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은총 나무, 만들어지다
각성체 연구소 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이 흘렀다.
천마는 전 세계의 각성자들을 구한 셈이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다시 퇴근 후 운공을 한다.
하지만 장채원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천마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설마 저 녀석. 스스로 못 느끼고 있는 건가?’
장채원은 응접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힐끔 바라보았다.
전과 달리 천마의 눈동자엔 감정의 색채가 엿보인다.
늘 무심하고 무감정한 모습이 아닌, 평범한 인간처럼 눈동자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점주.”
“응?”
“얼굴 뚫어지겠다.”
“아아.”
장채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낮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군.’
사실 그 역시 자신이 변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왜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단 말인가.’
때때로 서유리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온몸이 녹아드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웃음. 천마는 그 미소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 떠오르는 알 수 없는 기억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무림에서 지내왔던 기억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보냈던 미소들이…….
따르르릉.
그때 신뢰용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장채원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이어졌다.
“아, 그럼 저희가 지금 바로 방문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장채원이 앉아 있는 서랍 아래서 빛이 흘러나왔다.
신뢰를 맡은 것이다.
“천마야. 영선신(營繕神) 님의 집에 페인트 시공이 들어왔어. 삼족오 깃털로 만든 붓, 잘 갖고 있지?”
“물론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천마가 창고 안에 놓여진 상자 안에서 반짝이는 붓 하나를 들고 나왔다.
바로 삼족오 퀸으로 만든 붓이다.
“페인트는 그곳에 준비되어 있대. 주소 여기 있으니까 다녀와.”
“알겠다.”
천마는 종이를 받아들고 매장 문을 나섰다.
다행인 점은, 천마의 변화와 관계없이 인테리어 시공 기술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김찬원 없이도 어지간한 시공일은 혼자서 뚝딱 해치울 정도가 되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응.”
딸랑 소리와 함께 천마가 나가자 장채원의 눈빛이 낮게 잦아들었다.
“후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김찬원은 당분간 일을 쉰다고 했다. 고은진은 최근 개발한 던전 재료 요리, ‘나이트호크 어묵탕’이 호평을 받아 포차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당분간 일에 집중하자.”
빙그레 웃은 그녀는 다시 노트북으로 밀려 있는 견적서를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 어느덧 다시 봄이 찾아왔다.
정오 무렵, 복복 인테리어 내부.
딸랑.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신뢰를 마친 천마가 매장으로 들어왔다.
“흠.”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매장 내부는 텅 비어 있었고 장채원은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매장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어디선가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뭐냐, 저건.”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바로 내당으로 올라가는 매장 뒷문이었다.
뒷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내당까지 이어진 길이 빛으로 만든 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흠.”
반짝이는 길을 바라보던 천마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때,
[천마 님. 가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무명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자 앞마당이 보였다.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는 마당 한가운데엔 장채원이 서 있었는데, 그 앞에는 오색빛을 내 뿜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나무에는 신뢰를 받을 때 볼 수 있었던 삼색의 은총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점주, 이게 뭐냐.”
빛으로 둘러싸인 나무를 바라보던 장채원은 감격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은총 나무.”
“은총 나무?”
천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장채원이 활짝 미소 지었다.
“내가 지금까지 고생한 이유지.”
장채원이 빙긋 웃자 천마가 눈썹을 모았다.
“저 반짝이는 나무를 만들려고 했단 말인가.”
“그냥 나무가 아냐, 이거.”
샤라라랑.
그때 장채원의 옆으로 신비한 소리와 함께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이내 양복을 입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지 관리팀 공무원 동원이었다.
“누님.”
모습을 드러낸 동원은 장채원을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장채원이 쓴웃음을 머금자 동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실 건가요?”
“물론이지.”
“알겠습니다.”
동원이 웃으며 수첩을 뒤적거렸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출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마가 물었다.
“어딜 가는 건가?”
앞으로 나선 천마는 동원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보아하니 그동안 점주가 모은 신력을 써서 어디로 가는 것 같은데.”
“그게…….”
동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장채원이 손을 흔들었다.
“천마, 넌 알 거 없어.”
“알 것 없다니.”
“내 은총 가지고 내가 쓰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매장이나 보고 있어.”
“신경을 쓰지 말라니.”
팔짱을 낀 천마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도 본점의 직원이다.”
“그런데?”
“지분이 있잖나.”
장채원의 표정이 궂은 날씨처럼 잔뜩 찌푸려졌다.
“지분? 무슨 지분?”
“신력을 점주 혼자 모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장채원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천마는 말도 못 하게 자신의 속을 썩였다. 그래도 묵묵히 일을 잘해준 덕에 은총을 이만큼이나 모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천마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같이 누릴 자격 정도는 되겠지.”
“누리긴 뭘 누려.”
장채원은 당당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는 천마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줄 아냐?”
“신력을 써서 갈 정도라면 나쁜 곳도 아니겠지.”
턱을 쓰다듬는 천마의 눈동자엔 전에 없는 호기심이 반짝였다.
과거였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눈빛이었으나, 최근에는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천마 님!]
그때 내당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둥그런 그림자가 굴러왔다.
무명이었다.
[천마 님이 가시면, 저도 가겠습니다!]
헐레벌떡 굴러온 무명이 천마의 어깨에 폴짝 뛰어올랐다.
[자,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이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단호히 손을 저었다.
“둘 다 안 돼!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무명, 넌 잘 알면서 왜 그래?”
[잘 압니다. 하지만…….]
무명은 천마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왠지 오늘은 반드시 천마 님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장채원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감, 직감. 그것은 천마가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 사이 무명도 천마에게 물든 것이다.
“그 예감 접어둬.”
그러자 천마가 말했다.
“뭐, 상관없잖나. 그만한 신력을 모아서 가는 곳이 어딘지 구경이나 해보려는 것이니.”
“이 바보야!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니까.”
“그건 본좌가 직접 본 후, 판단해 보겠다.”
굳건한 천마의 태도에 장채원이 이를 꽉 깨물더니 동원에게 말했다.
“저 녀석 신경 쓰지 말고 출발해.”
“저를 놔주셔야…….”
동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천마가 동원의 옷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 너 뭐 해? 그거 안 놔?”
장채원이 동원의 옷소매를 이끌며 외쳤다.
“놀러 가는 거 아니니까, 매장 보고 있으라고!”
“거절한다.”
“글쎄, 안 된다니까?”
“저, 저기요…….”
동원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제 옷은 신사가 아니라서… 이렇게 잡아당기면 금방 찢어집니다.”
“이이…….”
단호하게 동원을 붙잡고 있는 천마를 보자 장채원이 잇몸을 훤히 드러내었다.
저 거머리 같은 녀석을 떼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어, 천마 님.”
동원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곳은 천마 님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
“어째서.”
“이곳에 비해 중력이 20배 더 높으니까요.”
“20배?”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천마 님의 몸무게가 현재 100킬로그램이라면 그곳에서는 2톤이 되어버리죠.”
동원은 억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단순히 몸무게만 무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면 압력 때문에 내부 장기가…….”
지지지직.
그때 하얀빛과 함께 천마의 몸에 둥그런 막이 만들어졌다.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호신강기라면 압력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우웅!
그와 동시에 무명의 몸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저도 헤파이토스 님께서 만들어주신 신력 방패가 있으니,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이…….”
쿵짝이 잘맞는 천마와 무명의 모습을 본 장채원이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후회하지 마!”
“본좌 사전엔 그런 단어는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그러자 동원이 장채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천마 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맘대로 해!”
버럭 소리친 장채원은 씩씩대며 은총 꽃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동원이 다급히 수첩을 펼쳤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수첩에 무언가를 쓰자, 신력이 집약되어 있는 은총 꽃나무가 꿈틀대더니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콰우우우.
그 빛은 하늘까지 치솟더니, 다시 아래로 쏟아졌다.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빛으로 만들어진 폭포가 내리는 것만 같다.
우우웅.
낮은 진동 소리와 함께 은총 꽃나무의 중심부에서 둥그런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장채원은 말없이 그 안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나 좋은 곳을 가길래 점주가 저렇게 짜증을 내는 건가.”
동원은 울적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좋은 곳이라기보다… 누님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곳이라서요.”
“개인적인 사정?”
평소라면 남의 일에 절대로 상관하지 않을 천마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의 마음속엔 감정이라는 싹이 틔였으니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아주아주 먼 외부 차원이라고나 할까요?”
잠시 입술을 깨문 동원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급신들조차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먼 차원입니다.”
“신들조차 갈 수 없는 차원?”
“그렇습니다.”
천마가 눈썹을 모으자 동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누님의 아버님이 계십니다.”
* * *
둥그런 공간으로 들어간 천마는 동원의 등 뒤를 따라 계속 걷고 있었다.
사아악.
빛무리를 헤쳐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고 짙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 까만 어둠은 마치 질량이 있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를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흠.”
암흑으로 물든 공간을 둘러보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꼭 감옥 같군.”
그때 앞장서 걸어 나가던 장채원이 내뱉듯 대답했다.
“감옥 맞아.”
그 대답에 천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장채원의 아버지가 있는 곳. 신들이 닿을 수조차 없는 먼 차원이라는 곳이 고작 감옥이었단 말인가?
“죄를 지었나.”
낮은 천마의 중얼거림에 동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뇨, 아뇨. 죄를 지으신 게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게…….”
더듬거리던 동원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 장채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 돌릴 필요 없어.”
“누님.”
“패자(敗者)는 모든 걸 뒤집어쓰는 거야.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누님.”
“알려줘.”
동원을 바라보는 장채원의 눈동자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아빠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부. 괜히 그곳에 가서 실수하지 않도록.”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동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
“천마 님.”
조심스럽게 입을 연 동원이 마치 죄를 진 것처럼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점주가 알려주라고 하지 않았나.”
천마의 고집에 동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천마 님 정신에 교량을 놓겠습니다.”
정신의 교량을 놓는다함은, 이면귀처럼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그대로 전하겠다는 뜻이다.
“상관없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원이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펜을 꺼내 수첩에 무언가를 적자, 사방에서 빛이 쏟아지며 천마의 머릿속으로 묘한 기억들이 주입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