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78화 (278/285)

제278화. 드러나는 전말 (6)

한만재의 뻔뻔함에 천마는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목숨을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거냐.”

“아까 들었습니다. 천마 씨가 원하는 건 강한 사람과의 승부라는 걸요.”

그는 무명과의 대화를 통해 천마가 강자와의 승부를 갈구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한만재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팀장님과 채영이를 납치한 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아니, 어쩌면 전세계에서 가장 강할 수도 있습니다.”

“…김수웅 실장이 그렇게 강하다고요?”

유은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이자 한만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작 시뮬레이션 스킬로요?”

“시뮬레이션은 스킬 중 하나일 뿐, 그자는 최소 듀얼이야. 각성체 유전 연구소에서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실험체들을 굴복시킨 적도 있으니까.”

유은호가 나서서 묻자 한만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팀장님을 오래전부터 세뇌하고 있었고.”

“세뇌라뇨?”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업무 보고가, 팀장님을 세뇌하기 위해서였어.”

“뭐라고요?”

너무나 뜬금없는 사실에 유은호가 입을 벌렸다.

정신 조작 능력자에게 세뇌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란 말인가?

“팀장님을 무슨 수로 세뇌해요? 정신 조작 능력자의 정신방벽은 일반 각성자의 수백 배는 높을 텐데.”

“믿기 힘들겠지만 모두 사실이야. 팀장님은 지금 세뇌되어 있어. 그래서 채영이를 데려간 거고.”

유은호의 눈빛이 흔들리자 한만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수웅은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해 왔어.”

“뭐를요?”

“각성자들을 모두 없애는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유은호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각성자들을… 모두 없앤다고요? 왜요?”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이 세계에 발생한 던전이 모두 사라지니까.”

김수웅과의 대화를 떠올린 한만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던전과 몬스터로 인해 사람이 죽을 일이 없다고 했어. 나는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를 도운 거야.”

“말도 안 돼요. 각성자들이 없어지면 던전이 사라진다고요?”

“그래. 이 세계에 던전이 나타난 이유는, 바로 각성자들이 증가해서야. 반대로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던전도 사라지게 되겠지.”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돼. 직접 봤으니까.”

“뭘요?”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진 세계를.”

탁한 숨을 내뱉은 한만재가 나직이 말했다.

“시뮬레이션 스킬에 의하면, 각성자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던전이 소멸돼.”

유은호는 입만 벌릴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김수웅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김수웅, 그자는 발할라 프로젝트의 생존자야.”

“네?”

발할라 프로젝트.

평범한 인간을 각성자로 만들어, 던전에 대항하려는 정부 계획.

하지만 그것은 모두 실패하였고, 프로젝트에 참가한 요원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김수웅, 그자가 발할라 프로젝트의 생존자라니?

“그는 던전을 증오해. 발할라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것도, 이 세계에 던전이 생겨났기 때문이니까.”

덤덤히 설명을 이어가던 한만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두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전 세계의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지게 될 거야.”

“무슨 수로요?”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팀장님이 그 계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천마가 붉은 눈을 번뜩였다.

“왜 마음이 변한 거지?”

“네?”

“네 녀석은 그자의 생각에 동의했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건…….”

한만재의 몸을 날카롭게 훑은 천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니면 본좌를 이용해, 복수를 하려는 건가. 네놈을 죽이려 했다고?”

“그건 아닙니다.”

천마의 시선을 피한 한만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약속?”

“김수웅, 그자는 던전을 소멸시켜 다시는 몬스터로 인해 사람들이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하였습니다.”

고개를 든 한만재가 천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김수웅 그자는, 결코 약속 따윈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요.”

“흠.”

팔짱을 낀 천마가 침음을 하자 한만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과 채영이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천마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입술을 깨문 한만재는 결국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김수웅이 죽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천마 씨와 만나던 서유리 요원… 김수웅, 그자가 죽이라고 지시한 겁니다.”

심호흡을 한 한만재가 다시 말했다.

“표면적으로 그 일을 실행한 것은 통합정보국입니다만… 그렇게 일을 만든 건 김수웅 실장입니다. 그는 김성령 팀장이 통합정보국의 첩자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서유리 씨가 그들에게 접촉하게 만들어 선택의 여지없이 죽이게끔 만든 것이죠.”

순간 천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서유리.

아주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녀는 천마에게 두 가지 감정을 남겨두고 떠났다.

상실감, 그리고 죄책감.

그녀 덕택에 천마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천마는 가슴속에 치솟는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본좌가 그녀의 복수라도 할 줄 알았나.”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눈동자에선 시뻘건 혈염광휘가 치솟고 있었다.

[천마 님.]

가만히 듣고 있던 무명이 안타까운 소리를 내었다.

무명은 언제나 천마의 몸 상태를 체크한다. 그리고 지금 천마가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협회의 제2인자이니, 그자는 정말로 강할 것입니다.]

깊은 고민 끝에 무명은 한만재가 했던 말로 다시 천마를 선택했다.

[천마 님께선 언제나 치열한 싸움에 목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번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과 승부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무명의 말은 천마의 감정을 숨길 수 있는 더없는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는 것과 같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천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바로 점주가 아니더냐.”

그렇다. 이 세계의 최강자는, 누가 뭐래도 장채원이다.

신들조차 경계하는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

[인간 중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신과 요괴가 땅을 밟은 채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

그중 ‘인간’들 중에서 정점에 오른 자의 실력은 과연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얼마나 강력한 실력으로 자신을 몰아붙일까?

“좋다. 대신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마지못해 승낙을 한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본좌의 목적은 구출이 아니라, 그 강하다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더없이 매정한 말이었으나 한만재는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김수웅을 처리하는 것이 초홍과 신채영을 구하는 길이었으니까.

* * *

각성자 유전체 해독 연구소.

평소라면 수많은 연구원들이 맡은 바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거대한 지하 연구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텅 비어 있었다.

각성자 유전체 해독 연구소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실험실.

그곳에는 ‘둥둥둥’ ‘쿠르릉’ 하는 기계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부 한가운데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타원 모양의 거대한 기계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계 정중앙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 나노슈트를 입은 여성이 잠들어 있었다.

바로 초홍이었다.

지잉. 위이잉.

기계음이 들릴 때마다 초홍의 머리에 다닥다닥 부착된 케이블들이 바닷속 해초처럼 흔들린다.

동시에 연구소 한편에 세워진 스크린에선 가로 형태의 막대가 그려졌다.

-0.001%. 0.002%

그리고 막대 아래에 씌여진 숫자가 연신 바뀌고 있었다.

숫자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스크린에선 불길한 무언가가 꾸역꾸역 피어 올라오는 것만 같다.

“곧 끝나겠군.”

은테 안경을 쓴 중년 사내가 기계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협회의 2인자. 그리고 각성자 유전체 연구소의 실질적 운영자인 전략기획실장, 김수웅이었다.

“…….”

그리고 김수웅 옆에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에 얼어붙은 호수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여성이다. 바로 신채영이었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군.”

김수웅의 말에 신채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겁니까.”

“물론.”

“그럼 제 몸부터 풀어주시죠.”

지금 신채영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까지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김수웅의 명령으로 초홍이 그녀의 심령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데 지장은 없을 텐데.”

단호한 거절이 돌아오자, 신채영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신채영의 질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었다.

낮은 웃음을 흘린 김수웅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발할라 프로젝트를 아나.”

신채영이 대답하지 않자 김수웅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생겨난 던전 때문에, 당시 세계는 멸망 상태 직전까지 갔지.”

당시를 회상하는 듯 그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때는 지금처럼 각성자란 개념도 없었어. 설령 각성자라고 해도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더 많았지. 그래서 정부는 발할라 프로젝트를 통해, 각성자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던전을 처리하려 했다.”

김수웅은 스크린에 올라가는 숫자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고, 실험에 자원했던 요원들은 모두 사망했지. 하지만 정부는 사망자 중에, 비밀요원들의 죽음을 은폐했어. 어차피 살아도 죽어도 괜찮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 비밀요원 중 하나가 당신이라는 말이군요.”

신채영이 낮게 중얼거리자 김수웅이 피식 웃었다.

“맞아. 폐기 처분되기 직전, 나는 다시 소생했고 은밀히 연구소를 빠져나왔지. 그리고 신분을 바꿔가며 해외를 떠돌았지.”

“거짓 이력을 만들었군요. 협회에 들어오기 위해.”

“후후후. 맞아. 자네도 특수임무를 진행했던 비밀요원이라는 걸 깜빡했군.”

김수웅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발할라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은 뒤 여러 가지 스킬을 얻을 수 있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시뮬레이션’이었어.”

시뮬레이션.

설정한 조건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볼 수 있는 스킬.

다만 스킬 발현 조건이 제각각인데다, 무한하게 사용할 수 없는 탓에 IR 스킬로 지정되었다.

“나는 시뮬레이션 스킬을 통해 알게 되었지. 전 세계의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자연히 던전도 사라질 거라는 걸.”

“그거랑 팀장님을 납치한 게 무슨 상관이죠?”

“이 세상에 오직 그녀만이 S1 세포라 불리는, 각성 세포를 사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김수웅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 박정민 실장은 각성자들을 강제로 재각성 시킬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 냈지. 초 팀장, 유은호, 그리고 신채영. 자네들은 모두 박정민 실장에 의해 강력한 힘을 얻게 된 실험체들이고.”

김수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박정민 실장이 남긴 데이터를 조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 자네들이 각성했던 방법은 바로 초 팀장의 능력이었다는 걸 말야.”

“그게 무슨 말이죠?”

“각성 세포는 ‘정신’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지. 각성을 할 수 있는 것도, 재각성을 가능케 하는 것도 모두.”

김수웅은 기계 속에 잠들어 있는 초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 팀장은, 각성자들을 재각성시킬 수도, 정신 오염을 통해 각성 세포를 사멸시킬 수도 있는… 각성자들의 신과 같은 존재지.”

“불가능한 계획이군요.”

신채영이 차갑게 웃자, 김수웅이 입꼬리를 올렸다.

“스킬 영역 때문에 말인가? 그래서 범용 나노봇을 만들어 전 세계에 뿌렸지. 초 팀장의 스킬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중계기로.”

하얀 이를 드러낸 김수웅이 초홍이 잠들어 있는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내 내 오랜 숙원이었던 ‘이레이져 프로젝트’가 완성된 것이지.”

신채영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초홍이 잠들어 있는 저 기계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나노봇과 연결되어 있다니?

만약 스킬을 발동하면 나노봇들이 중계기가 되어, 전 세계에 정신 오염을 발생시킬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왜.”

“아아.”

김수웅은 그제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영역을 넓히는 건 나노봇이 해결해 줬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초 팀장의 뇌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어. 전 세계 각성자들의 세포를 사멸시키기 전에 그녀의 뇌가 타버릴 테니까.”

그제서야 신채영은 자신이 왜 이곳으로 잡혀 왔는지, 어째서 초홍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를 구속하게 만들었는지를 깨달았다.

“맞았네. 자네의 힐링 팩터만이 오직, 초 팀장의 뇌가 망가지는 걸 막아낼 수 있지.”

신채영의 눈빛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초홍은 전 세계 각성자들의 세포를 사멸시킬 때까지 스킬 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힐링 팩터를 계속 주입한다면?

“자네 예상이 맞네. 전 세계의 각성자들을 처리할 때쯤이면, 자네들도 기력을 다해 죽겠지.”

김수웅은 신채영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빙긋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숨으로 전 세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리 손해 가는 일은 아닐 걸세.”

신채영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감정의 빛을 숨길 수 없었다.

김수웅.

이자는 타인의 목숨 따윈 그저 소모품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걸. 그리고 이 미친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침입자를 감지하였습니다.

그 순간, 연구실 내부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성자 유전체 연구소를 통제하고 있는 인공지능, 마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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