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7화
지금은 대장 좀비들이 서로 언쟁하느라 내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체취라도 맡게 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일반 좀비는 안개 밖으로 나가면 따돌릴 수 있지만, 대장 좀비는 대상이 죽을 때까지 쫓아오는 놈들이니까.
저 둘을 처리하고 이동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한 놈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두 놈은 위험하다.
만약 저곳에 있는 대장 좀비들에게 수하가 있다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수하들이 몰려올 테니까.
결국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위로 올라가지 않고, 곧장 밑으로 내려갔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계단을 살피며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르르르…….
1층 복도에서 들리는 좀비의 울음소리.
안 들키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복도에 있는 좀비에게 들키면 분명 목젖을 갈며 소리치겠지.
그럼 대장 좀비에게 발각될 것이다.
아니면 대장 좀비가 심어둔 정찰병일 가능성도 있다.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떨쳐냈다.
중요한 것은 하나.
들키지 않고 살아나가는 것.
좀비의 울음소리로 보아,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대략 우측 30m 거리.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1층 화장실이 나온다.
화장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좀비와 싸울 필요가 없다.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좀비의 모습을 살폈다.
안개 때문에 좀비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리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체취를 맡지 못한 것 같은데, 방심할 수 없다.
안개 속에서는 좀비가 인간보다 월등한 시력을 자랑하니까.
고심에 잠긴 찰나, 우측 복도 끝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
그렇다면 이곳을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좌측 복도로 이동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20m 거리가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따끔따끔한 목덜미.
금방이라도 좀비가 이곳을 돌아보며 소리칠 것 같아서, 숨까지 참아가며 바퀴벌레처럼 조심스레 이동했다.
천만다행으로 좀비에게 발각되지 않고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몸을 기대고, 폐부에 들어찬 탁한 숨을 내쉬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시선을 돌려 화장실 창문을 살피자,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블라인드를 내려둔 상태였다.
블라인드를 살며시 걷어내고 바깥 상황을 살핀 순간.
“아…….”
창살.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화장실 창문에 창살이 붙어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보안.
아무리 봐도 틈 사이로 몸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졸지에 화장실에 갇힌 꼴이 되었다.
기숙사 정문은 좀비에게 발각될 거리에 있고, 화장실은 창살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하늘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얼굴이 후끈거리는 분기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까드득 이를 갈았다.
진정하자.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한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1층에 입구가 있다고 해서 1층으로 나갈 필요는 없잖아?
다시 한번 복도를 살피자,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좀비의 인영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저 멀리서 들리는 불쾌한 음성만이 좀비의 유무를 말해준다.
오는 길도 무서웠는데, 다시 나가려니 더 무섭다.
그러다 문득, 화장실 도구함이 눈에 들어왔다.
냄새나는 대걸레와 물통.
다른 방법이 없다.
살려면 무슨 짓을 못 할까.
좀비의 시각은 어찌하지 못해도, 체취라도 지워야 한다.
물통에 고인 냄새나는 물을 온몸에 묻혔다.
구석구석, 두피 사이사이까지 벅벅 긁어가며 문질렀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몸에서 역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코끝을 찌르는 시궁창 냄새에 재채기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몇 차례 심호흡을 통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내 생이 잠시 후에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두렵다고 여기에 멈춰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숙사에 갇혀 있던 보름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
더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간신히 숨만 붙어 생을 연장하는 식물인간처럼 살 수 없다.
‘할 수 있다.’
나약한 마음에 세차게 채찍질을 가하며, 발소리를 죽인 채 복도로 나섰다.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적은 언제든지 고개만 돌리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 걸음, 한 걸음, 외줄 타는 기분으로 나아갔다.
크르르르르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목젖을 가는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건가?
쏜살같이 계단으로 들어서며 벽면에 몸을 기대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터벅- 터벅-
들려오는 발소리.
좀비가 이곳으로 다가온다.
들킨 건가?
아니다.
들켰으면 소리부터 지르겠지.
좀비도 알아채지 못했으니 소리치지 않는 것이다.
체취를 지우지 않았다면 발각됐을지도 모르겠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은 급한데 발소리는 죽여야 하니, 쥐라도 된 듯이 네발로 기어서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다다르자마자 좌측 복도를 살폈다.
다행히 좀비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감을 자극하는 불쾌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층 기숙사로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기에,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화장실로 향했다.
이전처럼 이불보라도 엮어서 내려가고 싶지만, 방을 정리하려면 좀비들의 외침이 부가적으로 따라온다.
그러니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2층 화장실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의 블라인드부터 걷었다.
다행히 창살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바로 밑으로 보이는 화단에 가방을 던졌다.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오른발을 밖으로 뺐다.
지면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1분도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창틀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조심스레 지면을 살폈다.
한때 체교를 준비하던 사람이 아닌가?
낙법은 도가 텄고, 여긴 3층도 아닌 2층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면 발목과 무릎을 다칠 수도 있기에, 머릿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벽면을 차며 뛰어내렸다.
“흡!”
재빨리 방향을 틀어 지면을 살피자, 자욱한 안개만이 나를 반겼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에 두 눈을 부릅뜨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지금!’
지면에 발끝이 닿자마자 하체와 상체를 접으며 옆으로 굴렀다.
원근감을 상실한 탓에 타이밍을 살짝 놓쳤지만, 다행히 큰 탈 없이 착지할 수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살짝 얼얼하지만, 큰 지장은 없었다.
화단에 던져둔 가방부터 챙기고, 그 속에 찔러 넣어둔 쇠파이프를 뽑으며 주변을 살폈다.
좀비들의 모습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은은하게 들리는 좀비들의 음성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엄폐물도 없는 야외에 오랫동안 있을 수 없다.
주변에 좀비가 없다는 것만 파악한 뒤, 서둘러 매점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매점까지는 50m 거리.
흐릿한 시야로 인해 초조한 마음이 차오르고, 손바닥으로 땀이 고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매점을 따라 길게 늘어진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내 목젖까지 오는 낮은 높이의 담벼락.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담벼락 내부를 살피자, 다행히 좀비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빨리 담벼락을 넘은 뒤, 바로 앞으로 보이는 매점으로 향했다.
덜컹-
문이 잠겨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문이 열리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식당 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좌측으로 크게 돌아 식당과 이어진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다다르자마자 상체를 낮추고 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살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어두웠다.
전력이 끊긴 식당에 안개까지 차오른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유리문을 밀쳤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이대로 들어가도 될까?
내부에 좀비들이 있으면?
갈등하고 있는 찰나, 좌측에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쇠파이프를 치켜들자, 옆구리가 반쯤 사라진 좀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아직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처 없이 거닐다 내 근처까지 다다른 건가?
‘냄새를 못 맡아?’
썩은 물은 뒤집어쓴 덕인가?
터덜터덜 거리를 거닐던 좀비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한 박자 늦게 내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고민할 새도 없이 이 악물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관자놀이에 직격한 쇠파이프는 떵! 거리는 울림과 함께 좀비의 두개골을 함몰시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머리를 가격했다.
두개골을 곤죽으로 만든 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열댓의 인영.
어제 연못에서 쫓아오던 놈들인가?
일단 몸부터 숨겨야 하기에, 다급히 유리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섰다.
아직 식당 내부는 미개척지나 다름없기에, 식당이 있는 좌측으로 이동하지 않고 식당과 매점 사이의 헬스장으로 들어섰다.
운무가 퍼진 시각에 헬스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예상대로 헬스장은 먼지만 수북하게 쌓인 상태였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 발자국 모양이 찍혔다.
헬스장 벽면에 기대어 생수로 목부터 축이고, 매점으로 통하는 복도를 살폈다.
좀비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자욱한 안개와 캄캄한 어둠에서 오는 압박감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떨어지지 않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매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매점으로 통하는 유리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산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느끼자 털끝이 곤두섰다.
두 눈을 부릅뜨며 쇠파이프를 치켜드는 순간, 계산대에 있는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체를 동그랗게 말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벙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두 눈을 홉뜨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탐색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남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더듬었다.
“사, 사람?”
“…….”
“고, 공격하지 마요. 나도, 나도 사람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두 팔에 들어간 힘을 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야?”
그는 놀란 눈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 돌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네? 그야…… 여기 먹을 게 있으니까…….”
남자의 말을 듣고 진열대를 살피자, 벌써 절반 이상 사라진 상태였다.
매점이 원래 작긴 하지만, 혼자서 이 많은 음식을 먹었다고?
남자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피자, 굶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잘 먹었으면 턱선도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르르…….
바깥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좀비들의 시야에 포착될지도 모르기에, 나도 상체를 숙이며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어려운 질문이었나?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좌우로 눈을 굴렸다.
그 표정을 보고 정체 모를 꺼림칙함이 들었다.
왜 눈치를 보는 거지?
내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그야…… 일단 식량부터 구해야겠다 싶어서 왔죠.”
“그러니까, 어떻게 좀비들을 뚫고 왔냐고.”
“그러는 그쪽은요? 어떻게 왔어요?”
“좀비들 죽이면서 왔지.”
“저, 저도요.”
표정으로 뻔히 보이는 거짓말.
남자와 거리를 두며 재차 물었다.
“무기는.”
“무, 무기요?”
당황한다.
무기도 없이 여기까지 오는 건 말이 안 되지.
다시 한번 매점 내부를 살피며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 어디 있어.”
턱.
뒤이어 창고 쪽에서 귓바퀴를 간질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 부릅뜨며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또 다른 남자가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워워워, 잠깐, 잠깐!”
격하게 손사래 치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
난 계산대에 있는 남자와 창고에서 나온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둘 다 무기는 없지만,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내게 거짓말을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