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83화 (283/285)

제283화. 결자해지 (1)

이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차원이 존재하며,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 신들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유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지구의 신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너희들이 있을 곳은 없다.

전쟁에서 패배한 지구의 신들은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신계’를 빼앗겼다.

-너희들의 힘도 빼앗겠다.

전쟁에서 패배한 지구의 신들은 영토와 힘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저주를 받았다.

오갈 데 없고 힘마저 빼앗긴 신들은,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 내려와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대지유신들이었다.

-우리가 패배한 것은 전신(戰神), 장무극 때문이오.

지구의 신들은 패배의 원인을 전신, 장무극의 탓으로 돌렸다.

아니, 위험하고 치열한 전투마다 선봉을 섰던 장무극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다.

-전장을 지배하는 신이 멋대로 결혼해 가정을 꾸리다니!

전장의 신은 가차 없이 적을 베어내는 잔혹하고 패도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요계의 여왕과 멋대로 결혼해 가정을 꾸린 장무극. 그는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저주는 내가 모두 감당하겠소.

장무극은 스스로 신들에게 내려진 저주의 대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상계신들마저 쉽게 출입할 수 없는 심연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이게 왜 아빠 탓이야!

장무극의 결정에 그의 딸, 장채원은 그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분노했다.

요계의 여왕이었던 어머니도 이번 전쟁을 돕다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젠 아무 죄 없는 아버지마저 유배를 당해야 하다니?

-증오할 거야! 저따위 신들은 모두 증오할 거라고!

장채원이 격렬히 분노하자, 장무극은 자상하게 말했다.

-너는 영지 매장을 운영하잖니. 은총을 모아 은총 꽃나무를 만들렴. 그럼 아빠가 있는 곳으로 놀러 올 수 있을 거야.

장채원은 어쩔 수 없이, 신뢰를 받아 은총을 모았다.

그리고 십 년에 한 번쯤, 은총 꽃나무를 만들어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다른 세계의 신이라…….”

모든 기억을 전수받은 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현듯 그는 도깨비 뿔을 가진 신과 면 요리 투어를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신의 정체를 물었을 때, 장채원은 ‘다른 세계의 신을 어찌 알아?’라고 말했다.

“흠.”

동원이 들려준 지식들을 음미하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점주에 관련된 사항은 모두 진실로 들렸으나, 그 외의 내용은 석연찮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세계의 신이 이쪽으로 넘어올리는 없다. 분명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주도 신이었나.”

“그렇습니다. 사정상 반요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반신에 더 가깝습니다. 아버님은 전신, 어머님은 요계를 지배하는 여왕님이셨으니까요.”

천마는 그제서야 장채원이 어째서 그토록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를 깨달았다.

최강 신과 최고 요계 여왕의 혼혈.

그녀는 태생적으로 강자라는 숙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혈통이었던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앞장서서 걷던 동원이 앞을 가리켰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앞에, 어느새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희는 이곳을 심연이라고 부릅니다.”

공간 밖으로 나온 동원이 눈앞에 보이는 도시를 가리켰다.

심연.

감옥이라길래 지옥을 연상케 하는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도시는 텅 비어 있어, 멸망한 세계처럼 황량하고 척박했다.

“왔구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장채원 앞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천마에 버금가는 큰 키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중년남성이었다.

한복을 입은 그는 몸이 불편한 듯 꾸부정하게 걷고 있지만, 두 눈엔 깊은 영화(英華)가 담겨져 있다.

장채원의 아빠이자, 패배한 신들을 대신해 저주를 모두 지고 있는 전신, 장무극이었다.

“아빠.”

꾸부정하게 걷는 장무극을 보던 장채원의 눈동자에 엷은 슬픔이 피어올랐다.

하늘이 무너져도 떠받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전신이건만.

수많은 신들이 지녀야 할 저주를 모조리 안고 있는 탓에 꾸부정하게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채원아.”

“아빠!”

장채원은 장무극에게 달려가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장무극은 빙그레 웃을 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빠의 몸에 손을 대봤자 좋을 게 없단다.”

장무극의 몸속엔 수많은 신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혈액처럼 흐르고 있다.

몸에 닿는다고 옮겨지는 건 아니지만, 장무극은 저주를 지닌 뒤로 사랑스런 딸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구나. 요즘에도 신뢰가 많은가 보지?”

“으응. 그냥.”

장채원이 뺨을 긁으며 더듬거릴 무렵, 동원이 앞으로 나섰다.

“어르신.”

동원을 바라보던 장무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천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세계의 전신과, 무림세계의 지배자.

본래는 결코 같은 장소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런 두 존재가 서로 시선을 부딪치자 사방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장무극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무명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괜한 녀석을 데리고 왔군.”

장무극이 손을 휘젓자 천마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무명의 눈 센서가 서서히 꺼졌다.

“아빠 뭐 하는 거야? 왜 무명의 전원을 끄는 건데.”

“그럴 일이 있다.”

짧게 대답한 장무극은 다시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천마의 눈동자를 바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가려고 했더니… 알아서 찾아왔군.”

천마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대부분 잃어버렸는데도 다시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다니. 이제는 인족이 아니라, 요신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자가 없겠어.”

“이제는… 이라니? 아빠가… 천마를 알아?”

장채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총 꽃나무가 없는 이상 상계신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 심연이다.

그런데 지구에 온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천마를 장무극이 잘 알고 있다니?

“잘 알지.”

“어떻게?”

장무극이 꾸부정한 몸을 꼿꼿이 펴더니 천마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였으니까.”

쿵.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장채원은 불길한 무언가가 자신의 뒷머리를 때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장채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빠가 천마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고?”

“그래.”

장무극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순간 장무극의 몸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전력으로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린 천마와 비슷했다.

“아빠는 오랫동안 찾고 있었단다. 나와 마찬가지로 마의 씨앗을 담을 수 있는 자를.”

장무극이 손을 내밀자 먹빛으로 물든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동시에 천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건가.”

허공에 떠오른 천마가 인상을 쓰자 장무극이 덤덤히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일세.”

그리고 주먹을 꽉 쥐자 천마의 붉은 눈동자가 평범한 색채로 돌아오더니,

툭.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채원아.”

장무극은 장채원을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의 씨앗을 처리하지 못하면, 전 우주는 파멸하고 말 테니까.”

“마의 씨앗?”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장채원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급전개냐고!”

그러자 장무극은 동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채원이에게 진실을 알려주도록 하라.”

“진실? 무슨 진실을…….”

장채원의 말에 동원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넌 뭐가 또 죄송해?”

“지금까지 누님에게 알려드렸던 것들…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은 동원이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펼쳐 들자, 장채원의 머릿속에 또 다른 지식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찾아온 것은 바로 마의 씨앗 때문입니다.

지구와 한참 떨어져 있는, 머나먼 우주에서 온 다른 세계의 신들.

그들이 이곳으로 온 것은 전 우주를 멸망시킬 수 있는, 마의 씨앗을 처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마의 씨앗.

그것은 과거, 전 우주를 절반 이상 파괴했던 멸신(滅神)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놔둔다면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이 힘을 합쳐도 소멸시킬 수 없는, 멸신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멸신이 부활하기 전, 완벽히 마의 씨앗을 찾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마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찾는 것.

멸신은 그야말로 불멸의 존재지만, 필멸의 존재에 멸신을 담는다면 그것을 한꺼번에 소멸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장무극, 당신이 멸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아냈지요.

오랜 시간 끝에 그들은 지구에 머물고 있는 전신, 장무극이 마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다.

-좋소이다. 나의 희생으로 모든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하지만 마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잠시 동안 멸신에게 이성을 빼앗긴 장무극으로 인해 몇몇 상계신들과 그의 아내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비통함과 슬픔도 잠시, 멸신을 장무극에 담아낸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의 씨앗을 받아들이자 장무극마저 불멸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신의 육체에 마의 씨앗을 담으면, 멸신이 갖고 있는 불멸의 힘을 공유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아님에도 마의 씨앗을 담아낼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인가?

이제 신들은 신이 아닌 존재 중에서도 마의 씨앗을 담을 수 있는 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림에 존재하는 고금제일인, 천마가 마의 씨앗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천마라는 자는 인족이오. 마의 씨앗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마의 씨앗을 담아내기 위해선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고민 끝에 신들은 천마의 내공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고, 반극진기와 비슷한 대자연의 힘,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신력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동안, 천마라는 존재를 굳건히 잡아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장채원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빠가 이런 삶을 살아왔던 이유가, 다른 세계의 신들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마의 씨앗이라는 걸 담기 위해서였다고?”

“그렇단다.”

“그 마의 씨앗을 이제 천마에게 넘기겠다고?”

“이미 넘긴 상태다.”

장무극의 대답에 장채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천마를 죽이려고?”

장무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담한 표정을 지은 장채원이 동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동원은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대답해. 너도 지금까지 날 속이고 있었냐고!”

“누님.”

괴로운 표정을 삼킨 동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어르신께선 이 우주를 구하기 위해 사모님마저 잃고, 누님마저도 볼 수 없는 이 심연 속에서… 수십 년간 홀로 버티셨습니다.”

입술을 깨물던 동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오직 스스로를 희생하여, 전 우주의 평화를 지키려고요. 그런데 제가 어찌 그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장채원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장무극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다지만, 그동안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래. 다 좋아.”

심호흡을 삼킨 장채원이 다시 말했다.

“우주를 구하기 위해 아빠가 희생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천마가 희생해야 한다고? 아무런 죄도 없는데?”

동원과 장무극을 번갈아 바라보던 장채원의 눈동자에게 파란 불길이 일어났다.

“나는 허락 못 해.”

“누님.”

“멸신이든 뭐든 맞서야지! 힘을 합쳐 싸우면 되잖아? 왜 애꿎은 사람을 희생시키려 하는데?”

“모든 신들이 맞선 결과가, 우주 절반이 날아간 겁니다.”

“시끄러!”

전신에 푸른 불꽃을 일으킨 장채원이 버럭 소리쳤다.

“인간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존재가 무슨 신이야? 인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자들이 무슨 우주를 지키냐고!”

동원을 바라보던 장채원은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똑같아. 매일 말로는 천마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그러더니, 뒤로는 천마를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야?”

신랄한 말에 동원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를 욕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누님께서도 어르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며 이곳에 있는지는 알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간다. 한 사람의 죽음과 전 우주의 평화를 저울질한다면?

누구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척박하고 외로웠던 천마의 삶… 그 괴로움과 고단함을 알고 있는 장채원은 이 계획에 동참할 수 없었다.

“안 돼.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천마를 무작정 희생시킬 순 없어.”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가 장무극을 향해 말했다.

“아빠도 마찬가지야. 이런 일은 나랑 상의하면 됐잖아? 왜 이런 식으로 갑자기 급전개를 하는 건데?”

“네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널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장무극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원아. 이 애비를 원망하고 욕해도 좋다. 다신 보지 않아도 좋다.”

장무극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이자의 희생으로 신계와 지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 아비는 수백 번이라도 이런 짓을 할 것이다.”

우우웅.

그때 낮은 진동과 함께 천마의 몸에서 까만빛이 흘러나오더니, 장무극의 힘을 튕겨내고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어떻게…….”

장무극은 놀라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신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힘으로 의식을 봉인해 두었거늘, 그 힘을 뿌리치고 다시 의식을 되찾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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