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드러나는 전말 (3)
동시에 유은호와 한만재가 서 있던 통로의 구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쿠웅. 쿠우우우.
블록처럼 쪼개진 통로는 다시 재구축되더니, 마침내 넓게 이어진 기나긴 통로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죠? 형님, 던전의 구조가 바뀌었어요.”
유은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한만재가 오른팔에 장착한 휴대폰을 가리켰다.
화면 속에는 불스아이 던전의 미로가 한눈에 보였고, 곳곳에 설치된 구조물들이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이 불스아이 던전의 미로 구조를 실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장치야.”
“뭐라고요?”
던전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하나, 아직까지 던전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대상이었다.
세이프던전도 아니고 가변던전의 미로 구조를 바꿀 수 있다니?
“아직은 불스아이 던전만이야. 미로의 구조와 바뀌는 법칙을 찾아낸 것은.”
한만재는 손가락을 뻗어 또다시 던전의 구조를 조작했다.
“아까 통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구조물이, 이 불스아이 구조를 파악하고 임의대로 바꿀 수 있는 장치야. 데이터 마이닝팀에서 개발했지.”
“형님. 잠깐만요.”
유은호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아까 천마 님을 가둔 것도 형님이 한 거라고요?”
“그래.”
“왜요. 천마 님을 왜.”
“협회장 쪽 사람이야.”
“뭐라고요?”
한만재는 유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천마 씨는 협회장 명령을 받고 온 각성자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은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만재는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잘 생각해 봐. 그만한 힘을 가진 각성자가 왜 외딴 실드경계지역에서 살지? 왜 미등록 상태로 던전에 드나들지?”
“그건…….”
“던전을 지킨다고? 사람들을 지킨다고? 아까 그런 말을 하는 걸 보고서도?”
유은호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천마는 그런 목적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만재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유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마, 그 사람은 협회장이 보낸 자야. 전략기획실과 우리 특수대응팀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찰…….”
생각해 보면 천마는 언제나 팀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킬 마스터라고 해도 부족할 만큼 강력하고 신비한 힘을 지녔다.
미등록 각성자라기보다, 한만재의 말대로 협회장 측 인물이었다는 게 납득이 갈 정도다.
“하지만.”
유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천마가 던전이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수호자는 아닐지언정, 협회장의 명령을 받고 온 각성자는 아닐 것이다.
저렇게 눈에 띄는 용모와 성격을 가진 사람을, 협회장이 과연 관찰자로 보냈을까?
“그럴 리가 없어요. 천마 님은…….”
고개를 저은 유은호가 말을 이을 무렵,
츄욱. 츄육.
맞은편에서 매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하고 미끄덩한 덩어리가 땅에 끌리는 듯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유은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맞은편 통로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랜드샤크?”
맞은편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는 상어 머리에 인간의 몸뚱이를 갖고 있는 형태의 히든몬스터, 랜드샤크였다.
“히든몬스터가… 저렇게 단체로 나온다고?”
한만재 역시 눈을 비볐다.
맞은편 통로에서 걸어오는 랜드샤크는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위험도 2만에 육박하는 히든몬스터 랜드샤크들이 어떻게 저렇게 대량으로 출몰할 수 있단 말인가?
“형님. 히든몬스터들이 어떻게 이렇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은호가 입을 벌릴 무렵,
-카아아아아아!
랜드샤크는 유은호와 한만재를 발견하더니, 괴음을 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압!”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만재는 기합성과 함께 한 팔을 벌렸다.
우웅.
낮은 진동과 함께 그의 양팔에서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방패 모양의 실드가 겹겹이 만들어졌다.
탱커인 한만재의 주특기인 레이어드 실드였다.
-우우!
거대한 실드에 가로막히자, 랜드샤크들은 거대한 손을 들어 실드를 부수려 했다.
쿠웅! 쿠웅!
실드의 한계를 넘는 충격량이 전해지자 한만재의 등이 점점 굽어지기 시작했다.
“크읏.”
신음성을 낸 그는 오른팔의 휴대폰을 재빨리 조작했다.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붉게 깜빡이는 경고음과 함께 기계음이 나직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접근이 거부되었다고?”
한만재는 다시 휴대폰을 조작했지만, 여전히 접근이 거부되었다는 메시지만 나올 뿐이다.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던 한만재는 번뜩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김수웅, 이 개자식!”
그리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까지 한꺼번에 죽일 속셈이었던 거야!”
설명을 다 듣진 못했지만 유은호는 이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만재가 줄곧 김수웅의 끄나풀이었으며, 오늘도 그의 명령을 듣고 천마를 없애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
“형님, 실드 푸세요.”
“안 돼.”
유은호의 생각을 짐작한 한만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수십 마리의 랜드샤크를 이길 수 없어.”
유은호가 과거 최고의 암살자라 불렸지만, 어디까지나 각성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랜드샤크와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면 스킬이고 기술이고 다 소용없다.
콰앙! 콰앙!
그 사이 랜드샤크들이 달려와 실드를 부수려 했다.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지만 한만재는 끝까지 결계를 풀지 않았다.
쿠웅. 쿠웅.
그때, 땅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랜드샤크 사이로 걸어오는 몬스터가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랜드샤크와 다를 바가 없지만, 전신이 금속로 되어 있었고 머리 부분에 뾰족한 뿔이 달려 있었다.
“저건…….”
유은호가 중얼거리자 한만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유전체 연구소에서 개조된 몬스터야.”
머리에 달려 있는 송곳 모양의 날카로운 뿔.
분명 실드 스킬이나 던전용 특수방패를 수월하게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쿠우!
금속 몸체를 하고 있는 랜드샤크가 찢어지는 괴음을 내질렀다.
쿵쿵쿵.
동시에 머리의 송곳을 코뿔소처럼 세운 채 실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시퍼런 스파크와 함께 뾰쪽한 송곳이 한만재의 옆구리 부근을 꿰뚫었다.
“형님!”
“신경 쓰지 마.”
이를 꽉 깨문 한만재는 갑자기 휴대폰 한쪽을 손가락으로 잡아 뜯었다.
그러자 안에서 푸른색으로 빛나는 돌 하나가 나왔다.
“이거 받아.”
“이건……”
유은호는 입을 벌렸다.
한만재의 손바닥 위에 들린 것은 던전 공학자들이 사용하는 던전 파괴용 폭탄이었다.
어지간한 파괴력에도 부서지지 던전의 벽을 파괴할 수 있어, 탐사용이나 혹은 구조용으로 쓰인다.
다만 이 편리한 폭탄은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비싼데다, 정부의 허가 없이는 구매할 수 없다.
“이걸 사용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
“저 혼자 도망가라고요?”
“난 어차피 틀렸어.”
금속 랜드샤크의 뿔에 찔린 옆구리에선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서 가.”
지지직.
그 사이 금속 랜드샤크의 뿔이 두 번째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실드가 막아낼 수 있는 허용량을 넘어서자, 한만재는 배 속의 장기가 오그라드는 고통을 느꼈다.
챙.
그때 유은호가 허리춤에서 단분자 커터를 뽑아 들었다.
“같이 싸워요.”
한만재는 이를 깨물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유은호는 죽어도 자신을 버리고 갈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배신자를 뭘 신경 쓰냐!”
한만재는 유은호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김수웅 실장 밑에서 일했어. 지금도 그 명령을 받고 천마 씨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그게 뭐 어쨌다고요.”
“형님도 우리 특수대응팀이잖아요”
“뭐?”
“지금까지 같이 했던 임무들, 그런 게 다 김수웅 실장 때문에 한 거예요?”
한만재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아내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그 간악한 미등록 각성자들이 제대로 처벌만 받았더라면…….
한만재는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결코 특수대응팀을 배신하지 않았을 테니까.
“거봐요.”
“은호야.”
“형님은 자기 이익 때문에 남을 배신할 사람이 못 돼요.”
유은호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실드 풀어요.”
휘이이잉.
순간 그의 몸에선 하얀 광채가 흘러나왔다.
초고속 이동 스킬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것이다.
“크읏.”
한만재가 실드를 풀자 희미한 잔상과 함께 유은호의 몸뚱이가 한줄기 번개가 되었다.
번쩍! 쉬이이익!
엄청난 빛과 파공음이 랜드샤크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쿠웅. 쿠웅.
동시에 대여섯 마리의 랜드샤크들의 목이 분리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더럽게 딱딱하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은호는 손에 든 단분자 커터를 내려다보았다.
초고속 이동 스킬을 가미하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을 두부 썰 듯 베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단분자 커터는 두 조각이 나 있었다.
“절반 정도뿐인가.”
단숨에 랜드샤크 대여섯 마리를 베어냈지만, 아직도 정면에는 스무 마리 이상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랜드샤크는 생채기만 나 있는 상태였다.
-쿠오오오오!
금속 랜드샤크가 포효하자, 나머지 랜드샤크가 호응하듯 유은호를 잡기 위해 좁은 통로를 뛰어다녔다.
“위험해!”
한만재는 랜드샤크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유은호가 빛처럼 움직인다고 해도, 이처럼 좁은 곳에선 속수무책이다.
우우우웅!
다시 거대한 실드를 만들어낸 한만재는 달려드는 랜드샤크들을 밀어내었다.
-우오!
약이 바짝 오른 금속 랜드샤크는 한만재의 실드를 보자 죽기 살기로 뿔을 들이밀었다.
푸욱.
갑작스럽게 실드를 만든 탓일까?
예리한 뿔이 강력한 실드를 뚫고 한만재의 어깨를 꿰뚫었다.
“으윽.”
“형님!”
“별거 아냐. 뒤에 그대로 있어.”
고통을 참은 한만재는 다시 한번 양팔을 뻗어 실드를 생성했다.
부서진 실드를 바로 재생성하는 건 온몸의 뼈를 부수는 것과 비슷한 고통이 발생한다.
하지만 한만재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유은호가 마음 편히 떠날 수가 없을 테니.
“이제 빨리 가라. 마지막 기회야.”
“갈 것 같아요?”
“그럼 같이 죽자고? 그럼 우리 호조는? 팀장님도 채영이도 구할 수 없어!”
“형님!”
“호조를 고아로 만들겠다는 거야?”
유은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한만재가 말했다.
“다 내가 벌인 일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심호흡을 한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호조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줘. 그리고 아빠의 허물은… 이야기하지 말아주고.”
“형님.”
유은호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설령 이 폭탄으로 반대쪽 벽을 허문다고 해도, 몬스터가 안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한만재는 던전을 빠져나오는데, 행여 짐이 될까 같이 가는 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가, 임마.”
다시 한번 씩 웃은 그는 유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마 씨에게도 내가 정말 미안해하더라고…….”
그때 낮고 굵은 음성이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사죄를 하려거든 직접 하라.”
유은호와 한만재가 고개를 드니, 나노봇을 어깨에 멘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천마였다.
“신마멸천장!”
벼락같은 기합성과 함께 시커먼 구체가 랜드샤크가 모여 있는 통로에 떠올랐다.
고오오오…….
암흑보다 어둡고 절망적인 구체에서 엄청난 기운이 퍼져 나오더니,
화아아아악.
뜨거운 열기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랜드샤크를 소멸시켜 버렸다.
뚜벅뚜벅.
순식간에 사라진 수십 마리의 랜드샤크들 사이로 걸어 나온 그림자가 한만재의 앞에 섰다.
그는 바로 천마였다.
“말도 안 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은호와 한만재는 두 눈을 비볐다.
파괴가 불가능한 외피 때문에 위험도가 2만으로 측정된 랜드샤크가 엿가락처럼 녹아 없어지다니?
“꽤나 재밌었다.”
랜드샤크를 쓸어버린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 가면 쓴 괴상한 놈 말이다.”
혈염광휘를 내뿜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한만재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스마일 가면신사를… 없애버렸단 말입니까?”
한만재는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알려진 바는 없지만, 김수웅의 말에 의하면 가면신사는 몬스터 역사상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제법이더군. 마물치곤 말이지.”
천마는 불현듯 가면신사와의 격렬한 전투를 떠올렸다.
* * *
드릴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주먹이 천마의 방어를 뚫고 들어왔다.
콰직.
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천마가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뱃속이 뜨거워졌다.
스마일 가면신사.
이 기괴하고도 강력한 몬스터는 단 일격으로 천마의 금강지체를 깨뜨린 것이다.
“크으.”
이 세계에 온 뒤로, 모처럼 느끼는 강렬한 고통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천마는 번개와 같은 각법(脚法)을 펼쳤다.
쾅!
허공에 새겨진 발그림자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스마일 가면신사가 던전 벽 한편으로 처박혔다.
스윽.
사방으로 피어오르던 먼지가 서서히 걷히자, 가면신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흐흐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비록 내공이 소실되었으나, 천마대능력으로 몬스터와 강자들을 제압했던 천마.
이 세계엔 천마대능력을 막아낼 적수가 없는 줄 알았건만, 마침내 자신과 비등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재미있군.”
천마는 십이 성의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본좌를 즐겁게 해주었으니, 죽여주지.”
파앙!
찬란한 붉은 광채가 몸에서 솟구친 천마가 그림자처럼 잔상을 남기며 가면신사에게 파고들었다.
“권마무도!”
다섯 줄기의 권력이 사방을 에워싸자 가면신사는 허공 위로 솟구쳤다.
천마는 그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이미 수십 개의 권력을 허공 위로 쏟아냈다.
파파파파파!
폭풍우와도 같은 권법이 온몸으로 쏟아지자 가면신사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가끔씩은 양팔을 움직여 천마의 공격을 일일이 해소시켰다. 그것은 마치 무림고수가 펼치는 초식과도 같았다.
‘신기하군.’
그 모습을 본 천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스마일 가면신사는 어디까지나 몬스터.
살육의 본능으로 움직이는 짐승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마도무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천마의 교묘한 권식(拳式)을 예측하고 막아내다니?
‘지능이 있군.’
천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