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81화 (281/285)

제281화. 드러나는 전말 (9)

그녀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리자 천마의 눈동자에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분노의 광채가 흘러나왔다.

김수웅이 서유리를 죽이라고 했다는 걸 새삼 상기한 것이다.

“네놈이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지.”

“그녀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인가? 흐흐흐흐.”

김수웅이 실성한 사람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렇군. 그랬던 거야!”

“복수?”

천마의 사전엔 없는 생소한 단어다.

복수라는 생소한 단어를 입에 담자, 가슴속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복수라.”

평소라면 외면할 그 감정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는 본좌의 눈앞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갔지.”

“하하하하! 고작 협회 요원의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던 거냐?”

김수웅의 비아냥에 천마의 눈동자에선 희미한 감정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나는 너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무섭도록 덤덤한 천마의 말은 사신의 최후통첩과 같았다.

“그렇군.”

낄낄대며 웃던 김수웅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마리아. 레버너스를 가둔 격벽을 모두 개방해.”

-알겠습니다.

또다시 사방의 격벽이 투명해지더니, 기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갇혀 있던 레버너스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코드 제로를 실행해.”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낀 한만재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자폭을 하려는 거냐?”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다 같이 가는 거지.”

레버너스들의 몸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수백 기의 레버너스들이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이 지하 연구소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체가 날아갈 것이다.

“흥.”

하지만 천마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명은 모든 기계를 장악할 수 있으니.

“무명. 해결하라.”

[천마 님.]

그때 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폭파 실행 시간은 30초 미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슈퍼 인공지능 컴퓨터를 해킹하는 건 무리입니다.]

“뭐라.”

[죄송합니다. 천마 님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미리 연구소 컴퓨터를 장악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무명은 단 한 번도 절망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고 해도 목소리는 반쯤 장난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없이 어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천마 님의 명령을 착실히 이행한 것이었으니, 저의 실수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폭발이 다가옴을 느낀 무명의 눈 센서는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동안 천마 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

천마는 재빨리 손을 내뻗었다.

“그런 말 따위 하기엔 아직 이르다.”

[네?]

천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포인트를 사용하겠다.”

우웅.

그러자 품속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안 가지고 온 것처럼 했지만, 결국 천마는 방 안에 있는 강추를 꺼내 품속에 넣고 온 것이다.

“저 회색 덩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포인트 100점이 필요합니다. 차감하시겠습니까?

백 점이라면 100년에 해당하는 내공이다.

하지만 천마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지하 연구실 천장에서 새하얀 번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앙!

새하얀 번개들이 레버너스의 몸에 닿을 때마다 설탕이 물에 녹듯, 흔적도 없이 몸뚱이가 사라져갔다.

콰우우우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을 뒤덮었던 수백 기의 레버너스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실험실 내부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다.

천마가 보여준 위용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신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

“어떻게 이런 힘을…….”

김수웅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애당초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손가락 하나로 자신과 레버너스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어째서 쓸데없이 시간을 끌었단 말인가?

김수웅의 마음을 간파한 천마가 품속에서 강추를 꺼내었다.

작은 손 망치 모양을 하고 있지만, 헤파이토스가 만든 신계 직통 서비스 호출기였다.

“이 강추의 힘이지.”

“강추?”

“호출하면 어떤 일이든 해결해 준다. 물론 피 같은 내공을 소모하긴 하지만.”

“어떤 일이든 해결해 준다고?”

낮게 중얼거리던 김수웅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아까 네놈이 한 말과 다르잖나.”

“무슨 말이냐.”

“그런 걸 갖기 위해 넌 무슨 노력을 했냔 말이다!”

스스로 노력한 힘이 아니라, 거저 얻은 힘을 이용했다고 타박한 천마.

하지만 그 역시 거저 얻은 힘으로 위기를 해결한 것이다.

“본좌는 네놈처럼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잖나.”

당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론 조금 켕겼는지 천마는 코를 훔쳤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

김수웅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년간 쌓아왔던 것들이, 바라왔던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크게 괴롭지 않았다.

천마가 사용한 힘,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걸 보았기에.

자신의 계획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지금보다 수백 배 더 공을 들였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지.’

천마가 펼친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대자연의 조화에 가까웠다.

저런 힘을 가진 신인(神人)이 있는 이상, 이레이져 프로젝트는 애당초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내가 졌다.”

김수웅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저만한 힘을 가진 자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런 짓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졌다고?”

그때 낮은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런 말 따위로 끝날 일이 아니지.”

고개를 들자 김수웅은 한 쌍의 광채를 발견했다.

그것은 영혼마저 태워 버릴 듯한 천마의 눈동자였다.

“천마 님. 그자를 죽이면 혹시라도 팀장님이…….”

유은호와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

“그자를 살려두셔야……”

하지만 유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활활 타오르는 천마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보여주지.”

김수웅의 머리통을 집어 올린 천마가 그의 얼굴에 눈동자를 가까이 대었다.

“그녀가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그 목소리는 죽은 자를 지옥의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았다.

* * *

각성자 유전체 연구소의 붕괴 사건은 연일 뉴스에 등장하였다.

원인은 내부 파괴. 다행히 장비 점검을 위한 퇴근을 한 상태라 부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 홀로 장비를 점검하던 협회의 전략기획실장, 김수웅이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1퍼센트에 도달한 이레이져 프로젝트로 인해, 전 세계의 각성자 중 소수가 힘을 잃었다.

하지만 워낙에 극소수인 탓에 화제가 되진 않았다.

김수웅의 사후(死後), 전략기획실장은 한동안 공석으로 유지되었다.

‘아직 그만한 인물을 찾지 못해서’라는 말도 있고, 권력이 워낙 집중된 부서인 탓에 수뇌부에서 전략기획실을 해체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찰나, 협회에선 권한대행을 맡았던 빅데이터 실장인 최성욱을 전략기획실장 자리에 올렸다.

그는 별다른 야망이 없는 인물인데다 특수대응팀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특수대응팀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았고, 실드경계지역을 지키는 현재 임무를 유지시켰다.

실드경계지역, 특수대응팀 빌라 내부.

평소라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화로울 분위기의 회의실엔 싸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만재가 초홍과 팀원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

한만재는 초홍과 신채영, 그리고 유은호에게 사죄의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행동은 수십 년이 지나도 용서받을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품속에 있던 신분증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한만재.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사표 수리 안 됐어요.”

그때 유은호가 말했다.

“사표 수리 안 됐다고요.”

“협회에 가서 직접 제출했다.”

“그럴 줄 알고 팀장님이 미리 빼놨어요.”

“뭐라고?”

한만재가 눈은 껌뻑이자 유은호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상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개인행동 좀 하지 마요.”

“내가… 어찌 팀에 남아 있을 수 있겠냐.”

한만재가 고개를 떨구자 초홍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 없이 잘 끝났잖아요. 만재 씨도 저흴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고요.”

“하지만…….”

“죄송하지만 만재 씨가 갖고 있는 생각들… 다 봤어요.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그 마음을 전해 주었고요.”

스킬을 사용했는지 초홍의 눈동자는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 조작 스킬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신임 실장인 최성욱도 초홍의 스킬에 제약을 따로 걸지 않았다.

초홍이 스킬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건지, 아니면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재 씨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김수웅 실장의 꾀임에 왜 넘어갈 수밖에 없는지 알아요. 그러니까 그냥 잊어요.”

한만재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초홍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미등록 각성자도 있지만… 천마 씨 같은 사람도 있잖아요.”

한만재는 몸을 움찔거렸다.

미등록 각성자들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홀로 호조를 키우면서, 아내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한만재는 미등록 각성자들에 대한 복수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하지만 결국 그 복수의 고리를 끊어주고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 역시 미등록 각성자, 천마였다.

“그러고 보니, 천마 씨가 저도 구해줬네요.”

초홍이 품속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그것은 과거 천마가 초홍에게 선물해 준 머리핀이었다. 본래는 병든 아기 얼굴이 장식되어 있었지만, 수명이 다했는지 아기의 얼굴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 핀이 김수웅 실장의 세뇌에서 저를 깨워주었거든요.”

수년 동안 초홍에게 건 세뇌는 오직 김수웅, 그 자신밖에 풀 수가 없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핀에 달린 병든 아기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에 초홍은 세뇌에서 벗어나 깨어난 것이다.

“아, 그냥 좀 남자답게 미안하다고 해요.”

한만재가 머뭇거리는 유은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대신 모아둔 돈을 모두 회식 자금으로 내놓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하면 되잖아요.”

평소 같으면 핀잔을 줄 신채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탱커 구하기도 힘들어요. 그냥 계시죠.”

“너희들…….”

“대신 징계는 받아야겠지만요.”

감동한 한만재의 눈이 촉촉이 젖을 찰나, 초홍의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네? 징계요?”

“한 달간 던전 순찰과 당직은 만재 씨가 전부 맡아서 해요.”

“한 달이요?”

한만재는 입을 벌렸다.

한 달 동안 순찰과 당직을 다 하라는 건,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자라는 게 아닌가?

“두 달로 늘려 드릴까요?”

“아, 아뇨. 알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한만재가 신분증을 집어 들자 초홍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부탁할게요.”

“네?”

“잊어요.”

불현듯 무뚝뚝한 천마의 얼굴을 떠올린 초홍이 빙긋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천마는 옥탑방 평상에서 김찬원과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드럼통 위에는 서유리가 사다 주었던 막창과 곱창이 올려져 있었다. 술 먹을 때 하나씩 꺼내 구워 먹으라던 그 안주가.

꿀꺽꿀꺽.

천마와 김찬원은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두 사람은 묵묵히 서유리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달칵.

술병이 평상에 잔뜩 쌓여갈 때쯤, 김찬원이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끝난 거지?”

천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김찬원이 환하면서도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무명에게서 모든 걸 들어 알고 있었다.

각성자 유전체 연구소 폭발이 천마가 벌인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서유리에게 손을 대었던 자들의 결말이라는 것을.

“고마워.”

김찬원은 눈물과 함께 천마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말없이 술을 마셨다.

복복 인테리어의 내당.

달빛이 흘러내리는 대청마루엔 작은 상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앞에는 장채원과 무명, 그리고 제비가 앉아 있었다.

꼴꼴꼴.

커다란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른 장채원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크으.”

술을 들이켜는 그녀를 바라보던 무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차피 술을 드실 거면, 천마 님과 같이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고개를 가로저은 장채원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마시는 게 좋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장채원 역시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천마가 온 이후, 그녀도 인간세계에 은근히 관심을 두고 있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명의 말에 장채원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문자가 와서 놀랐지 뭐야.”

사실 무명은 천마 몰래 장채원의 휴대폰에 연락 문자를 남겼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고민 끝에 연구소에 잠입했고, 천마가 김수웅을 상대하는 모습을 끝까지 몰래 지켜봤었다.

“그 녀석. 맨날 강한 척만 하더니, 양복쟁이한테 힘도 못 쓰고 말야.”

[단순한 양복쟁이로 표현하기엔 정말 강한 인간이었습니다. 몬스터인 가면신사보다도 더 강했으니까요.]

“편들기는.”

[죄송합니다.]

장채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그 녀석… 이제야 인정했네.”

[뭐가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상에 올려진 안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과거 서유리가 사다 준 육포였다.

육포 한 조각을 씹어먹은 그녀는 다시 소주를 따라 마셨다.

[다행히 신계에선 별다른 말이 없군요.]

“모른 척해 준 거겠지. 정말 모든 각성자들이 사라져서, 세계의 균형이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걔들도 골치 아프잖아.”

신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들은 인간들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간신히 맞춰놓은 세계의 균형, 그리고 세계의 법칙을 지키려 할 뿐이다.

절대로 인간세계에 대한 개입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계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너도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

“고생했다고. 늘 천마 녀석 곁에서 있느라.”

장채원의 말에 무명은 매우 기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생은요. 언제나 저의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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