 홍보 때마다 각종 무술을 선보이며 눈을 즐겁게 해주는 동아리였다.

그들이 시범에 사용하는 무기는 지금 같은 시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날은 예리하지 않지만, 기다란 창과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검은 좀비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데 효율적일 것이다.

윤혜리가 손에 쥐고 있는 창도 예봉각에서 가져온 건가?

윤혜리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탈출할 때 5층에 있던 춤사랑 사람들이랑 3층의 예봉각 사람들도 함께했어요.”

“우리 동아리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

“네, 하지만…….”

윤혜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