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0화
어쩌면 기숙사 단지 초입의 2인실 기숙사가 열려 있던 이유는 설여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설여원은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구한 식량이 다 떨어질 무렵, 기숙사 식당으로 향했다고 한다.
식당은 전력이 들어오지 않아서 모든 음식은 상했기에, 하는 수 없이 매점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매점에서, 내가 만났던 남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은신처가 있다는 말로 설여원을 현혹했고, 생존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들뜬 설여원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방향에서,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다고 한다.
설여원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라스트아크 해봐서 알겠지만…… 도저히 지금 나올 수 없는 놈들이 있더라고. 그래서 도망쳤어.”
“대장 좀비.”
덤덤하게 얘기하자, 설여원은 입을 마름모꼴로 만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봤어? 대장 좀비?”
“두 마리 봤어.”
“어? 두 마리?”
설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두 마리가 아닌가?
나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리자, 설여원은 손가락을 접으며 얘기했다.
“세 마리 아니야?”
“뭐?”
대장 좀비가 기숙사에만 세 마리나 된다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본 건 두 마리였어. 둘이 서로 싸우는 모습.”
“싸웠다고? 그럼 그 둘이 다른 하나를 죽인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같은 좀비인데.”
“게임에서 어땠는지 기억나? 난 두 번째 에피소드 초반을 넘긴 적이 없어서 그 뒤는 몰라.”
대장들끼리 뭉쳐서 머릿수 늘리는 경우는 봤지만, 영역 싸움은 본 적 없었다.
물론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게임과 현실을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어? 잠깐.’
라스트아크의 설정을 따라간다면…….
난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설여원이 불안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아니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지.”
“왜 뭔데? 얘기해 줘.”
나 역시 확신은 없지만, 라스트아크의 설정을 따라간다면……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변종.”
“변종?”
“변종 본 적 없어?”
“들은 적도 없어.”
“라스트아크 설정에 따르면 변종의 시발점은 대장 좀비야. 이성이 발달한 대장 좀비들은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뇌를 지속적으로 섭취해야 하고, 시기를 놓치면 변종으로 변해.”
설여원은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뒤이어 두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럼…… 지금 변종이 이 학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설마. 첫 번째 에피소드에 변종이 나오는 건 말도 안 되지. 변종은 두 번째 에피소드 중후반에나 나오는데.”
“안개가 퍼진 뒤로 말 되는 일이 있었어?”
“…….”
게임에서는 총기를 얻은 시점인 두 번째 에피소드 중후반에나 변종이 나온다.
지금은 대장 좀비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만약 변종까지 달려든다면…… 생존율은 0%나 다름없다.
설여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변종은 많이 강해?”
“총에 맞아도 잘 안 죽어.”
설여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바람을 뱉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뒤이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안전가옥은 고사하고, 메인 캐릭터도 모이지 않았는데 그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암울한 상황인 건 맞지만, 앉아서 죽는 날만 기다릴 순 없다.
또한 변종이 교내에 있다는 증거도 확실하지 않으니,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다.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나한테 계획이 있어.”
“계획?”
“안전가옥이랑 메인 캐릭터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장소를 알아.”
설여원은 두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라스트아크 플레이어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난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학생회관에 일행이 있어. 같이 가자.”
“학생회관?”
설여원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슬쩍 거리를 두며 내게 물었다.
“너 기숙사에서 왔다며. 그런데 학생회관에 일행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동기들도 예전에 같이 라스트아크 했거든. 안개 퍼지기 전날에 동아리방에서 시험공부 한다고 했어.”
“……거짓말 아니지?”
“싫으면 따로 행동하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설여원은 다짜고짜 내 옷소매를 잡았다.
뒤이어 헛기침을 하며 내게 얘기했다.
“나도…… 같이 가.”
* * *
가방에 넣어온 식량으로 설여원과 배를 채웠다.
이것저것 많이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들어간 게 없었다.
든든히 먹으면 두 끼 정도 먹을 수 있을까?
골뱅이와 과자, 통조림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설여원과 마주 앉아 학생회관으로 향하는 최적의 길을 생각했다.
설여원은 안경을 쓰며 구석에 놓인 지도를 펼쳤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여원에게 물었다.
“너 안경 써?”
“어? 어.”
“그럼 진즉에 쓰지, 왜 안 쓰고 있었어.”
“시력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0.7 정도.”
안경을 쓰느냐 마느냐의 경계였다.
웬만하면 안경을 쓰고 다니라고 하자, 설여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옷소매에 안경알을 닦았다.
안개 속에서 안경을 쓰면 불편해서 그런가?
가만히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혼자 있을 때는…… 보기 싫은 걸 억지로 볼 필요 없으니까.”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마당에,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좀비를 외면해?
뭐, 혼자라는 생각에 삶을 비관적으로 보는 건 이해한다.
괜히 얘기해 봐야 잔소리로 느낄 것 같아서, 차라리 함묵하기로 했다.
설여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들고 온 지도를 펼쳤다.
학교 전도.
프린터로 뽑은 게 아니라, 손수 그린 지도였다.
“네가 그린 거야?”
“좀비가 많은 지역을 표시하려면 지도가 있어야 될 것 같아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공대, 자연대, 미대, 음대, 경상대, 인문대, 사과대 등, 모든 건물과 지형을 꼼꼼하게 그린 지도였다.
설여원의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기 동그라미로 표시한 지역은 뭐야?”
“좀비들이 많은 지역.”
“동그라미가 많을수록 좀비도 많은 거야?”
“10마리에 동그라미 하나. 10마리 미만이면 세모.”
지도를 만든 것도 대단한데, 직접 좀비들의 숫자를 파악하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표기했다.
교내의 모든 지역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기숙사와 음대, 미대, 자연대의 좀비들은 표기되어 있었다.
고작 보름이 조금 지난 시점인데, 이렇게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설여원이 달라 보였다.
설여원은 지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학생회관의 위치와 현재 위치를 사선으로 그으며 얘기했다.
“곧장 가로질러도 족히 800m는 돼.”
“가는 길에 중앙 광장이랑 도서관이 있으니 가로지르는 건 자살행위야.”
중앙 광장과 도서관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좀비들의 숫자를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도서관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서관 정문에 위치한 중앙 광장은 공부에 지친 학생들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로 붐비는 장소였다.
기숙사 다음으로 좀비들이 밀집된 지역일 것이다.
난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얘기했다.
“공대는 확인 못 한 거지?”
“이쪽에서 공대로 들어가는 길이 하나뿐이라서 위험부담이 많아.”
현재 우리의 위치는 자연대, 자연대에서 공대로 들어가는 길은 중앙대로로 이동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길이 하나뿐이라서 변수가 나타났을 때 타개책이 없다.
공대는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겠다.
게다가 시험 기간의 공대생들은 과실에서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미대만큼 좀비가 많으리라 예상된다.
설여원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볼펜으로 지도의 한 점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교양관 건물을 지나가는 건 어때?”
“거기도 중앙 광장 바로 옆이라서 위험해.”
“그럼 본관 쪽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거네.”
“그렇지. 본관 앞은 로터리라서 좀비들도 별로 없을 거야.”
“본관은 음대랑 가까운데, 괜찮겠어?”
“본관이랑 음대 사이의 중앙도로는 6차선이야. 좀비들의 시계가 그렇게 길지는 않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좀비들의 시계는 대략 20m.
중앙도로는 6차선에 달하고, 인도와 각 건물의 조경까지 생각하면 충분히 시야를 벗어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손목시계를 살피며 얘기했다.
“오후 4시 30분이니까,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3시간 정도.”
“3시간? 무슨 3시간.”
“해 떨어지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가브리엘의 능력도 안개 속에서 잘 보이는 거지, 어둠 속에서 잘 보이는 건 아니잖아.”
설여원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가 사라진 세상은 암흑 그 자체였다.
월광이 흐린 날이면 코앞의 물체도 인지하기 어려웠으니까.
뒤이어 설여원은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아 참, 가는 길에 미대 식당 확인하고 가는 건 어때?”
“미대 식당? 방금 미대에서 달려온 좀비들 봤잖아. 위험해.”
“나도 미대 식당은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네 덕에 길이 열렸어.”
눈꼬리를 치켜뜨며 쳐다보자, 설여원은 다시금 지도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네가 지나온 길은 미대 샛길이잖아? 미대 식당은 중앙도로 쪽이라서 샛길이랑 200m 정도 떨어져 있어.”
“좀비들이 샛길에 뭉쳐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식당을 확인하자는 거야?”
“응,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식량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을 가능성이 없잖아. 전력은 예전에 끊겼는데.”
“미대 식당은 달라. 최근에 리모델링한 건물이라서 옥상에 태양광 패널 설치되어 있어.”
설여원의 말을 듣고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자연대에서 대로를 건너면 중앙 광장과 맞닿은 종합강의동 건물이 나온다.
중앙 광장 근처는 좀비들이 바글거리는 것으로 확인됐으니, 길을 건너려면 음대와 미대 사이에서 건너는 게 맞다.
결국 미대 식당까지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니, 이동하면서 슬쩍 확인하는 것도 괜찮겠다.
“좋아, 식당만 확인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거야.”
설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움직일 채비에 나섰다.
소심한 것 같으면서 할 건 다하는 여자.
이성과 감성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고 해야 좋을까?
괜찮은 아군이 생겼다.
* * *
플라워디자인과 건물의 뒷문으로 나온 뒤, 주변을 경계하며 건물 외곽을 따라 이동했다.
안개 때문에 확보된 시야는 5m가 한계.
미대 식당까지 대략 300m.
시야 확보가 가능한 설여원을 앞세워 미대 식당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얼마나 이동했을까.
앞서가던 설여원이 손바닥을 들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걸음을 멈추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설여원은 정면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50m 앞에 네 마리 있어. 어떻게 할래?”
“근처에 다른 좀비는?”
“없는 거 같아.”
“뚫자.”
“뚜, 뚫어?”
난 쇠파이프를 말아쥐며 훅, 하고 숨을 뱉었다.
다섯 마리만 더 죽이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다수의 좀비가 뭉쳐 있는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머릿수를 줄이는 게 이롭다.
하지만 설여원의 손이 잔잔하게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긴장한 건가?
지금까지 좀비와 접점을 줄이고 최대한 회피하며 이동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난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까, 옆에서 달려드는 놈만 잡아줘.”
설여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에 멍키스패너를, 오른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설여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커다란 조형물이 나타난 순간, 귓가를 스치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조형물 앞에 모여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이곳을 돌아봤다.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켜며, 바로 앞에 있는 좀비의 안면에 쇠파이프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