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화
프롤로그
-미션 클리어
“드디어!”
20살 여름에 시작해서 21살 여름이 될 때까지, 무려 1년을 투자한 게임.
라스트아크.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로그라이크 게임 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좀비 게임이었다.
웬만한 좀비 게임은 다 해봤지만, 이렇게 혐오스러운 게임은 처음이었다.
뒤로 갈수록 좀비들과 변종의 공세가 강해지고, 별 해괴망측한 괴물들이 나왔다.
좀비 게임인지, 괴수물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라스트아크는 체크포인트 시스템도 없기에,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타임 어택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인들마저 혀를 두르며 포기한 게임.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박재형 아닌가!
무수한 플레이 끝에 게임 발매 1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플레이어: 박재형
-캐릭터: 에덤 화이트
엔딩 영상이 시작되자, 게임의 주요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총 다섯 명의 주인공.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한 가브리엘, 힐링이 가능한 레이첼, 독심술이 가능한 데니, 모든 장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로즈.
그리고 쓰레기라 불리는 에덤.
모두가 쓰레기라고 부를 때, 난 에덤만 고집했다.
일정 숫자의 좀비를 처리하면 에덤에게 지급되는 신체 강화권.
“이게 모순이지.”
게임의 본질은 좀비로부터의 생존.
생존이라 하면 신체 능력이 뛰어날수록 유리한 법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무기 의존도가 강하기에,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에덤은 시작이 미치도록 어려워서 그렇지, 안정적인 궤도까지 죽지 않고 성장한다면 최강의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에덤을 안정적인 궤도까지 성장시키는 데 128번의 죽음이 뒤따랐고,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팔짱을 낀 채 게임의 엔딩 영상을 관람했다.
아크로 들어서는 다섯 명의 주인공을 끝으로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클리어에 정신이 팔려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영상은 건너뛰고, 세세한 스토리도 스킵했다.
때문에 내가 아는 게임의 설정은 퀘스트를 통해 알게 된 게 전부였다.
정체불명의 안개가 세상을 뒤덮었고, 안개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되어 좀비가 나타났다는 설정.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는 생존자들은 ‘아크’라는 안전지대로 대피하기 위해 이동하고, 그중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가브리엘, 레이첼, 데니, 로즈, 에덤의 이야기를 그린 게임이었다.
“이거 만든 놈은 제정신 아닐 거야.”
처음엔 1인 제작 게임이라서 우습게 생각했는데, 놀라운 디테일을 자랑했다.
캐릭터의 근력과 체력, 감정, 정신력, 피로도 등에 따라 그날의 능력치가 달라졌다.
살아남기도 급급한 세상에서 영양 섭취도 골고루 해줘야 하고, 울적해지지 않도록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미니게임도 해줘야 했다.
또한 그놈의 감기는 어찌나 쉽게 걸리는지, 감기에 걸려서 개복치처럼 죽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밸런스가 파괴되면 캐릭터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컨트롤이 되지 않거나, 동료를 살해하거나, 자결을 선택했다.
-제작자: GOD
영상의 끝에 제작자의 이름이 올라왔다.
이름이 신이라니.
게임의 디테일이 뛰어난 건 인정하지만, 자화자찬이 지나치다.
라스트아크의 한국인 유저는 대략 90만 명.
게임이 발매된 초기에는 많은 사람이 즐겼지만, 극악의 난이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진즉에 포기하고 다른 게임으로 갈아탔다.
나처럼 죽기 전에 엔딩 한번 보겠다는 사람들만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하는, 한 마디로 썩은 물의 게임으로 전락했다.
라스트아크 인벤에 들어가면 3개월 전에 올라온 글이 마지막일 정도로.
“1년 동안 함께해서 즐거웠고, 함께해서 더러웠다.”
이 게임에 대한 한 줄 평이었다.
후련하면서도 아쉽다.
뭐, 전 세계에서 단 한 명도 클리어하지 못한 게임의 엔딩을 봤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둑한 기숙사 4인실.
4학년 맏형은 일찍이 잠들었고, 3학년 형님과 신입생은 외박 신청을 하고 PC방에 갔다.
내일은 9시 수업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자야겠다.
침대에 누워 내일 일정을 떠올렸다.
사실 일정이랄 것도 없다.
9시 수업과 15시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방에서 기말고사 준비하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난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치지직- 치직-
아무것도 모른 채.
치직- 치지직-
지금의 흐뭇한 마음이 절망으로 변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픽!
-모든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베타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게임을 재시작합니다.
-난이도를 재설정합니다.
-새로운 난이도: Hell
-첫 번째 에피소드: 안전가옥
얼마나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주변을 살피자, 창밖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맡에 앉아 있는 4학년 맏형.
“벼, 병철이 형? 여기서 뭐 하는…….”
“쉿.”
장병철은 다짜고짜 내 입을 막았다.
눈에 들어오는 병철의 목 부분만 누렇게 변한 녹색 셔츠.
저 옷은 언제쯤 갈아입을 생각인지…….
장병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거어어어…… 커걱!
복도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벽에 누가 시끄럽게 울어.
눈꼬리를 치켜뜨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팔을 붙잡는 장병철의 손길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마.”
“층장한테 가서 말만 하고 올게요.”
“됐으니까 앉아 있으라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병철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저거 층장이 내는 소리야.”
“예? 그럼 사감 선생님한테 얘기해야죠. 층장이란 사람이 이 야밤에 소란을…….”
“하…… 따라와.”
장병철은 내 팔을 잡고 방문 앞으로 향했다.
방문의 상단에 있는 유리창으로 복도를 살폈다.
그리고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을 보았다.
층장이 피를 흘리고 있다.
바닥에 주저앉아 본인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양손에 묻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방문을 열려고 하자, 장병철은 다급히 나를 막아서며 내 팔을 꺾었다.
경찰행정학과여서인지 아니면 예전에 유도를 배웠던 탓인지, 제압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어깨와 손목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 씨…… 형, 갑자기 팔을.”
“쉿.”
장병철은 곁눈질로 방문을 쳐다보며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컥- 커걱- 카악.
복도를 울리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피에 젖은 발로 차디찬 복도를 내딛는 소리.
덩달아 마른침을 삼키며 장병철에게 물었다.
“형, 일단 119에 전화부터 하죠.”
“안 받아.”
“네?”
“따라와.”
장병철은 내 팔을 잡고 테라스로 향했다.
“봐봐.”
장병철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자, 자욱한 안개가 천지에 깔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지방에 있는 고도가 높은 동네였다.
때문에 새벽만 되면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웠다.
평소보다 지나칠 정도로 짙은 안개에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절초풍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게 어때서요?”
“지금 복도에 있는 층장, 아까 1층에서 담배 태우고 들어온 뒤로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도 몰라. 처음엔 당황해서 층장한테 괜찮냐고 물었어. 그런데 갑자기…….”
장병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뒤이어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글자를 내게 보여주었다.
통화권 이탈.
연락할 수단이 없어졌다.
책상 위에 올려둔 내 휴대폰을 확인하자,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있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통화권 이탈이라니.
당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장병철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고의로 차단한 거야. 갑자기 이럴 수는 없어.”
“통신국 전력을 차단할 수가 있어요? 아니, 아까는 119에 전화했다면서요.”
“그게 마지막이었어. 1시간 전부터 계속 이런 상태라고.”
“뉴스, 뉴스 나온 거 없어요?”
“1시간 전에 안전 안내문자 온 뒤로 아무 소식도 없어.”
“안내문자 내용은 뭐였어요?”
“정체불명의 안개가 퍼졌고,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밖에 없었어.”
정체불명의 안개?
문득, 잠들기 전에 했던 라스트아크의 설정이 떠올랐다.
꼭…… 라스트아크의 설정 같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층장은 어떡해요. 저대로 내버려 두면 죽어요.”
장병철은 마른세수를 하며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뒤이어 고심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일지도 몰라.”
“예?”
“아까 옆방에 있던 애랑 같이 층장을 챙겼어. 그런데 층장이 갑자기 걔를 공격했어.”
“에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콧방귀를 뀌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장병철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층장이 옆방에 있던 남자애 팔을 씹었어. 살이 떨어질 정도로 깨물었다고. 그게 맨정신으로 가능할 거 같아?”
장병철의 눈빛에 혼란스러운 마음이 엿보였다.
그의 떨리는 두 팔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장병철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이런 장면 많이 보지 않았어?”
“혹시…… 조, 좀비?”
장병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말을 믿으라고?
뜬금없이 나타난 안개 때문에 사람이 좀비로 변해?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난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물었다.
“그게 말이 돼요? 그럼 팔을 물린 사람도 좀비로 변하게?”
“변했어.”
“……네?”
“걔, 층장한테 물리고 20분 정도 지나니까 층장처럼 변했다고.”
변했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난 붕어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며 물었다.
“그,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몰라 젠장, 갑자기 달려들기에 휴게실로 밀어 넣었어.”
장병철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자, 장병철은 그 자리에서 속옷만 남기고 전부 탈의했다.
“봐. 난 멀쩡해. 안 물렸어.”
“…….”
“지금 상황을 아는 사람은 너랑 나뿐이야.”
새벽 4시.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
1층과 2층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고, 이곳에는 마땅한 무기도 없다.
아니, 무기가 있어도 복도에 있는 층장을 공격할 수 있을까?
좀비 같은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 거라면?
병든 사람을 이유 없이 때려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심란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만 나왔다.
머리를 긁적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장병철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단 형은 여기 있어요.”
“왜, 뭐 어쩌려고.”
“제가 나가서 한번 얘기해 볼게요.”
“못 봤어?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못 믿는 거야? 저 밖에 있는 새끼 이미 사람 아니라고.”
장병철은 목소리를 낮춘 채 눈살을 찌푸렸다.
병철이 형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 움직이잖아요. 움직이는 사람이 죽었다는 게 말이 돼요?”
“층장 옷 못 봤어? 사람이 저렇게 피를 토하고 움직이는 게 가능할 거 같아? 그리고 목소리도 이미 맛이 갔잖아.”
“…….”
“사람이 피를 그만큼이나 토할 정도면 이미 폐부터 맛이 갔다는 거야. 혼자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던 장병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안 저러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니 그냥 여기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방에는 식량도 식수도 없다.
여기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오지 않으면?
1시간 전에 119를 불렀는데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건 119도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도 저 밖에 있는 층장처럼 변했다는 뜻이 아닐까?
차라리 사람들이 잠에 취한 지금이, 아직 아비규환에 빠지지 않은 지금이, 식량이라도 갖출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1층은 안개 때문에 내려갈 수 없으니, 화장실에서 식수를 퍼오고 휴게실에 구비해 둔 과자나 핫바 등을 챙겨야…….
‘아, 아까 휴게실에 넣었다고 그랬지.’
옆방에 있던 남자가 층장에게 물렸고, 장병철은 그놈을 휴게실에 넣었다고 했다.
난 방 안을 둘러보며 휘두를 만한 무기가 없는지 살폈다.
구석에 놓인 빗자루.
하단부를 뜯어내고, 단단한 몽둥이만 남도록 만들었다.
대략 1m 정도 길이의 나무 몽둥이가 생겼다.
손잡이를 말아쥐며 장병철에게 얘기했다.
“형은 여기 있어요.”
“진짜 나가려고?”
“아무것도 안 먹고 버틸 거예요? 화장실 가서 물이라도 떠 와야죠.”
훅, 하고 숨을 내뱉으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장병철을 쳐다보자, 그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쓸 만한 무기를 찾아 나섰다.
3학년 룸메이트 형이 과제 때문에 대량으로 들고 온 신문지가 한쪽 벽에 쌓여 있었다.
장병철은 신문지를 돌돌 말아 몽둥이를 만들었다.
“그걸 지금 무기라고…….”
“너 신문지에 안 맞아봤지?”
“…….”
“맞아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저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니,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뭐라도 들고 있는 게 심적으로 편하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크르르르르…….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층장의 위치부터 살폈다.
저 멀리, 바닥에 앉아 있던 층장이 고개를 비틀며 이곳을 쳐다봤다.
층장과의 거리는 대략 5m.
기이하게 꺾이는 허리와 어깨, 머리의 움직임이 영화 속의 좀비와 흡사했다.
잠깐, 저렇게 생긴 좀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라스트아크의 좀비들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나?
붉게 충혈된 안구, 흐느적거리는 사지, 푸르죽죽한 피부.
무언가를 벅벅 긁었는지, 손톱도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사람 맞아?
약에 취해도 저렇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소리에 반응하는 건가?’
층장은 방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청각이 살아 있다는 뜻.
마른침을 삼키며 층장을 쳐다보자,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포효와 함께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크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방문을 닫아버렸다.
뒤에 있던 장병철은 내 어깨에 부딪혀 뒤로 밀려나며 외쳤다.
“야 인마! 갑자기 닫으면 어떡해?”
“저, 저거 미친놈 같은데 형?”
“내가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새꺄!”
쾅! 쾅! 드득, 쾅!
층장은 광기에 휩싸인 들짐승처럼 401호 방문을 향해 머리를 박고 주먹질을 가했다.
곧이어 덜렁거리던 손톱이 방문에 긁혀 떨어져 나갔다.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혹감?
아니, 살면서 몇 번 느껴보지 못할 공포였다.
충혈된 안구에 담긴 살기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고, 방문을 긁을 때마다 들려오는 거북한 소리에 털끝까지 곤두섰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가?
방문의 유리창이 깨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기로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어질어질한 상황에 몸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층장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대체 어떻게?
두려움과 공포에 점철된 나머지, 온몸이 덜덜 떨리고 점차 힘이 빠졌다.
그러다 문득, 허리춤 높이의 문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문고리를 돌리면 열리는데, 그런 사고까지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층장은 이성을 상실하고, 광기와 폭력성만을 지니고 있어 보였다.
덜컥.
뒤이어 맞은편 방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사람은 비몽사몽 간에 층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요.”
크어어어어!
“저기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
뒤늦게 층장의 옷에 묻은 혈흔을 발견했는지,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방문의 상단에 유리창을 통해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크르르르…….
층장이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 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재빠르게 방문을 닫았다.
쾅!
크어어어어!!!
층장은 포효를 내지르며 401호와 맞은편 410호의 방문을 번갈아 들이받기 시작했다.
“씨, 씨X! 저거 미친 새끼 아니야!”
맞은편 방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고함이 들려왔다.
뒤이어 자고 있던 룸메이트들이 일어났는지, 410호의 유리로 4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나처럼 당황한 모습.
뒤이어 몇몇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이더니, 신호가 안 터진다고 소리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덜컥- 덜컥- 덜컥-
“아 뭐야 진짜.”
“거기요! 조용히 좀 합시다!”
“취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소란을 듣고 일어난 사람들이 너도나도 방문을 열고 층장에게 외쳤다.
크어어어어!!
하지만 층장의 포효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뒤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의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방음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들릴 줄이야.
겁에 질려서 나오는 욕설이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장병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제 어쩔 거야 인마!”
“네?”
“사람들 다 깼잖아!”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잘 된 건가? 아닌가?
사람들이 깨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자고 있던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일단 층장부터 처리해야 뭐든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야!”
그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에 바짝 다가가 소리의 근원지를 살피자, 우리 기숙사의 헬스 중독자로 유명한 407호 학생이 팬티만 입고 층장에게 소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