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화
숨기는 게 있으니 거짓말을 했겠지.
창고에서 나온 남자는 계산대의 남자를 쳐다보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진정해. 저 친구가 당황해서 말실수한 것 같은데, 우리 대화로 풀자고.”
“무슨 말실수.”
“제 딴에 의리 지킨다고 혼자라고 얘기한 거야. 물론 보는 바와 같이 둘이고.”
둘이라는 말도 못 믿겠다.
난 두 사람을 경계하며 가방을 열었다.
통조림과 과자, 음료수 등을 쓸어 담으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창고에서 나온 남자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누구 마음대로 가져가래?”
“내 마음대로.”
“야, 말로 하자니까.”
“말로 하고 있잖아.”
가방이 빵빵해지도록 물건을 쓸어 담고, 입구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창고에서 나온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너, 그 문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근처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생존자는 저 둘, 혹은 창고에 몇 놈이 더 숨어 있겠지.
저들에게 무기는 없고, 입구는 사람 한 명이 오갈 수 있는 비좁은 크기였다.
각오만 다지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난 쇠파이프를 고쳐 쥐며 얘기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은신처 몰라도 돼?”
은신처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기숙사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
내가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가방에 넣은 물건 내려놔. 그럼 알려줄게.”
이들이 정말 생존자를 위하는 놈들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생존자들의 아지트를 함부로 얘기할 수 없으니 계산대에 있던 남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챙긴 식량을 돌려받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솔깃한 이야기인 건 맞지만, 날 너무 쉽게 봤다.
난 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굳이 알아야 되나?”
“……뭐?”
“생존자들의 위치가 식량보다 중요할 것 같아?”
“혼자 살아남겠다고? 밖에 좀비들 못 봤어?”
“남이사.”
내겐 학생회관이라는 목적지가 있다.
기숙사 어딘가에 생존자가 있든 말든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보름 전, 내가 라스트아크를 클리어하던 날.
동기들은 분명 동아리방에 모여서 기말고사 준비를 한다고 했다.
내게도 기숙사에 있지 말고 동아리방으로 오라고 했으니, 지금도 동아리방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기숙사에 생존자가 있든 말든, 내 관심 밖이다.
게다가 대장 좀비가 나타난 이상, 기숙사에 남는 건 시한폭탄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매점에 있는 남자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은신처가 어딘지 몰라도, 만약 기숙사 단지 내에 있다면 빨리 떠나.”
충고만 건네고 떠나려고 했는데, 창고에서 나온 남자가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 얼굴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 플레이어냐?”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싱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플레이어면 진즉에 얘기를 하지. 서로 시간만 버렸잖아.”
“…….”
“같이 가자.”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미소에서 어딘지 모를 음흉함이 엿보였다.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우리 쪽에도 있거든. 플레이어.”
“……넌 직업이 뭐야.”
“나? 난 평범한 생존자.”
“일행의 능력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안개 속에서 잘 보인다고 했어.”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면 가브리엘.
가브리엘이 있다면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이 훨씬 안정적일 것이다.
잠시나마 고민에 잠기자, 창고에 있던 남자가 내 곁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얘기했다.
“게다가 안개 속에서 잘 보는 애 여자야. 예뻐.”
“가까이 오지 마.”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남자를 노려보자,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아직도 못 믿는 거야?”
혹하는 건 맞지만, 플레이어가 있다고 해서 신뢰감이 쌓이는 건 아니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구심이 남았다.
이들은 식량을 구하러 나온 것 같은데, 시야 확보가 가능한 가브리엘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안정적인 길을 뚫어놨다고 해도, 안개 속의 좀비들은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니까.
주변의 모든 좀비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이를 모를 턱이 없다.
게다가 가브리엘이 있으면 대장 좀비의 존재를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기숙사에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남자의 음흉한 표정이…… 나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구심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왼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메며 얘기했다.
“못 믿어.”
짧게 대답하고 매점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개 속에서 저렇게 소리치다니.
역시 믿을 놈이 못 된다.
식당 입구에서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남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지도 못하고, 몇 차례 외침 끝에 날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생존자들의 은신처로 가서 가브리엘만 데려오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누가 플레이어인지 모를뿐더러, 나를 따라올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고 이대로 학생회관까지.
딸랑딸랑딸랑!
그 순간, 매점 쪽에서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점 유리문에 부착된 풍경 소리.
바람에 흔들린 게 아니라, 고의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크어어어어어어!!
뒤이어 좀비들의 발소리와 함께 고막을 찌르는 포효가 들려왔다.
풍경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소리를 들은 좀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마 좀비들을 이용해서 내 발목을 잡으려고?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좀비는 인간의 먹을거리를 탐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을 탐닉하는 존재.
좀비들에게 나를 던지고, 나중에 가방만 챙기려는 속셈이다.
“미친 새끼들…….”
매점을 노려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크어어어어어!!
저 멀리 조리실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식당에 있던 좀비들까지 달려온다면, 건물 내부에 숨는 건 불가능한 상황.
고민할 새도 없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유리문을 막아섰다.
식당 내부에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유리문을 향해 몸을 들이받았다.
전신이 들썩이는 충격에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유리문을 막아선 채 생각을 반복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방향감을 상실했다.
이대로 학생회관까지 이동해?
대장 좀비도 이 소리를 들었을 텐데?
학생회관까지 좀비들을 끌고 가선 안 된다.
게다가 1㎞가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난 좌측을 돌아보며 지면에 박차를 가했다.
크어어어어어!!
식당에 있던 좀비들이 쏟아져나오고, 연못가에 있던 좀비들도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예전만큼은 안 되지만, 체교를 준비하던 당시 100m를 11초대에 들어왔다.
한 손에는 쇠파이프, 또 다른 손에는 멍키스패너, 등에는 잔뜩 부푼 가방을 메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계는 짧고,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럴 때마다 허벅지에 힘을 더하며 이 악물고 뛰었다.
카하악!
옆에서 기다란 팔이 안개를 뚫고 날아들었다.
놈을 저지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기에, 재빨리 잔걸음을 치며 날아드는 손길을 회피했다.
곧 지면에 그려진 주차장 선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왔다.
기숙사 단지 바로 앞에 위치한 조소관과 음대 건물.
그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주차장.
새벽 시간에 안개가 퍼졌기에, 기숙사 학생들의 차량이 즐비한 상태였다.
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쇠파이프로 정차된 차량을 긁으며 달렸다.
제발 한 대만 걸려라.
빠앙! 빠앙! 빠앙! 빠앙!
오래 지나지 않아 기다렸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열치열이란 말처럼, 소음은 소음으로 다스리면 그만.
계속해서 달리며 슬쩍 뒤를 돌아보자, 뒤쫓아오던 좀비들은 차량에 달라붙는 모습을 보였다.
얼추 꼬리를 잘랐으니 이대로 학생회관까지 이동하면…….
크르르르르…….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미대 뒷길을 막아선 좀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퍼진 건 기말고사 기간.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미대에서 밤잠을 설치던 학생들이 모조리 좀비로 변했다.
내가 안개 속에서 좀비를 목격했다는 건, 놈들의 시야에도 내가 포착된다는 뜻.
새까만 인영으로 가득 찬 뒷길에서, 일제히 이곳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찰나의 침묵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급히 걸음을 멈추며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뒷길에 들어찬 좀비들이 일제히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쓰러지다시피 방향을 틀어 미대 건물의 좌측 샛길로 향했다.
학생들은 이용하지 않는 비포장도로.
눅눅한 안개로 인해 흙길은 진흙처럼 끈적였다.
얼굴에 튀는 진흙을 닦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달렸다.
크어어어어어어!!
건물 내부에서도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을 찌르는 자동차 경적과 골이 울리는 좀비들의 포효로 인해, 근방의 모든 좀비가 자극받았다.
챙그랑!!
뒤이어 2층 유리가 깨지며 좀비들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꺾이고, 머리가 뒤틀리는 좀비들.
그런 와중에도 숨이 붙은 놈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목젖을 갈았다.
앞은 으깨진 좀비들이, 배후는 쫓아오는 좀비들이.
어떻게 빠져나가야 좋을지 모르겠다.
살아나갈 방법이 없는 건가?
우측은 건물에 막혀 있고, 좌측은 가파른 절벽이 위치한다.
절벽.
‘저기로 가?’
사람이 당황하면 올바른 사고가 안 된다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외국의 쌍둥이 타워 테러가 발생했던 당시,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고 한다.
본인이 고층 건물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떠오른 방안은 결코 좋은 답안이 아니었다.
임기응변이 필요한 순간.
난 쇠파이프를 말아쥐며 정면을 응시했다.
건물 끝에 다다르기까지 대략 40m.
지금도 계속해서 좀비들이 창밖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길이 꽉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빈사 상태에 놓인 좀비들에게 겁먹을 필요는 없지.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정면으로 달렸다.
크어어어어!!
땅을 박차고 나아가자, 다리가 부러진 좀비 하나가 두 눈을 홉뜨며 내 얼굴을 직시했다.
놈의 머리를 짓밟으며 나아갔다.
훙- 훙훙- 훙-
머리 위로 새까만 인영을 드리우며 추락하는 좀비들.
지면과 허공을 번갈아 살피며 쉬지 않고 달렸다.
퍽! 퍼벅! 퍽! 퍽!
뒤쫓아오던 좀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좀비들에게 깔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귓바퀴를 스쳤다.
놈들에게 같은 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하아아악!!
건물 끝에 다다른 찰나, 팔이 부러진 좀비가 싯누런 치아를 들이밀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은 보다 빠른 선택을 내리도록 육신에 채찍질을 가했다.
오른팔에 감아둔 1.5㎝ 두께의 공책.
인간의 치아로는 결코 뚫을 수 없다.
두 눈 부릅뜨며 팔뚝으로 좀비의 구강을 틀어막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벽면까지 밀고 나가 하관을 으깨버렸다.
좀비의 뒤통수가 깨지며 하관이 덜렁거렸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멍키스패너로 안구를 꿰뚫고, 다급히 후방을 살폈다.
얽히고설킨 좀비들이 지면을 박차고 일어나 이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움직여야 한다.
미대를 지나면 어디가 나오더라?
‘자연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쉬지 않고 달렸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덜덜 떨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릴 때도 있었고, 발목을 접질려 신음을 토하면서도 계속해서 달렸다.
멈추면 내게 남는 건 죽음뿐이니까.
크아아아악!!
자연대 주차장에 다다르자, 곳곳에 있던 좀비들이 목젖을 갈며 이곳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여기도 좀비가 있어?
분명 새벽에 안개가 퍼졌는데, 좀비들의 숫자는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아무리 발악해도, 내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의 좀비들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정차된 차량들을 엄폐물로 사용하며 발악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미대에서부터 쫓아온 좀비들이 어느새 발치까지 다다른 상태.
희뿌연 안개와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좀비들, 시선을 돌려도 똑같은 풍경.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폐.
고막을 찌르는 이명과 아찔하게 일렁이는 현기증.
짙어지는 패운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량에 기대었다.
더는 쇠파이프를 휘두를 기력도 없는데, 좀비들의 공세는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는 남은 선택지가 없다.
“씨X…….”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화르륵!!
그 순간, 좌측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으며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