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스카우터의 테러 (1)
“협회장, 그자가 나선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어느 저택 거실.
낮지만 굵은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협회장이라.”
다시 흘러나온 목소리에선 껄끄러움이 느껴진다.
협회장.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 최초 스킬 마스터, 펜타 스킬 사용자, 최초 S등급 던전 솔로 정복자…….
유사 이래 최강의 각성자로 불리는 협회장은, 협회뿐만 아니라 사실상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신경 쓰이십니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최고의 위치에 오른 괴물이니까.”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협회장이 나섰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김수웅은 자멸할 테니.”
“자멸…….”
“김수웅 그자는, 항상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려는 경향이 있지.”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어떤 일을 실현시키긴 위해선 반드시 앞으로 나서야 할 때가 있는데 말이지.”
“그자는 그 시기를 놓쳤군요.”
“그래. 그가 계획한 건 모두 망가질 것이다.”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공기마저 낮게 가라앉을 때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랙마켓 쪽은 어떻게 할까요? 쓸 만한 자를 우두머리로 내세웠는데, 아무래도 남성우를 따르던 쪽에서 반항이 심합니다.”
“그쪽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이젠 더 이상 이용 가치도 없으니까.”
저택 안에 서 있던 그림자는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맞은편 거울엔 해맑게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청년 혼자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 * *
베트남 음식점. 포포포.
천마와 장채원, 그리고 고은진은 TV가 설치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찬원은 여행을 간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협회에서 개발된 범용 나노봇 X-3가 출시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각 상점에는 X-3를 구매하려고 새벽부터 긴 행렬이…….
화면 속에는 범용 나노봇의 판매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인간의 태도와 말투를 완벽히 모방할 수 있는 초고가의 A.I 대신, 강화학습 시스템을 탑재하고, 저렴한 센서들로 만들어진 범용 나노봇 X-3.
너무나 비싼 가격 탓에 선뜻 구매하기 힘들었던 각성자들뿐만 아니라, 평소에 나노봇에 관심 있던 시민들까지 몽땅 X-3를 구매하려고 몰린 것이다.
“세상 좋아졌네. 150만 원짜리 나노봇이라.”
TV를 바라보던 장채원이 탄성을 내었다.
“완전 최신형 휴대폰 가격이잖아?”
“저도 구매하러 가봤다가 포기했지 말입니다.”
옆에서 파인애플볶음밥을 우물우물 먹고 있던 고은진이 고개를 저었다.
“온라인에서도 세 배 가격으로 되파는데도 불티나게 팔리지 말입니다.”
사양에 따라 다르지만 쓸 만한 나노봇 한 대의 가격이 보통 3천만 원.
커스텀을 하거나 사양을 높일 경우 1억에서 그 이상까지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X-3는 고작 백오십만 원.
AI 탑재가 되어 있지 않다곤 하지만, 사람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 로봇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거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협회에서 별일이네.”
장채원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각성자들을 특권층처럼 생각하고 그 들의 권익만 따졌잖아. 무슨 일로 저렴한 나노봇을 대량으로 푸는 건지.”
“그렇게 말임돠.”
두 사람의 수다에도 천마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볶음면을 씹고 있었다.
-제18회 건축박람회! 인테리어의 최신 트렌드를 알 수 있는…….
그때 뉴스 화면이 바뀌면서 건축박람회 광고가 흘러나왔다.
화면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맞다. 천마,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비워놔.”
“갑자기 무슨 말이냐.”
“건축박람회에 가야지.”
“건축박람회?”
“저기 말야.”
장채원이 가리킨 TV 화면에선 부스들이 설치된 커다란 전시장의 화면이 보이고 있었다.
“그게 뭐냐.”
천마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자 장채원이 TV 화면을 보며 말했다.
“저기에 흘러나오는 말 그대로야. 건축 관련 최신 제품들과 업계 트렌드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전시회라고나 할까? 다양한 인테리어 자재를 직접 볼 수 있고.”
“다양한 인테리어 자재라.”
턱을 쓰다듬은 천마의 눈빛이 반짝였다.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군. 정확히 어떤 자재를 말하는 거냐.”
“말 그대로 전부야.”
빙긋 웃은 장채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팸플릿을 가리켰다.
“유리 창호, 방수, 목재, 도장, 단열, 마감재 같은 건축 자재뿐만 아니라 내외장에 쓰는 인조석, 벽지, 주방, 조명, 소품과 같은 내부 인테리어, 그리고 타일이나 욕실 관련 제품들까지… 몽땅.”
“호오.”
줄곧 무심한 천마의 눈빛이 마침내 변했다.
지금까지 복복 인테리어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 외에는, 관련 자재들은 모두 책자에 그려진 사진이나 글로 배웠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많은 자재들을 전시해 놓는 전시회가 있다니.
“그렇다면 참석하도록 하지.”
천마의 호쾌한 대답에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은진 씨도 가야 하는 거 알죠?”
“저도 말임까?”
TV 화면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전 서류만 작성하니 상관없지 말입니다.”
“은진 씨도 이제 슬슬 인테리어 관련 지식을 익혀야죠.”
“넵?”
“나중에 매장을 차리더라도, 인테리어에 대해 공부를 해두는 것이 좋아요. 특히 인테리어 자재에 대해 알아두면 평생 동안 써먹을 수 있고요.”
“그렇슴까.”
머리를 긁적인 고은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마를 힐끔 바라보았다.
때마침 시선이 마주치자 천마는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시공을 위해서라도 배우는 게 좋을 거다, 회색 눈깔.”
“근육몬보다는 많이 알지 말입니다.”
천마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기대해 보지.”
일요일 오전.
클로버 컨벤션 센터.
이파리 모양으로 지어진 세 개의 전시장이 붙어 있는 곳이다.
제1, 2 전시관에선 건축박람회를, 제3 전시관에선 출산용품과 영유아용품을 전시하는 베이비페어가 열리고 있었다.
“뭐 이리 오래 걸리는 거냐.”
주차장에서 삼십 분째 거북이 행렬을 하고 있는 천마가 인상을 썼다.
운전을 배운 이래, 처음으로 교통체증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박람회를 보러 온 고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해소가 될 겁니다.]
“흠.”
다행인 건 무명이 몰려든 인파를 예측해 일찍 출발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주차장은 만석이라 천마는 30분이나 빙글빙글 돌다 간신히 라마스를 세울 수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천마는 무명의 안내로 건축박람회가 열리는 전시관으로 향했다.
“점주는?”
[연락 중입니다.]
띠리릭.
무명의 눈 센서가 여러 번 반짝이더니 장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미안. 차가 너무 막혀서… 좀 많이 늦을 것 같아. 무명에게 초대권 전송해 놨으니 먼저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을래?]
“알겠다.”
천마는 무명을 어깨에 올린 채 제1 전시관에 도착했다.
최근에 발매된 X-3 때문인지, 각성자가 아니어도 나노봇을 어깨에 매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휴대전화의 기능이 모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말 하나로 여러 가지 명령을 실행하는 나노봇.
그 편리함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X-3를 구매하고 있었다.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군.”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X-3의 외관은 둥글둥글한 무명의 외관. 즉 3세대 최신형 나노봇과 꾹 닮아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군요.]
무명은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X-3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이젠 던전뿐만 아니라 어디든 천마 님과 같이 다녀도 될 것 같습니다.]
“흠.”
박람회가 열리는 행사장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들이 바삐 움직이며 각 부스에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상당히 많군.”
전시장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책자에서만 보던 자재들. 그것들을 실제로 보고 만질 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를 상세하게 얻을 수 있다니.
“좋군. 아주 좋아.”
인파를 헤치며 걸어간 천마는 부스에 있는 자재들이나 혹은 전시물을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부스엔 제품에 관한 정보나 설명을 안내해 주는 홀로그램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때때로 자재에 관한 정보나 시공 방법 등을 부스에 있는 직원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직원들은 험악한 그의 인상에 놀라거나 긴장했지만, 이내 천마가 해박한 인테리어 지식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저희 슈퍼보드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에어로젤을 사용한 제품으로, 기존 사용하던 단열재들에 비해 300% 이상의 단열효과가 있으며 친환경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스에 있는 직원에게 새로 개발된 복합단열재 ‘슈퍼보드’에 대한 설명을 들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금까지 읽었던 책에는 나오지 않은, 그야말로 따근따근한 신상 제품이었다.
상세한 설명을 들은 천마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점주에게 이 제품을 권해보도록 하지.”
몸을 돌린 천마는 저 멀리 시계가 부착되어 있는 부스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구경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두 시간 넘게 제품을 둘러본 것이다.
“천마야!”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긴 머리에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숏컷에 정비공이 있는 점프슈트를 입고 있는 여성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장채원과 고은진이었다.
“미안 미안. 많이 늦었지.”
헐레벌떡 다가온 장채원이 두 손을 모았다.
“은진 씨를 태우고 간다는 걸 깜빡하고 너무 여유 있게 출발했지 뭐야.”
“괜찮다. 그동안 구경 잘했으니.”
“그래? 많이 구경했어?”
“그렇다. 상당히 좋은 제품들이 많이 있더군. 책자에 있는 것들과는 달리 새롭게 개발된 자재들이 많았다.”
천마의 한 손엔 부스에서 나눠준 팸플릿이 잔뜩 들어있 는 비닐 가방이 들려 있었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자재를 구경하고 연구한 흔적들이다.
“고생했어. 우선 밥부터 먹자. 배고프지?”
“여기서 말인가.”
“응. 저쪽에 푸드코너 있어. 우선 밥부터 먹자.”
장채원이 아이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천마와 고은진을 이끌려던 순간,
-우린 반각성자 단체, 스카우터다. 이 전시장엔 폭약이 설치되어 있다.
전시장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전시장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면 즉시 폭약을 터뜨리겠다.
-하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성을 들은 시민들이 한숨이 전시장을 크게 울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아 진짜. 저놈의 또카우터 놈들.
각성자들의 영리활동을 금지한다며 매번 도심에 테러를 저지르는 반각성 단체 스카우터.
미친놈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과 달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테러를 성공한 적이 없었다.
이젠 테러 시도가 일어나도 ‘오늘도 스카우터가 또 테러를 저지르다 실패했습니다.’라는 뉴스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시민들은 매번 실패하는 테러 조직, 스카우터를 어느새 ‘또카우터’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협회에서 각성자들이 나오길 기다려야 하잖아.”
전시장에 있는 시민들은 얌전히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툴툴거리고 있었다.
“저놈의 또카우터 녀석들. 왜 안 없어지는 거야?”
“몰라. 이제는 아예 폭탄 설치하고 녹음 방송만 틀어놓고 튄다잖아.”
웅성웅성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조금만 기다리자.”
“흠.”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문득 저 멀리 부스에 장식되어 있는 아트월을 바라보았다.
하얀 벽돌로 만들어진 아트월은 쏟아지는 간접 조명에 반사되어 유려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상하군.’
하지만 안력이 뛰어난 천마는 간접 등에 반사된 벽돌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단한 돌 재질이 아니라 마치 부드럽고 하얀 유기질을 일부러 벽돌처럼 만들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저 덩어리는…….’
과거 무명은 옥탑방의 주차장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체조직과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진 폭약이라고 했다.
“잠깐.”
천마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던 고은진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저거 혹시…….”
민간군사기업에서 일한 용병답게 고은진도 아트월에 부착된 벽돌이 인테리어 자재가 아니라, 생체조직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던전용 폭약이라는 걸 발견했다.
“저거 던전용 폭약 아닙니까?”
덩어리들이 희미한 빛을 내는 걸 발견한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곧 터질 것 같습니다!”
“알 게 뭐냐.”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때 무명이 재빨리 말했다.
[천마 님. 이곳에서 폭약이 터지면 주차장에 있는 천마 님의 라마스도 피해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웅!
폭음과 함께 아트월이 폭발했다.
그리고 시뻘건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려던 찰나,
우웅웅우웅…….
까맣고 어두운 구체가 만들어지더니 퍼져나가는 불꽃과 파편들을 흡수했다.
“근육몬!”
어느새 번개처럼 아트월로 쏘아져 나간 천마가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두 팔을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