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화
처음 장병철을 만났을 때, 고향이 같다는 걸 알고 밤이 늦도록 서울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병철과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둘 다 체육교육과를 꿈꾸었지만, 둘 다 진학하지 못했다는 것.
장병철은 어깨부상 때문이었고, 난 어깨와 발목 때문이었다.
눈물을 훔치며 유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항상 이성적이고 옳은 말만 하는 우리 재형이, 타지 생활에 적응 못하는 네가 안쓰럽다가도, 나랑 닮은 부분이 많아서 항상 챙겨주고 싶더라.]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꼭 살아서…… 내 책상에 있는 선물 좀 나 대신 우리 엄마 아빠한테 전해줘.]
조심스레 책상 서랍을 열자, 장병철의 말대로 편지와 상자가 들어 있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아들의 편지와 2개의 손목시계가 들어 있는 상자.
난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자를 꽉 쥐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 너무나 허망하게 떠났다.
내 부모님은 안전할까.
서울에도 안개가 퍼졌을 텐데.
지금껏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부의 도움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숙사에 갇혀 애처럼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구조대는 없다.
날 구해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난 까드득 이를 악물며 주먹이 부서질 듯 말아쥐었다.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다짐했다.
죽더라도 고향 땅에 묻히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에 가자고.
서울에 가서, 내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고, 장병철의 살아생전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자고.
띠링-
그 순간, 귓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년간 들었던 알림음.
그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들자, 눈앞에 표시된 홀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부모님의 안부: 난이도 S]
-클리어 보상: 아크 입장권.
-클리어 조건: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세요.
-제한 시간: 없음.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홀로그램.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익숙한 테두리, 익숙한 글자.
라스트아크의 알림창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살피자,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캐릭터의 능력이 전수됩니다.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스탯: 근력 5, 체력 5, 반사 신경 5, 동체 시력 5, 정신력 10
-좀비를 처리하여 포인트를 획득하세요.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1/20
-남은 포인트: 0
-귀하는 베타 테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에덤의 이스터에그가 발현됩니다.
※에덤의 이스터에그는 지속적인 강화를 통해 열립니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좀비로 변한 층장의 모습, 세상을 뒤덮은 자욱한 안개, 게임 제작자가 GOD로 표시된 이유, 게임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던 이유.
모든 건 사전연습, 튜토리얼이었다.
정말 신이 만든 게임일 줄이야.
이 미친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모든 과정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이다.
-메인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라스트아크: Hell 모드]
-동료들과 함께 아크에 도착하세요.
-클리어 보상: 엔딩
-클리어 조건: 보유 중인 퀘스트가 없어야 합니다.
-제한 시간: 없음
홀로그램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통해 격해진 마음을 진정시켰다.
더는 울고 불며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혼란스러운 시기지만, 이럴수록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손목시계가 들어 있는 상자를 지그시 쳐다봤다.
부모님이 계신 잠실, 그리고 장병철의 고향인 압구정.
본가에 들러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고, 그 뒤에 장병철의 유서와 손목시계를 그의 부모님께 전해드릴 것이다.
시야의 우측 상단에 노란불이 반짝였다.
게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퀘스트가 생성되거나, 게임의 새로운 정보가 뜨면 노란불이 반짝였다.
노란불에 오른손을 갖다 대자,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아크는 서울과 부산에 존재합니다.
이걸 시작부터 알려준다고?
초반에는 하나의 아크만 알려주고, 네 번째 에피소드에 들어가야 최종 아크를 알려주는 게 본래 라스트아크의 설정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게임의 엔딩을 봤던 내게 시작부터 최종 목적지를 알려주는 건 신의 패수가 될 것이다.
까드득 이를 갈며 각오를 다졌다.
‘더는 당신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아.’
현재 내 위치는 경산시.
가장 가까운 아크는 부산.
마음 같아서는 곧장 부산으로 가고 싶지만, 보유 중인 퀘스트를 모두 완료해야만 메인 퀘스트가 완료된다.
즉, 서울에 계신 부모님의 안부부터 확인해야 최종 엔딩을 볼 수 있다.
시스템창의 목록에는 플레이어 정보, 퀘스트, 클리어 목표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세상이 라스트아크의 설정대로 움직인다면,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퀘스트가 생성될 것이다.
클리어 목표를 확인하자,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첫 번째 에피소드 ‘안전가옥’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했던 플레이어를 찾으셔야 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클리어를 위한 최소 요구 플레이어 6명, 혹은 각 직업군.
역시,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주요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
레이첼, 가브리엘, 데니, 로즈, 에덤.
이렇게 다섯 명이 모이거나, 직업군이 부족하더라도 중복된 직업을 모아 6명을 맞춰야 에피소드를 클리어할 수 있다.
나처럼 라스트아크를 즐겼던 사람들이 캐릭터의 능력을 부여받은 모양이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은 조건이지만, 내겐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동아리 동기들.
라스트아크를 한 번이라도 플레이했던 사람들에게 능력이 전수된다고 하니, 나와 함께 게임을 즐겼던 동기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동기들을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능력이 부여되었다면, 나처럼 퀘스트와 에피소드를 확인했을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안전가옥은 아크로 이동하는 시발점이 되는 에피소드였다.
안전가옥을 만들어 좀비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이동수단을 마련하는 미션.
에피소드를 부여받은 동기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가 어디일까.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장소.
현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고, 물자를 확보하기 좋은 장소.
그 답을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아리방이다.
* * *
필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하나하나 챙겼다.
혹시 모르니 신문지도 집어넣고, 3m 랜선과 휴지, 옷가지, 테이프, 가위, 커터칼 등을 챙겼다.
책상에 놓인 두께 1.5㎝의 책들을 이용해 팔과 다리를 보호하고, 구석에 놓인 몽둥이를 손에 쥐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한 차례 숨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초반만 조심하자.
에덤의 약점이라면 초반에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 거니까.
유리를 가려둔 신문지를 조심스레 치우자, 복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를 거니는 2마리의 좀비.
다른 놈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복도에 있는 좀비들은 계단과 정반대 방향에 있기에, 발소리를 죽인 채 이동하면 충분히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문 앞에 놓인 신발장부터 치우고,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 차례 심호흡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게임처럼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 모든 상황은 현실이니까.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끼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씨X…….’
핏기가 가시는 기분.
복도에 있던 두 마리의 좀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크어어어어…… 카아악!
시작부터 틀어졌다.
고작 몽둥이 하나로 두 마리의 좀비를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
다급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신발장으로 입구를 봉쇄했다.
크어어어어어!!
쾅! 콰광, 쾅! 끼리릭, 쾅!
목젖을 갈며 쉴 새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좀비들.
그러자 다른 방에 있던 좀비들까지 소리를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방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 문이 부서지면 끝이다.
머릿속으로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하며 경험한 128번의 죽음이 스쳤다.
단 한 번의 기회, 단 하나의 목숨.
생각하자.
당황하지 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두려움에 떠는 건 지난 보름으로 충분하다.
더는 공포에 질려 죽는 날만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4개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불보.
다급히 이불보를 벗겨 하나의 밧줄로 엮었다.
이불보의 끝을 테라스에 단단하게 고정한 뒤, 곁눈질로 방문을 살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문.
게다가 안으로 열리는 방식이기에, 금방이라도 경첩이 뜯어질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난간 너머로 이동했다.
이불보를 꽉 쥐고 천천히,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이동했다.
신중해야 한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기에, 급하다고 무리하다간 추락할 게 뻔하다.
덜덜 떨리는 사지와 시작부터 당겨오는 근육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름 동안 영양공급도 불균형했고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바로 밑의 301호에 다다르자, 테라스 유리문 너머로 좀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어어어, 카아악!
301호에 있던 좀비들이 나를 발견했다.
놈들이 유리를 깨고 나오면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물어뜯기겠지.
마음이 급해지자 두 다리를 허둥대게 되었다.
이불보를 두 다리와 두 팔로 고정하며 내려가야 하는데, 다리가 허둥거리자 모든 무게가 팔로 전달되었다.
불끈 솟은 힘줄과 달리, 팔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긴장감 때문이었다.
쾅!!
뒤이어 4층에서 둔탁한 탁음과 함께 테라스로 나오는 좀비 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방문을 부순 건가?
놈들은 테라스까지 달려나와 4층 난간에 몸을 맡긴 채, 나를 내려다보며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난간에서 듣기 거북한 파찰음이 들려왔다.
수십 마리의 좀비가 있는 힘껏 힘을 가하자, 난간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랗게 이어진 이불보가 세차게 흔들린다.
난 고목에 매달린 매미처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챙그랑!
크어어어어!!
그와 동시에 3층의 유리문이 깨지며 좀비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코앞으로 다가온 위협에 반사적으로 두 팔에 힘이 빠졌다.
훙-
3층의 좀비들이 내 머리를 잡으려는 순간, 간발의 차로 회피할 수 있었다.
회피?
보고 피한 게 아니다.
추락하면서 자동으로 피해진 거지.
떨어지는 와중에 다급히 이불보를 붙잡자, 손바닥이 쓸리며 뜨거운 마찰열이 느껴졌다.
“크으윽!”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까드득 이를 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3층의 좀비들은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내밀며 나를 잡기 위해 두 팔을 버둥거렸다.
난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한 놈이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이불보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서서히 손을 뻗기 시작했다.
텁.
이불보를 잡은 좀비는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놔, 그거 놔 이 새꺄!”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이불보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불보를 잡은 좀비는 무슨 재미난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놈이 팔을 접을 때마다 20㎝씩 위로 올라간다.
평범한 좀비라면 다른 놈들처럼 허우적거려야 정상인데, 설마 사고기능이 존재하는 건가?
그럴 리가. 사고기능이 존재하는 좀비는 안전가옥에 들어선 뒤에 나오는 설정이다.
혹시 난이도가 달라져서 그런가?
좀비들의 진화속도가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살기 위해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방법뿐이었다.
“어? 어어?”
버둥거리며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이불보의 끝에 도달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고, 위에는 살점을 탐하는 좀비들이 이불보를 잡아당긴다.
불안한 마음, 떨리는 사지, 피할 수 없는 압박감.
그러다 문득, 바로 앞의 2층 테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 최선의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만을 피해 가는 거지.
난 앞뒤로 몸을 흔들며 있는 힘껏 2층 테라스로 뛰어들었다.
퍽!
2층 테라스 유리를 이마로 받았지만, 천만다행으로 테라스에 착지할 수 있었다.
떵!!
뒤이어 난간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위에 있던 좀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3층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좀비들은 4층에서 추락하는 좀비들에게 부딪혀 목이 부러지거나, 같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2층 테라스 유리문에 등을 맞대고 추락하는 놈들을 응시했다.
거꾸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를 노려보는 눈빛.
등골을 더듬는 오한에 몸서리치게 되고, 하나의 벽처럼 느껴지는 좀비 무리의 모습에 털끝이 곤두섰다.
탕! 팡! 팍! 쩌덕! 퍽!
뒤이어 소름 돋는 파열음이 지면에서부터 들려왔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소리.
사람의 육체가 터지고 일그러지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덜덜 떨리는 두 팔에 힘을 주며, 이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기도했다.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