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61화 (261/285)

제261화. 피로 물든 놀이동산 (2)

무시무시한 협박에 여성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사라졌다.

“팔을 내밀어 주시겠어요?”

긴장한 표정을 바꾼 여성이 팔찌를 다시 내밀었다.

천마는 대번에 그것이 평범한 팔찌가 아니라는 걸 간파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덤덤히 팔을 내밀었다.

찰칵.

겉으로 보기엔 가벼워 보였는데 막상 손목에 하자 쇳덩이와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성의 안내에 따라 천마는 놀이동산 입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아아악.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옅은 안개가 사방에서 피어오른다.

어느새 앞장을 섰던 여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고, 사방에 설치된 놀이기구에선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대낮에서 밤이 된 것만 같은 분위기다.

-따라라라 당당당당.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선 경쾌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개 속, 반짝이는 빛과 함께 움직이는 놀이기구는 마치 위험하고 기괴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파앗.

그때 천마의 뺨 부근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주르륵.

놀랍게도 갈라지더니 검붉은 피가 살짝 흘러나왔다. 예리한 칼로 힘껏 내리쳐도 상처 입지 않는 피부가 스쳐 지나간 암기에 찢어지다니?

치이이.

그때, 손목에 착용한 팔찌에서 희미한 연기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미세한 침이 튀어나와 피부를 뚫어놓고 무언가를 주입하고 있었다. 이미 주입이 다 되었는지 뾰족한 침은 거의 녹아서 연기가 되었다.

아마도 천마의 금강불괴를 무효와 시킬 만한 굉장한 독극물이 주입된 것 같다.

“안개가 괜히 피어나온 것이 아니었나.”

천마는 이자들의 치밀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독을 숨기기 위해 줄곧 안개를 뿌리고 있었던 것 같다.

파파팟!

그때 또다시 무언가가 천마의 몸을 파고들었다.

“싸구려 암살밀기 수법이로군.”

암살밀기, 혹은 백살밀기라고 불리는 이 수법은, 살수들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인간들을 은밀히 죽이는 비법을 뜻한다.

파파파파파팟!

천마가 가볍게 암기를 피하자 이번엔 수십 개의 암기가 쏟아졌다.

“흥.”

코웃음을 친 천마가 순식간에 신법을 펼쳤다.

암기를 쏘아낸 자를 포착해 단숨에 쳐 죽이려는 것이다.

“호오.”

하지만 암기를 쏘아낸 듯한 곳엔 아무도 없다.

“제법이군. 본좌의 이목을 잠시나마 속일 수 있다니.”

순간 천마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백 장 밖의 두더지가 땅에서 움직이는 소리조차 잡아내는 초감각으로도 암습자의 위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파파파팟.

파공음과 함께 이번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기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흥.”

낮게 코웃음을 친 천마는 양팔을 벌려 쏟아지는 소매로 모두 받아내었다.

“수법을 되돌려 주지.”

천마는 무림을 횡행하며 수많은 살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살수들의 무학을 상대하기 위해선 살수들의 무학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천마는 살수지학(殺手之學)을 창시한 사황(死皇)과 사제(死帝)의 유학을 익혔기에 그 누구보다 암살밀기에 능통했다.

번쩍!

싯누런 빛이 천마의 눈동자를 뒤덮을 무렵,

“흐흐흐.”

낮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휙 소리와 함께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목표물을 놓친 암살자들의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멍청한 살수들이군. 목표를 놓쳤다고 소리를 내다니.”

파아!

지금까지 쏘아졌던 암기들이 바위처럼 허공에 떠오르더니 사방으로 비산되며 쏟아졌다.

퓨퓨퓨퓨.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사방에선 낮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쏟아진 암기들을 모아둔 천마가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수법으로 다시 쏘아낸 것이다.

후두두둑.

쏘아낸 암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하늘에선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천마는 암기에 맞아 쓰러진 암살자들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투명한 빛이 흐르는 나노슈트를 이고 있었는데, 고통스런 표정으로 손과 발을 허우적거렸지만 전혀 소음이나 기척도 발생하지 않았다.

“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 따위로 본좌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니.”

암살자들이 착용한 것은 새로 개발된 능동위장슈트였다.

이 슈트는 모습뿐만 아니라, 움직일 때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을 제거하는 N.V.C(Noise Vibration Canceler)가 장착되어 있었다.

-제법이군요.

그때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 놀이공원에 모여든 암살자들을 지휘하고 있는 진성령의 목소리였다.

-고속 이동 능력자들로 구성된 암살팀을 단번에 처리하다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줄곧 천마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NVC가 장착된 능동위장슈트를 입고 있었나요?

그녀는 천마가 모습을 감출 수 있었던 이유가, 암살자들이 착용한 것과 똑같은 위장슈트를 착용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소속과 목적을 밝힌다면…….

“시끄럽군.”

또다시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오자 천마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휘익.

예리한 지풍이 사방으로 쏟아졌지만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를 헛되이 지나갔다.

이제 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은 모두 실제가 아니라 환영(幻影)이었던 것이다.

-호호호.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선 살벌한 진성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아요. 사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당신은 이곳에서 죽을 거야.

그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천마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흠.”

팔찌를 착용한 부위의 왼 손목의 피부가 점차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금강지체뿐만 아니라 만독불침도 깨어진 건가.”

호흡을 들이마실수록, 일 갑자를 상회하던 내공도 서서히 소실되어 갔다.

가로등이나 놀이기구가 환영이라는 걸 파악하지 못했던 것도, 예리한 초감각이 둔화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나.”

그제서야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천마가 몸을 웅크리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지이이잉.

백여 미터 가까이 허공으로 치솟자 갑자기 투명막에 부딪치더니 스파크가 일어났다.

“실드?”

인상을 찌푸린 천마가 안개 너머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 부채꼴 모양의 기계들과 이상한 파장을 뿜어내는 기계들이 놀이동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건…….”

부채꼴 모양의 기계를 내려다보던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실드경계지역에 세워진 실드 발생 장치를 축소해 놓은 듯한 기계 장치다.

타악.

그제서야 대충 상황을 파악한 천마가 땅으로 내려오자, 때맞춰 스피커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팔찌에 주입한 건, 던전 코어 성분이에요. 한마디로 지금 당신은 던전 속의 몬스터가 된 거나 다름없죠.

실드 발생 장치는 던전 코어 성분이 들어 있는 생물체를 자석처럼 밀어낸다.

이들은 천마가 도망갈 수 없도록 팔찌에 던전 코어 물질을 집어넣고, 사방으로 실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저 옆의 기계들은 지향성 방사선 방출기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각성자라도 죽어 나갈 수밖에 없죠.

과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정세를 좌지우지한다는 통합정보국이었다.

일개 각성자 하나를 죽이기 위해 던전 코어 성분이 든 물질을 몸에 주입하고 소형 실드 발생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실드 안에 가둬 확실히 죽일 수 있도록 방사선 무기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한 독이군. 체내에 흡수되지 않지만 서서히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니.”

독 하나로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깨뜨리다니.

그것은 지금까지 천마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비한 독, 방사성 물질이었던 것이다.

콰직.

팔찌를 부순 천마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웅웅.

사지백해에 퍼진 반극진기를 발산하자, 낮은 진동과 함께 우리옷에서 희미한 광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옷의 공능인 호신강기가 발동된 것이다.

“후우.”

호신강기가 퍼지자 몸을 파괴했던 방사능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노출이 된 탓인지 서서히 소모되었던 내공은 회복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모니터를 통해 천마를 관찰하던 진성령의 목소리가 또다시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당신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여기서 죽을 테니까.

천마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닌,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좌가 죽는다… 라.”

허리를 꼿꼿이 편 천마는 줄어 들어가는 반극진기를 더욱 세차게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기대해 보지.”

* * *

인피티니 베리어.

원하는 모양대로 에너지 블록을 만들 수 있는 A급 엄폐물 생성 스킬이다.

서유리는 이 스킬로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을 넘겼고, 불스아이 던전에서도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킬까지 속이고 있었나.”

사방에 퍼져 있는 나노드론을 통해 현장의 상황을 스크린으로 바라보던 진성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크린에는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둥그런 에너지 블록을 향해 스킬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공격에도 에너지 블록은 파괴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교활한 토끼는 도망가는 굴을 세 개나 파놓지[狡免三窟]…….”

진성령이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유리가 펼친 건 A급 스킬인 인피티니 베리어가 아니라, S급 엄폐물 스킬인 ‘무한방벽’이었다.

두 스킬 다 똑같이 에너지 블록을 자유자재로 생성한다.

하지만 스킬 유지 시간과 막아낼 수 있는 충격량은 하늘과 땅 차이.

서유리는 스킬 등록란에 무한방벽이 아닌 인피티니 베리어로 입력했고, 실제로 등록할 때도 고의적으로 스킬을 낮춰 펼친 것이다.

“이 정도라면 반나절도 더 버티겠는데.”

무한방벽의 최대 장점은 바로 내구성이다.

비록 사람 하나만 간신히 보호할 수 있는 에너지 블록을 만드는 대신, 그 내구성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실제로 스크린 속 암살자들이 쏟아내는 강력한 스킬들을 막아냈고, 심지어 방사선조차도 투과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진성령은 다시 천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저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바로 서유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남자친구다. 저 사내를 이용한다면 바위처럼 단단히 버티고 있는 서유리를 단숨에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극한의 전투.

천마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극한의 전투를 맛볼 수 있었다.

내공은 바닥이 난 상태였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방사능 물질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천마대능력을 끌어낼 힘을 모조리 우리옷에 주입한 그는 맨손으로 각성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콰앙! 피잉!

폭발, 염동력, 전기, 바람 등등… 원거리 딜러들이 온갖 스킬을 쏟아내면,

카앙! 지직. 우지직.

단분자 커터와 플라즈마 나이프를 든 전투요원들이 천마에게 덤벼든다.

그들은 모두 고속 이동과 실드 스킬, 독극물 생성, 경질화 등.

근접전투에 최적화된 스킬을 가진 각성자였다.

콰르르르! 콰앙.

쏟아진 칼날 바람에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날아간 천마가 다시 허공으로 몸을 착지했다.

이들은 천마와 같은 강자들을 상대하는 데 매우 능숙했을 뿐 아니라, 스킬을 절묘하게 배분해 공격했다.

만약 천마의 몸 상태가 온전했다면 그들의 공격을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금강지체와 만독불침이 깨졌으며, 내공이 바닥난 상태다.

만약 우리옷을 통한 호신강기가 없었더라면, 천마는 이미 수십 명의 각성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몸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후두둑.

무너진 콘크리트 벽 사이로 일어난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흐흐… 하하하하!”

내공을 돋운 상태도 아니었건만 천마의 웃음소리는 한줄기 벽력이 되어 각성자들의 귀를 울렸다.

“재미있군! 아주 재밌어!”

우리옷에 머물러 있었던 호신강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각성자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원한다면 손가락 하나로 태산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천마였다.

그의 몸에 내재된 내공과 절세무학들은 토해낼 수도, 그렇다고 소멸시킬 수도 없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한 몸이 되어 인간들과 혈투를 벌이다니… 어찌 즐겁지 않을쏜가?

-저놈은 미친놈이다.

걸어오는 천마를 바라보던 각성자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질려 있었다.

분명 몇 번이나 치명상을 입혔는데,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스으으윽.

그때, 곳곳이 찢겨 너덜거리던 천마의 우리옷이 시간이 지나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세계의 힘으론 파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천마가 받는 충격을 상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오지 않는다면 본좌가 가지.”

송곳니를 드러낸 천마가 신법을 펼치려 하자,

사악.

어느새 파고든 한 각성자의 단분자 커터가 천마의 목을 찔러갔다.

“흥.”

천마는 가볍게 피해냈지만, 그때 강력한 염동력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빠가각.

찔러오는 단분자 커터를 팔뚝으로 막자 깊이 들어간 칼날이 뼈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고통에 차 뒤로 물러섰겠지만, 천마는 달랐다.

“거리조차 계산하지 못하는군.”

천마는 오히려 단분자 커터를 더욱 뼛속 깊숙이 박아넣고는, 다가온 각성자의 가슴팍에 일권을 날렸다.

콰직.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달려든 각성자의 가슴팍이 함몰되며 피를 내뿜었다.

스으윽.

사선으로 깊이 박힌 단분자 커터를 팔뚝에서 뽑아낸 천마가 혀를 할짝거렸다.

“너희들은 구경만 할 셈이냐.”

-전원 공격!

자존심이 상한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다시 한번 이를 깨물고 총력을 다해 공격을 펼쳤다.

호신강기가 사라진 천마는 쏟아지는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무공을 펼쳤다.

콰직! 빠드득. 퍼억! 쿵!

각성자들이 살갗을 찢으면, 천마는 번개처럼 다가와 뼈를 박살 낸다.

비처럼 쏟아지는 스킬은 음양전번(陰陽轉飜)과 같은 상승 무학의 교묘한 법문을 사용해 튕겨내고, 때로는 등과 어깨로 막아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을 쏟아내면, 심지어 머리와 엉덩이로 받아내기도 했다.

사방에 떨어진 무기들과 돌을 총처럼 쏟아내기도 하고, 갑자기 바닥을 구르다가도 허공으로 치솟아 불줄기를 쏟아낸다.

“흐흐흐. 아주 좋아.”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혈인(血人)처럼 변한 천마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오너라. 끓어오르는 본좌의 피가 식지 않느냐.”

“…….”

혈염광휘가 피어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각성자들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