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62화 (262/285)

제262화. 피로 물든 놀이동산 (3)

-저자는 인간이 아니다. 괴물… 아니, 사신이다!

트리플 스킬을 갖고 있는 마스터급의 각성자라고 해도, 그들은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전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스킬이 아닌, 단련된 육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맨몸으로 A급 스킬을 상대할 수 있는 거지.”

각성자 무리 중 한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무림에 갓 출도한 애송이들도 검법 하나를 익히기 위해 천일(千日)을 단련하지. 하지만 네놈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기술만 가지고 적을 상대하지 않느냐.”

떨고 있는 각성자들을 바라보던 천마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네놈들의 기술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 횟수나 범위의 제약도 있고.”

그제서야 각성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킬이라는 건 갑자기 얻게 된 복권 같은 것이다.

엄청난 돈이 갑자기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부처럼 그것을 쓰기만 한다.

큰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혹은 불어난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무인의 가장 훌륭한 무기는 바로 육체다. 하지만 네놈들은 스킬이라는 걸 얻어, 그걸 쏟아내기만 했지.”

각성자들은 스킬과 육체각성이 일어나는 순간, 더 이상 몸을 단련하거나 전투 기법을 연습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각성자에, 살인 기술을 습득한 암살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발현된 각성 스킬만을 어떻게 더 강력하고 교묘하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육체각성도에 따라 어떻게 전투를 하는지만 연구했을 뿐이다.

뚜벅뚜벅.

천마는 살기 가득한 모습으로 각성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전의를 잃은 각성자들은 주춤거렸지만 그건 그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한번 무인의 피가 끓었으니, 저들은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그때 걸어가던 천마의 몸이 갑자기 기우뚱거렸다.

몸 안에 들끓던 혈행이 가슴팍에서 멈춘 것 같고, 커다란 손이 목구멍을 움켜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어.’

그제서야 천마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방사선 무기의 존재를 떠올렸다.

방사능은 우리옷에서 흘러나오는 호신강기로 막을 수밖에 없는데, 내공이 바닥난 탓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던 것이다.

“크으으으.”

입가에서 피를 토한 천마는 억지로 내공을 운행시켰다.

콰릉!

야월극속을 끌어올린 그는 방사선 무기가 쏘아지는 곳의 실드를 찢기 시작했다.

“흐으으으.”

던전 코어 성분이 몸에 들어가 있는 탓에 실드는 천마의 몸을 밀어내었다.

지이이이잉!

전심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린 천마가 실드에 양손을 찔러넣었다.

지지지지직!

스파크와 함께 실드를 찢은 천마는 강력한 방사선을 쏘아내고 있는 무기를 향해 일권을 뻗었다.

쿠웅!

범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직경 16미터가 넘는 정방형의 방사선 무기가 푹 찌그러졌다.

마치 태고에 존재하는 거인이 발로 후려친 듯한 모습이다.

“크아아아!”

단숨에 파괴되지 않자 천마는 마지막 남아 있는 한 방울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권마칠식, 극전혼효!”

다섯 줄기의 강력한 권력이 실드를 크게 찢더니 네모난 방사선 발생기를 파고들었다.

쿠웅! 쿠웅!

억지로 권력을 쏟아내자 주먹 부근의 살점이 모두 찢어지고 우리옷이 트특 소리와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다.

천마는 허공으로 풀쩍 뛰어오르더니 또다시 일권을 뻗었다.

“뇌인파멸!”

콰직! 콰르르릉! 콰앙!

마침내 거대한 방사선 무기가 파괴되자 천마는 땅으로 내려섰다.

“후우… 후우.”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천마는 말 그대로 한 마리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방사선은 약간 줄었을 뿐이다.

이곳을 둘러싼 방사선 무기는 모두 넉 대. 천마는 그중에 하나만을 파괴했을 뿐이다.

“본좌는…….”

다시 한번 억지로 기를 운행시키려던 천마는 시야가 흐릿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주르륵.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쿠웅.

큰 소리와 함께 벌러덩 쓰러져 버렸다.

* * *

서유리는 펼쳐놓았던 스킬, 무한방벽을 스스로 제거했다.

에너지 블록 너머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진성령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이렇게 죽어가는데, 거기서 혼자 버틸 거야?

함정이 아닐까?

하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서유리는 진성령의 성향을 매우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거짓 정보로 항복을 받아낼 속셈이었다면, 그녀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말투로 자신을 자극했을 것이다.

‘장난스럽게 말했어. 놀리듯이.’

진성령의 목소리엔 자신감과 비웃음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걸 파악한 서유리는 즉시 무한방벽을 제거한 것이다.

“잘 생각했어.”

무한방벽을 제거하자, 나노슈트를 입은 수십 명의 각성자들과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진성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유리 씨는 못 당하겠네.

진성령은 말끔한 모습으로 나온 서유리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하니 협회 요원이 스킬 등급을 낮춰서 등록할 줄이야.”

사실 서유리는 등급을 속이지 않았다.

그저 불스아이 던전 사고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스킬을 연달아 펼쳤고, 그로 인해 극한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전투요원이 아닌 그녀는 딱히 극한 각성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성령은 서유리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스킬 등급을 낮춰 등록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천마 씨?”

그때, 진성령을 바라보던 서유리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제서야 각성자 무리 뒤쪽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천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천마 씨!”

서유리는 쓰러진 천마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죽은 듯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걱정 마. 아직 죽은 건 아니니까.”

쓰러진 천마를 바라보는 진성령의 눈빛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이자, 정말 강하던데? 이렇게 방사선 무기에 오랫동안 버틴 사람은 처음 봐.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야.”

“왜 약속을 어긴 거죠?”

“약속?”

“분명히 팀장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왜…….”

눈물을 흘리는 서유리를 보며 진성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 척하는 건지, 어지간히 홀린 건지.”

“뭐라고요?”

“이 남자, 협회 소속의 각성자야. 김수웅 실장 쪽이 아니라면… 아마도 협회장 쪽의 라인이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천마 씨는…….”

“미등록 각성자라고?”

피식 웃은 진성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우린 넷스피어(Net Spear)를 실행한 거야. 스킬 마스터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넷스피어.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중대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상.

혹은 국가재난 급의 위험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만 실행할 수 있는 통합정보국 최고의 암살 프로그램이다.

“이 모습을 봐.”

진성령은 안개가 걷힌 주변 풍경을 가리켰다.

이곳은 놀이동산이 아니라 어느 국도변의 황량한 폐공장이었다.

이곳에 설치되어 있던 놀이기구와 시설물들은 모두 스킬과 환각제를 이용한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바로 천마를 상대했다 몰살당한 암살자들이었다.

“이런 실력을 지닌 각성자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작은 인테리어 매장에서 노동을 하다 유리씨를 만났다고?”

“그건…….”

서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진성령의 말대로 누가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마 씨가… 협회 소속의 각성자라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김찬원은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천마는 누구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김찬원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서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협회의 연구 따위를 빼돌린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십 년 전부터 이와 같은 일을 계획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천마는 용모가 변했으며, 자신을 피하지 않았던가?

“정말이에요.”

서유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마 씨는 절대로 협회 소속 각성자는 아니에요.”

“뭐라고?”

“조사해 보면 되잖아요? 네?”

무릎을 꿇은 서유리가 두 손을 모았다.

어떻게든 천마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이 남자가 이유조차 모른 채 죽어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뭐, 협회 소속 각성자가 아니라면 살려둘 수도 있지.”

진성령은 서유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선 보관해 두었단 자료들부터 돌려줘야겠지만.”

그 순간, 서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자료를 넘긴다고 해도 천마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겠어요.”

순순히 대답한 그녀는 천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진성령이 두 손을 가로저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천마 씨가 갖고 있는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어요. 그 자료.”

“그래?”

진성령이 뒤에 서 있는 부하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이 천마에게 다가가 품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닌데.”

“정말이에요.”

서유리는 천마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천마 씨는 강해요. 제가 숨겨놓은 것보다 천마 씨 휴대폰에 숨겨두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타고 온 차량부터 조사해 봐.”

진성령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천마 씨.”

서유리가 조심스럽게 천마에게 다가가려 하자 각성자 부하가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성령이 나직이 말했다.

“놔둬.”

어차피 이곳엔 실드와 방사선 무기가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심지어 저 천마라는 사내는 이미 방사능에 노출되어 빈사 상태가 아닌가?

“천마 씨.”

무릎을 꿇고 천마의 손을 붙잡은 서유리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입가에 피가 말라붙은 천마는 반응조차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다.

그때 천마의 차량을 조사하러 갔던 각성자들이 돌아와 진성령에게 말했다.

“차량에도 없습니다.”

진성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서유리는 천마의 두 손을 꽉 잡은 채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

그 순간 서유리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성령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힐?”

저것은 치료 스킬을 가진 힐러들에게서나 나오는 투명한 빛이 아닌가?

“당장 그녀를 막아!”

놀란 진성령이 크게 소리칠 무렵,

지잉. 착착착착.

연녹빛의 에너지 블록이 그녀의 주변으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S급 엄폐물 생성 스킬, 무한방벽이었다.

“안 돼!”

에너지 블록이 거의 다 만들어지자 진성령은 한 팔을 벌렸다.

파앗!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은색의 광채가 번뜩였다.

천마는 꿈을 꾸고 있었다.

도달한 경지를 스스로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량(無量)에 도달한 이후 천마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공이 모두 소멸된 채 죽어가는 상태가 되자, 천마는 깊고 긴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 사귈까요?

천마는 꿈속에서 서유리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딱 세 번만 더 만나요.

서유리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장점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천마 씨라면 세 번만 만나도 제 장점을 알게 될 거라 믿어요.

‘그렇군.’

천마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서유리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천마가 갖고 있는 관심사, 성격, 가치관을 한눈에 파악하고 이해했다.

또한 부드러우면서 당돌했고, 배려심이 많으면서도 고집이 있었다. 용모 또한 여러 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독특한 미녀였다

정말이지, 장점이 많아도 너무 많은 여성이었다.

-만나다 보면 천마 씨도 날 좋아하게 될 거예요. 분명.

결국 다시 만난 서유리는 두 달간의 시간을 두고 내기를 했다.

두 달 동안 마음을 뺏겠다는 내기를.

그리고 천마는 서유리를 만날 때마다 곤란함을 느끼면서도 묘한 즐거움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지.’

천마는 두 달을 하루 앞두었지만 서유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저 그녀는 흥미로운 여성이었을 뿐, 천마의 마음을 뺏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본좌가 이긴 거다.’

승리를 확신한 천마는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

눈을 뜨자 천마의 앞에는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얼굴 곡선, 커다란 눈망울. 더없이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성, 바로 서유리였다.

“일어나셨어요?”

천마를 응시하는 서유리의 눈에는 사랑이 담뿍 담겨져 있었다.

“뭐냐.”

천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캄캄한 공간 속에서 그는 서유리의 무릎을 벤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본좌가 왜…….”

눈을 껌뻑이던 천마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다시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그때 천마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빙그레 웃고 있지만 서유리의 안색은 극히 창백했다.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끈적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너는…….”

그제서야 천마는 서유리의 등 뒤에 예리한 송곳이 꽂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무한방벽이 만들어지기 전, 진성령이 쏘아낸 원거리 공격 스킬, ‘금속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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