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열혈의사 고두식 (3)
화면 속에 보이는 공장의 규모는 엄청났다.
이처럼 대규모 재난 상황의 경우 최선의 진료를 하기 위해 근접 지역의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차례차례 분산 이송을 하게 된다.
때문에 공장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인 샘 병원이 가장 먼저 환자로 들끓은 것이다.
“선생님!”
넋이 나가 있는 고두식을 향해 간호사가 소리쳤다.
“응급 환자들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고두식은 밀려드는 환자가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환자들을 보내고, 이쪽으로!”
고두식은 정신이 없었다.
기존 응급실 내에 있던 경증 환자들을 빨리 퇴원시켰다.
그리고 각 과의 계획되어 있던 수술은 유보시키고, 수술방과 중환자실의 예비 병상 및 공간을 확보하였다.
‘손이 부족해.’
밀려드는 환자를 끊임없이 살피고 처치하던 고두식이 이를 깨물었다.
얼핏 봐도 응급실에 몰려든 환자들은 팔십 명, 아니 구십 명 이상. 그 중엔 단순한 타박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위급 환자들이었다.
“선생님!”
그때 응급실로 황급히 뛰어 들어오는 양복 남성이 있었다. 바로 비번인 박상두였다.
“네가 어쩐 일이야?”
고두식이 놀라서 묻자 박상두가 더듬거리며 딴소리를 했다.
“그… 스카우터가 테러를 해서 공장 사람들이 다쳤대요.”
“알아.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네네.”
헐레벌떡 가운을 입고 온 박상두가 합류하자, 고두식이 소리쳤다.
“빨리 에디슨부터 작동시켜서 환자 분류부터 해!”
에디슨은 응급실에 비치한 진단 로봇이다.
다양한 센서들로 환자의 상태를 진단 파악해, 중증도가 높으면서 생존 가능성이 있는 자를 선별한다.
“상주 힐러 선생에게 연락해. 빨리 응급실로 오라고!”
-끄아아! 나부터 치료해 달라고!
에디슨의 분류가 시작되자 여기저기 환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응급상황의 우선순위라는 건 고통이라던가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중요하지 않았다.
개방골절을 당해 고통스런 신음성을 내는 환자보다, 의식이 없거나 호흡을 하지 않는 환자를 우선적으로 처치해야 하는 것이다.
지잉.
응급실로 급히 달려온 상주 힐러가 고통에 찬 환자들에게 치료 스킬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휘한 건 C급 치료 스킬인 ‘외상 회복’과 ‘회복력 촉진’.
극심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중환자와 공황 상태에 빠진 환자들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씨발! 저 새끼는 죽었잖아!
고두식과 박상두가 의식 없는 환자들을 응급중환자실로 데려가 먼저 살피고 있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환자들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우리부터 치료해 달라고! 아파 죽겠다고!
‘손이 모자라!’
미친 듯이 처치를 하는 고두식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스카우터의 폭탄 테러로 인해 대규모의 재해가 발생하였고, 환자 밀집으로 인해 의료진과 의료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코드 블랙(code black)인 상황.
게다가 하필 수술 로봇들도 모두 리콜에 들어간 상황이다. 지금 병원에 남아 있는 의사들론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아아! 아파!
-끄어어. 엉엉.
결국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이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간호사들과 경비원들이 나서 말리지만 소용이 없다. 응급실 내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이래선 안 돼.’
응급중환자실에서 미친 듯이 처치를 하고 있던 고두식이 눈을 부릅뜰 찰나,
쿠웅.
갑자기 응급실 내부 전체에 기묘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범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나가자 소란을 피우던 환자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뭐지?’
이상함을 느낀 고두식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느새 응급중환자실 입구엔 투명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단발머리 여성이 양손을 모은 채 우뚝 서 있었다. 바로 협회 소속의 힐러, 신채영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고두식이 낮게 중얼거릴 무렵, 양손을 모으고 있던 신채영이 두 팔을 벌렸다.
지이이잉.
그 순간 눈에 보일 만큼 반짝이는 빛줄기들이 사방에 흩어졌다.
그리고 응급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과 대기하는 중증의 환자들에게 쏟아졌다.
“……?”
그 순간 발작을 일으키거나 고통에 신음하던 환자들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힐링 팩터로 인해 몸과 마음을 산산이 찢어버릴 것만 같던 아픔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채영 선생님!”
박상두가 놀라움과 안도감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전력을 다해 스킬을 사용하고 있던 신채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치료 스킬은 발동 못 해요.”
“네?”
“중증 환자들의 통증만 멎게 만든 거예요. 그동안 빨리 처리하세요.”
제아무리 신채영이라고 해도 구십여 명이 넘는 환자들의 부상을 단번에 치료해 줄 능력은 없다.
그녀가 온전한 힐링 팩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건 열 명 정도. 그것도 중증 상태가 아니라는 가정하에서다.
때문에 그녀는 스킬을 분산시켜 중증 환자들의 통증을 멎게 하고 심리 상태를 안정시켜, 응급실 내부를 안정시킨 것이다.
“알, 알겠습니다.”
박상두는 황급히 몸을 돌려 다시 처치를 시작했다.
‘다행이군.’
고두식은 진땀을 닦았다.
신채영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된 응급실은 안정이 되었고, 신속하게 환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양심은 좀 있는 힐러였나.’
고두식은 자신의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신채영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차피 2주간의 근무 기간을 채우고 돌아간 상태다. 굳이 돌아올 필요도 없는 그녀가 제 발로 아수라장이 된 응급실을 찾다니.
‘아냐. 분명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보란 듯이 도와줘서 TV에라도 나올 속셈인 게지.’
아픈 사람을 외면한 채 사무실에 처박혀 있던 그녀였다.
고두식은 신채영이 응급실에 온 것도 순수한 의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가 온 덕택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끼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응급실로 까만 양복을 입은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 협회 힐러가 있다고 하던데.”
갑자기 들이닥친 남성들은 응급중환자실에서 치료 스킬을 퍼뜨리고 있는 신채영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저 여성이로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이 옷깃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뒤를 이어 휠체어 한 대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저기 그곳은 응급중환자실…….”
간호사가 다가와 제지를 하려 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켜주시죠.”
“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은 대뜸 휠체어를 끌고 응급중환자실로 들어가 신채영 앞으로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저는 은화그룹의 최철구 상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휠체어에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채영이 눈길조차 주지 않자 남성이 다시 말했다.
“저분은 은화그룹 회장님이시고요.”
그 말에 응급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저 피투성이 노인이 재계 서열 9위인 은화그룹의 회장, 김철규란 말인가?
“저희 회장님께서 폭발로 크게 다치신 상태입니다.”
“그룹 회장님이면 전속 힐러가 있으실 텐데.”
낮은 신채영의 말에 남성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힐러 분도 폭발에 휘말려 중태이십니다.”
“그래서요.”
“지금 당장 섭외할 수 있는 분을 찾다가 이곳에 협회 소속 힐러가 계시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어떤 놈이 사발을 푼 거야!’
신채영의 등 뒤에서 환자를 돌보던 고두식이 인상을 썼다.
생판 모르는 무리들이 대번에 응급중환자실로 찾아온 걸 보면 직원 중 누군가가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별로 급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베테랑 힐러인 신채영은 한눈에 노인의 상태를 파악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낮은 신음성을 내고 있지만, 팔과 어깨가 골절되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5억 드리죠.”
남성, 최철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을 먼저 치료해 드리면 10억, 바로 꽂아드리겠습니다.”
순간 듣고 있던 고두식이 입을 벌렸다.
‘치료 스킬 한 번 해주는데, 15억이라고?’
과연 재벌답게 지르는 금액이 상상을 초월한다.
힐링 팩터를 발산하는 신채영을 바라보며 남성이 미소 지었다.
“응급실에 있는 모든 중증 환자들의 통증을 모두 없애주시고 있군요.”
놀랍게도 그는 신채영이 어떻게 치료 스킬을 발휘하는지를 한눈에 꿰뚫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분명 A급, 아니 S급 치료 스킬을 가진 힐러일 테고.”
‘그녀가 S급 힐러라고?’
고두식이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최철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20억 드리죠.”
20억.
이 정도라면 ‘돈으로 날 사려는 건가!’라고 꾸짖기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대신 한 시간, 아니 삼십 분 안에 치료 부탁합니다.”
‘하하.’
고두식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생 병원에서 일한다고 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힐러인 그녀는 단 삼십 분 안에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채영의 입에선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싫은데요.”
“아, 걱정 마세요.”
어깨를 으쓱한 최철구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거래를 누가 들었다고 해도, 결코 새어 나가지 않게 처리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이 아니다.
은화그룹의 회장이 일개 의사들의 입단속을 시키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멋대로 해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두식은 경멸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힐러들은 돈에 팔려가는 각성자들이다. 신채영이 회장을 치료해 준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응급실이 비명과 신음이 흘러나오는 아수라장이 되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으으음.”
그때 휠체어에 앉아 있던 회장, 김철규가 또다시 신음성을 내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골절로 인한 통증은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빨리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최철구의 말에 신채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가서 응급실 접수나 하시죠.”
“네?”
“제가 힐을 보내는 환자 중에 그쪽 회장님 보다 덜 다친 사람은 없어요.”
최철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꽤 곤란해질 텐데요.”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협회 고위층과도 줄이 닿아 있는 은화그룹 회장이라면, 일개 각성자 한 명쯤은 충분히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신채영은 성가신 파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힘드니까 더 이상 말 시키지 마요.”
“……!”
순간 최철구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몇 분 동안이나 신채영의 얼굴을 훑던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 그룹과 원수질 각오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또 한 번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날아왔다.
하지만 신채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말 시키지 말랬죠.”
“…….”
힐러, 그것도 협회 소속의 고위 각성자가 싫다는데 억지로 스킬을 발휘시킬 방법은 없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최철규가 이를 깨물며 말했다.
“좋습니다.”
몸을 돌리려는데, 휠체어에 앉아 있던 김철규 회장이 이를 깨물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야.”
신채영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통증을 참으며 버럭 소리쳤다.
“네년, 이름이 뭐냐고!”
순간 신채영이 냉기가 흘러나오는 눈동자로 김철규를 응시했다.
“시끄러.”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온갖 풍상을 겪은 김철규 회장조차도 얼어붙게 만드는 살기였다.
“이, 이…….”
평소대로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은 손에 목줄기가 틀어막힌 듯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너, 너어…….”
김철규 회장이 시뻘게지고 숨이 막혀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최철규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저희가 빨리 다른 힐러를 섭외해 보겠습니다.”
김철규 회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철규는 재빨리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언제 중환자실에 들어왔냐는 듯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고두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힐러들은 한결같이 모두 돈에 죽고 사는 수전노들이었다.
단 한 명도, 그러한 공식에서 벗어난 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 협회의 힐러는 자그마치 20억이란 거금을 단칼에 거절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뿐만 아니라 재계의 거물을 찍소리조차 못 하게 만들 만한 가공한 기운까지 뿜어내다니?
‘대체 뭐지?’
“선생님.”
그때 지시를 기다리는 간호사의 말에 고두식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고두식은 다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악몽 같았던 하루가 흘렀다.
이후로도 환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지만, 다행히 목숨이 경각이 달린 중환자들은 없었다.
한숨을 돌린 그는 문득 아직도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신채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저게 가능한가.’
그나마 고두식은 짬짬이 휴식도 취하고 물도 마셨다.
하지만 신채영은 하루가 지날 동안 로봇처럼 응급실에 선 채 계속 힐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건가.’
마침내 모든 응급중환자실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안정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채영이 천천히 팔을 거두었다.
“하아…….”
상당한 무리를 한 것인지, 그녀는 지친 얼굴로 숨을 몰아쉰 채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저기.”
고심하던 고두식은 자판기에서 깨끗한 생수 하나를 뽑아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신채영은 말없이 음료를 받아 마셨다.
“감사합니다.”
무뚝뚝하게 들릴 만큼 고저가 없는 낮은 목소리다.
하지만 그 무심한 목소리를 듣자 고두식은 사과할 용기가 생겼다. 지금까지 그녀를 오해했던 것에 대해.
“미안합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멍하니 벽에 기대 있던 고두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억지로 환자 치료를 강요한 거요. 사실 그냥 진통제 처방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말했잖아요.”
생수를 한 번 더 꿀꺽 마신 그녀가 덤덤히 대답했다.
“위급하지 않은 사람에겐 안 한다고.”
그 순간 고두식은 깨달았다.
신채영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던전 방위팀의 각성자들은 다시 던전을 지켜야 하니, 힐을 사용한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부탁한 환자는 위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로 그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정말 미안합니다.”
“신경 안 써요.”
예전 같으면 날이 선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원래 무뚝뚝하며, 거짓말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걸.
신경을 안 쓴다고 말했으니 정말로 신경을 안 썼을 거라는 걸.
“하나 더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뭐가요.”
고두식은 또 한 번 사과를 했다.
“힐러들은 이득을 위해선 악마와도 거래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괜찮아요.”
“사과, 받아주시는 겁니까.”
신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두식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근데 손은 왜 내밀어요?”
신채영이 묻자 고두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희 병원에선 큰 수술을 마치면 동료들끼리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로 악수를 청하거든요.”
애정이 듬뿍 담긴 고두식의 눈을 바라보던 신채영이 덤덤히 말했다.
“그 손, 잡으면 고백하실 건 아니죠?”
“네?”
“아뇨. 여기 있는 동안 다들 너무 들이대서.”
민망한 듯 신채영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뺨을 붉혔다.
그 옆모습을 보자, 고두식은 순간 가슴이 주책없이 뛰었다.
힐러는 모두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혹시…….”
모태솔로 외길 40년을 걸어온 고두식은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고백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이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두 번 다신 신채영에게 말을 걸 기회가 없을 테니까.
“아뇨.”
신채영의 칼 같은 대답에 고두식이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재고의 여지는 전혀 없나요? 조금이라도?”
“절대로요.”
“그렇군요.”
결국 대차게 차인 셈이다. 하지만 고두식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사심 없이, 그리고 같이 고생한 동료에게 존경을 담은 의미로.
“고생하셨습니다, 신채영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