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60화 (260/285)

제260화. 피로 물든 놀이동산 (1)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밀실.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만이 켜져 있는 내부에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도록.”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면이 부착된 검은 헬멧을 쓴 남성이었다.

마치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연상케 하듯, 가면은 해골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묘한 광택이 흘렀다.

“하지만 서유리, 그녀는 아까운 인재입니다.”

남성의 맞은편에 서 있던 데이터 마이닝 팀장, 진성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꽤나 공을 들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지금 저희 쪽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쳤는데.”

얼마 전 서유리를 만난 진성령.

그녀는 서유리가 통합정보국에 들어오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터였다.

“지금까지 봐왔던 요원 중에 가장 똑똑하고 입이 무겁습니다. 심지어 협박을 당했음에도, 협회 쪽에 붙지 않았죠.”

“상관없는 일이다.”

“무슨 말이죠?”

“어차피 처리해야 할 대상이니까.”

헬멧을 쓴 남성이 덤덤하게 말했다.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스크린에 떠 있는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천마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외국인 등록증이 띄워져 있었다.

“그저 평범한 외국인 노동자일 뿐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검은 가면을 쓴 남성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인재가, 외국인 노동자와 퍽이나 만나겠군.”

“네?”

남성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스크린에 떠 있는 화면이 바뀌며, 거대한 덤프트럭이 주유소를 달려오는 장면이 보였다.

그런데 주유소에 서 있던 남성이 앞으로 나서자, 갑자기 덤프트럭이 쓰러지듯 방향을 틀어 농로에 처박혔다.

콰앙!

불길과 함께 트럭이 폭발하자 남성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려 차량으로 돌아갔다.

과거 남현욱이 천마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암습을 했던 영상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주변 CCTV가 모두 지워져 있더군.”

진성령은 눈을 반짝였다.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CCTV를 해킹해 그 화면만을 감쪽같이 지우는 건, 일개 해커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운 좋게도 트럭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의 메모리는 간신히 살릴 수 있었지.”

“그렇다면…….”

“협회에 소속된 실력자겠지. 상당한 힘을 가진.”

“김수웅 실장의 직속 라인은 제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저런 자는…….”

“김수웅 실장 라인이란 말은 하지 않았는데.”

진성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수웅 실장 외에 누가 저만한 인물을 직속으로 데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협회장.”

단칼에 말을 자른 남성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도 굵었다.

“그자가 보낸 인물일 수도 있지.”

순간 진성령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협회장.

이십여 년간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어둠 속에서 협회를 조종하고 있는 흑막.

과거 박정민 실장도, 심지어 지금의 김수웅 실장마저도 협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진성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리가 협회를 그만둔 것도, 저 남성에게 빠진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다. 차라리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쩔 수 없나.’

진성령은 침음을 했다.

정보 조직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한번 조직에 몸을 담으면 끝까지 올라가야 하고,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모품으로 쓰여지고 버려질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아까워. 그녀를 통합정보국에 빨리 넣어두었어야 했는데.’

진성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서유리를 통합정보국 내의 자신의 정보통으로 만들 속셈이었다.

음모와 암투로 뒤섞여 있는 이 통합정보국에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만의 라인이 필요했으니까.

“직접 처리하도록.”

“네?”

진성령은 움찔했다.

작전 요원도 아닌 자신을 현장, 그것도 암살 작전에 나서라니. 그건 폐기처분에 가까운 명령이 아닌가?

“걱정할 필요 없어. 확실히 처리하려는 것뿐이니까.”

갑자기 남성은 진성령에게 패널을 내밀었다.

바로 통합정보국에서 발동할 수 있는 최고 암살 작전 프로그램, 넷스피어(Net Spear)였다.

“넷스피어…….”

진성령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넷스피어.

가변던전 공략 시에나 사용하는 이동식 실드 발생 장치와 방사선 방출기를 이용.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강력한 각성자를 암살하는 통합정보국의 최상위 암살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 우리나라를 공포로 빠뜨렸던 정신조종 스킬 각성자에 대해 사용이 승인되었다는 작전이 왜 이곳에 적혀 있단 말인가?

“국가 전복 사태도 아니고, 고작 4급 각성자를 처리하기 위해 넷스피어 프로그램을 실행한단 말인가요?”

“이 천마라는 남성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헬멧 남성은 다시 한번 서유리에게 패널을 내밀었다.

“만약 협회장이 심어둔 인물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니까. 그리고…….”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 확실히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김수웅 실장의 의심을 사게 될 게야.”

무섭도록 냉정한 김수웅의 눈빛을 떠올린 진성령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그녀는 남성이 내민 패널을 천천히 받아들었다.

일요일 아침.

서유리는 직접 만들어놓은 도시락을 차에 넣고 바삐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시원스럽게 고속도로를 달리던 빨간 스포츠카가 톨게이트를 지나 한적한 국도변을 달렸다.

“어라?”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이상하다.

화창한 해가 떠 있어야 할 국도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마치 펄펄 끓는 냄비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갑자기 웬 안개가.”

비상 버튼을 누른 서유리는 자율주행 장치의 버튼을 켰다.

그러자 핸들이 마름모 모양으로 변하더니, 안개 속 도로를 알아서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끼이익.

한참을 달리던 차량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핸들을 급히 틀더니 어디론가 빠지기 시작했다.

“뭐지?”

화면 속에 보이는 입체 화면에는 도로가 직선으로 되어 있는데, 차량은 우측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

그런데 점차 안개가 걷히더니 커다란 주차장이 보인다.

바로 놀이동산의 주차장이었다.

“뭐야? 왜 벌써 도착했지?”

서유리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다시 튀어나온 운전대를 손으로 잡았다.

휘잉.

바리케이드가 열리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자 서유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일요일 오전이라면 놀이동산이 한창 입장하는 사람들로 붐빌 시간이다. 그런데 주차장에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린 서유리는 차에서 내려 매표소로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매표소 안에는 정복을 입은 여성이 방긋 웃으며 맞아주었다.

“혼자 오신 건가요?”

“아뇨. 조금 있다 일행이 올 건데… 오늘따라 사람이 거의 없네요?”

“그러게요. 티켓 발권해 드릴까요?”

“아, 네. 성인 둘이요.”

서유리가 카드를 내밀자 매표소 직원은 손을 뻗어 카드를 받아 들었다.

직원의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매표소 직원이 각성자?’

직원의 식지와 엄지에는 딱딱하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 굳은살은 던전 생활을 오래 하는 각성자들. 특히 단분자 커터를 자주 사용하는 각성자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이었다.

‘뭔가 이상해.’

서유리는 다시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국도를 메우고 있던 안개가 어느새 주차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유리 씨?”

몸을 돌리자 매표소 직원 여성이 두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미소 지었다.

“돌아가는 길은 없어요.”

* * *

천마는 일요일 아침부터 라마스를 닦고 있었다.

세차를 하는 일은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건만, 걸레질을 하는 그의 표정이 비장하다.

오늘은 서유리와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절대 오늘만큼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 하루로 본좌의 마음이 바뀔 리 없지.”

내일이면 약속한 두 달의 시간이 모두 끝이다.

천지개벽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내기는 천마의 승리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 어딘가에선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건 천마로서도 알지 못하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이었다.

스으윽.

그런데 저 멀리서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신채영이었다.

“어디 가요?”

요즘 들어 신채영은 하이에나처럼 천마의 주변을 연신 어슬렁거렸다.

그것은 서유리가 등장한 이후부터였으나, 천마는 그저 드문드문 나타나는 신채영이 성가시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말 못 들었어요?”

그녀의 물음에도 천마는 대답 없이 차를 닦고 있었다.

노골적인 무시다.

하지만 신채영도 평범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마에게 한 발짝 다가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 먹어요.”

“먹을 거다.”

“아니, 같이 먹자고요.”

“거절한다.”

“거절은 없어요.”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자 천마의 굵은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신채영은 차가운 외모와 달리 상당한 고집불통에 멋대로 우기는 경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마를 어려워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곤란하군.’

그녀는 수많은 인간군상을 살피던 천마조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평소 같으면 불같은 호통을 날릴 테지만, 이상하게도 신채영에겐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선약이 있다.”

“다음으로 미뤄요.”

또다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답이 돌아왔다.

만약 그녀가 작정하고 고집을 피운다면 오늘의 승부를 망칠 수도 있다.

“다음에 먹도록 하지.”

천마는 더 이상 그녀와의 입씨름을 포기하고 라마스에 올라탔다.

부르르릉.

시동을 켜자마자 예열도 하지 않고 재빨리 주차장을 벗어났다.

아마도 이것은 천마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황급히 피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구나.”

일전에 봤던 서유리의 도도한 얼굴을 떠올리자, 신채영의 눈동자에선 초록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의 색채다.

그것은 질투라는 감정의 색깔이었으나, 그녀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가슴속이 답답하다. 대체 저 바윗돌 같은 남성에게 왜 자꾸 이상한 감정이 드는 걸까?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양손을 내려다보던 신채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론 안 돼.”

오늘 담판을 지어야겠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인지.

멀어져 가는 라마스를 바라보던 신채영은 주머니 속에 있는 903트럭의 열쇠를 매만졌다.

끼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천마의 라마스가 놀이동산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무명은 천마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혼자 집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과거 그는 장채원과 함께 이 근방에서 능웅신의 신뢰를 해본 적이 있다.

무명의 안내 없이도 놀이동산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흠.”

국도를 따라 운전하던 천마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갑자기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시야를 가린다. 천마는 한눈에 그 안개가 허상이라는 걸 간파했다.

그것은 온갖 진법에 능통한 천마만이 간파할 수 있는 환영이기도 했다.

“알량한 수작이군.”

안개로 뒤덮여 있지만 천마의 눈엔 멀쩡한 도로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안개가 유도하는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을 따라간다면 이 안개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흐흐흐.”

천마의 입에선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정도 넓은 지역에 안개와 같은 환영을 퍼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 일을 꾸민 자들은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강자와의 싸움에 메말라 했던 천마의 갈증이 오늘 풀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후우우욱.

도로를 따라 달리자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그곳은 평범한 놀이동산의 입구였으나, 천마는 마치 가변던전 지역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입구 앞으로 들어가려 하자 제복을 입은 여성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천마 씨죠?”

천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무림도 아닌, 다른 세계에서 생판 모르는 인간이 자신을 ‘천마’라고 알아보다니.

“아, 서유리 씨가 성함과 인상착의를 말해주셨거든요.”

여성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플라스틱 팔찌를 내밀었다.

“서유리 씨가 먼저 표를 끊어두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천마는 서유리가 위험에 빠졌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걸 손목에 착용하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뭐냐.”

“입장권입니다. 이걸 착용하셔야만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성은 천마가 의심한다는 걸 느꼈는지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돌아가셔도 상관없어요.”

“돌아가라고?”

“물론 천마 씨가 돌아간다면 서유리 씨가 비명 속에서 죽게 되겠지만요.”

“흐흐흐.”

천마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리석구나.”

“네?”

“속아주지.”

혈염광휘가 타오르는 눈으로 여성을 내려다본 천마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좌를 농락한 대가가 어떤 건지… 지옥에서 울부짖으며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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