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3화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찰나, 설여원은 대뜸 내 허리를 붙잡고 뒤로 누웠다.
‘어?’
무슨…… 힘이 장사다.
등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커헉!”
격하게 기침을 토하며 얼얼한 통증으로 인해 바닥을 뒹굴었다.
반면에 설여원은 울상을 지으며 대뜸 내 팔과 등을 때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거푸 날리는 주먹질은…… 애교로 때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말 한이 담긴 듯이, 내게 주먹을 날렸다.
아파서 설여원의 양팔을 붙잡자,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얘기했다.
“누구 마음대로 죽어.”
“…….”
“종아리 걷어.”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빛인데, 그 속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바지 안 걷으면 또 쥐어패겠다는 무언의 압박.
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바지를 걷었다.
뒤이어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지에는 좀비의 치아 자국이 선명한데, 종아리는 멍 자국만 존재했다.
바지가 뚫리지 않았다.
설여원은 바닥에 떨어진 작디작은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내게 똑바로 보여주며 얘기했다.
“네가 판단이 빠른 거 알아. 그게 장점이지만, 동시에 단점이야.”
설여원의 손에 쥐어진 것은 부러진 치아였다.
관자놀이가 꿰뚫린 좀비의 안면을 살피자, 으깨진 콧대와 아작 난 이빨들이 두 눈에 들어왔다.
좀비의 안면을 쇠파이프로 휘두르는 과정에 치아가 박살 난 건가?
설여원은 손에 쥐고 있던 이빨을 바닥에 던지며 얘기했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이빨 빠진 살쾡이에게 물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
다시 살아난 기분도 들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정말 경솔했다.
설여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 인생은 조금 전에 끝났을 것이다.
설여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내밀며 얘기했다.
“빨리 일어나. 알람 곧 끝나.”
설여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칠 대로 지쳐서 삶을 비관적으로 보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심지가 굳은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흐려졌던 내 정신도 맑아졌다.
바닥에 내려둔 쇠파이프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느슨해졌던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느새 2층까지 안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쉬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본관의 정문과 후문에는 여전히 좀비들이 바글거렸다.
좀비들의 청각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게 사실로 밝혀졌다.
3층에서 저토록 큰 소리로 울리는 알람을 1층의 좀비들이 못 듣다니.
설여원은 복도의 좌우를 살핀 뒤,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이며 쪽문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쪽문 앞에 다다르자, 앞서가던 설여원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설여원은 모서리 부분에 등을 맞대고, 쪽문으로 통하는 비좁은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곧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좀비들의 숫자를 알려주었다.
비좁은 통로에 세 마리.
발 빠르게 움직이면 놈들이 큰 소리를 내기 전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뒤로 와.”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설여원은 덩달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내가 오른쪽.”
“…….”
좀비를 죽이고 양손을 바들바들 떨던 설여원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설여원도 적응해야 한다.
이를 설여원도 알기에, 우측의 좀비를 본인이 담당하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엔 설여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쇠파이프를 말아쥐었다.
테이프를 감아둔 손잡이 부위가 끈적거렸다.
좀비들의 혈흔 때문인지, 손바닥에 고인 땀 때문인지, 테이프 때문인지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미끄럽지 않으면 그만.
“흡!”
숨을 들이켜며 쏜살같이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쪽문을 바라보던 좀비들은 배후의 인기척을 느끼고 기이하게 머리를 비틀었다.
일격에 전부 죽인다는 생각보다, 다른 좀비들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여 성대와 하관부터 가격했다.
떠걱!
바로 앞에 있던 좀비는 턱뼈가 어긋나며 지면에 엎어졌다.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던 멍키스패너를 일직선으로 내질러 뒤에 있는 좀비의 성대를 짓눌렀다.
카하……!
우측에 있던 좀비가 입을 쩍 벌리며 내게 달려드는 찰나, 두 볼을 꿰뚫는 얇은 쇠막대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여원이 달려와 좀비의 두 볼을 쇠파이프로 꿰뚫었다.
뒤이어 설여원은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십자드라이버로 좀비의 안구를 찔렀다.
칵…… 학……!
바닥에 엎어졌던 하관이 돌아간 좀비가 거머리처럼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재빨리 멍키스패너를 뽑으며 손잡이 부위로 허벅지에 붙은 좀비를 가격하고, 오른손을 뻗어 성대가 덜렁거리는 좀비의 구강을 향해 내질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릎으로 허벅지에 붙은 좀비의 두개골을 그대로 벽면에 찍었다.
그러자 좀비의 두 눈에 초점이 흐려진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이전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 쇠파이프로 정수리를 깨부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 마리의 좀비를 처리하고 설여원을 쳐다보자, 설여원은 얼굴에 묻은 혈흔을 닦으며 복도를 살폈다.
좌우를 살피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얘기했다.
“온다, 빨리 나가야 돼.”
“들킨 거야?”
“완전히 들킨 건 아니야. 소리가 들리니까 확인하러 오는 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쪽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 어둑해진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반경 5, 6m까지 확보되던 시야가, 지금은 3m가 한계였다.
시야가 차단되자, 다른 감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습기, 귓가를 간질이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전신을 더듬는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를 상황.
설여원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더니, 정면을 가리키며 한발 앞서 나아갔다.
더 늦으면 아무리 설여원이라도 지형을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브리엘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안개 속에서의 시야 확보지, 어둠 속에서의 시야 확보가 아니니까.
비록 시야는 좁지만, 1년 6개월간 매일같이 돌아다닌 교정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게도 익숙한 길.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굴곡과 화단의 생김새, 가로수의 종류를 살피며 머릿속으로 현재 위치를 떠올렸다.
내리막길, 잔디밭, 인도, 경사진 도로, 방지턱의 숫자.
발소리를 죽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크어어어…… 크하아아악!
배후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알람 소리가 끊긴 것으로 보아, 본관에 있던 좀비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게 분명하다.
설여원의 팔을 잡자,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후방을 살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괜찮아, 60m는 떨어진 거리야.”
“따라오는 놈은?”
“이쪽을 쳐다보는 놈은 없어.”
쪽문에 위치한 주차장은 벗어났는데, 이대로 큰길로 이동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시간이 없다.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으니, 전력이 끊긴 세상은 금세 칠흑처럼 어두워질 것이다.
머릿속으로 학교의 지형을 떠올리며 설여원에게 얘기했다.
“인도로 가지 말고 옆에 숲으로 들어가자.”
“숲? 나 저쪽 길은 몰라.”
“내가 알아.”
4월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꽃길.
각 강의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높다란 언덕에 흙길이라서 이용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저 언덕만 지나면 농구코트가 나오고, 그 너머에 학생회관이 있다.
설여원과 함께 숲길을 내달렸다.
예상대로 숲을 거니는 좀비는 없었다.
2분 동안 쉬지 않고 전력 질주하자, 퍽퍽한 흙길이 우레탄 바닥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구코트.
커어어어어…… 커걱!
그 순간, 발치에서 좀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지?’
두 눈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봐도 좀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설여원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주변을 살폈다.
“오른쪽!”
뒤이어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
훙-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기다란 팔이 내 목젖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급히 상체를 숙인 덕에 간발의 차로 좀비의 팔을 회피할 수 있었다.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팔이 날아든 방향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빡!
하관을 가격하고 싶었는데, 좀비의 키가 상당히 크다.
족히 190은 될 것 같다.
어깨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통감이 마비된 좀비들에게 어깨뼈가 부러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카학!
뒤이어 어깨를 가격당한 좀비는 쇠파이프를 쥐고 있는 내 오른손으로 이빨을 들이밀었다.
다급히 뒷걸음질 치자, 놈의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며 치아가 갈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칠판을 긁는 것처럼 소름 돋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놈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생전에 운동을 하던 놈이라서 그런가.
다른 좀비들과 달리 근력이나 반사신경이 빠르다.
놈의 머리가 밑으로 숙여진 지금이 기회.
다시금 쇠파이프를 휘두르려는 찰나,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붉게 충혈된 안구가 내 목덜미에 다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체를 숙인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체를 숙였다가 허리를 붙잡히면 낭패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려지는 시뮬레이션.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던가.
뒤에 있는 녀석의 콧잔등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뻐걱!
팔꿈치로 전해지는 저릿한 통증을 감내하며, 정면에서 달려드는 좀비의 안면에 쇠파이프를 내질렀다.
부드러운 순두부를 으깨듯이 뚫고 들어가는 쇠파이프.
쇠파이프로 거구의 뇌를 헤집은 뒤, 재빨리 뽑으며 뒤에 있는 좀비의 관자놀이를 향해 휘둘렀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쇠파이프의 손잡이 부위로 뒤에 있던 좀비의 관자놀이를 타격했다.
‘물린다.’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라서, 이젠 본능적으로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관자놀이를 맞은 좀비는 목을 쭉 내밀며 내 어깻죽지를 향해 치아를 들이밀었다.
재빨리 우측으로 몸을 굴리며 두 눈을 홉뜬 채 좀비의 위치를 직시했다.
영화 속에서는 바닥을 뒹군 뒤에 일어날 시간을 주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좀비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내게 쓰러지듯 달려드는 좀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짧은 찰나, 판단력이 흐려졌다.
피해? 때려? 막아?
좀비의 양손이 내 두 볼을 붙잡으려는 찰나, 좀비의 관자놀이를 가격하는 쇠파이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여원이 시원하게 홈런을 쳤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으면 떵! 하고 울리는 파열음이 농구코트에 메아리쳤다.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의 옆으로 드리우는 검은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뒤에!”
설여원은 세차게 고개를 비틀며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고, 목덜미로 날아드는 충혈된 안구를 발견했다.
피하기엔 늦었다.
무의식적으로 설여원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설여원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으며, 그 덕에 좀비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떠걱!
점점 짙어지는 어둠으로 인해 좀비의 행색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머리를 가격한 줄 알았는데, 이놈도 상당히 키가 큰 녀석이었다.
목을 맞은 좀비는 경추가 부러졌는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쇠파이프로 연달아 정수리를 찍었다.
집중력이 극한에 달하자, 좀비의 두개골이 내려앉는 촉감이 쇠파이프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두개골이 함몰된 좀비는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떨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체력 스탯을 5개나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가빠왔다.
쓰러진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전신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설마 물린 건가?
“괜찮아? 너 왜 그래.”
“발목 접질린 거 같아.”
너무 세게 잡아당겼나?
목숨은 부지했지만, 넘어지는 과정에 발목을 다친 모양이다.
크르르르…… 크어어어어!
뒤이어 우리가 지나온 숲길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