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천마, 서유리와 술을 마시다 (2)
숯불향에 뒤덮인 채 구워지는 막창구이의 향기는 입가에 침이 고이게 만들 정도였다.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서유리는 평상을 가리켰다.
그곳엔 그녀가 준비한 여러 가지 채소와 밑반찬들이 있었다.
일회용 접시가 아닌, 제대로 된 통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집에 있는 음식들을 정성스레 담아온 것 같다.
“천마 씨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반찬들을 좋아한다고 해서요.”
“으음.”
“아, 그리고 이거.”
그녀는 커다란 곰이 그려진 소주병 하나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천마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술병이었다.
“새로 나온 증류식 소주인데, 정말 맛있어요.”
뽕.
코르크 마개로 된 술병을 따자, 입가에 침이 고이는 향긋한 향이 풍겨 나왔다.
“부담 갖지 마세요. 내기를 하자는 게 아니니까요.”
서유리는 술보다 더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천마 씨랑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천마는 깊은 갈등을 느꼈다.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안주,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소주.
도저히 먹지 않고서는 못 배길 조합이다.
‘얕볼 수가 없군.’
천마는 그녀가 자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음식의 취향까지 파악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역시 파고는 공격을 마냥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좋다.”
생각을 마친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평상에 앉았다.
“같이 한잔하도록 하지.”
달이 휘영청 떠 있는 밤하늘 아래, 옥탑방에선 조용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천마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독한 증류소주를 열병이나 비웠다.
입에 착 붙는 술도 술이지만, 숯불에 구워 먹는 막창과 대창구이의 고소함은 상당했다.
기름기에 질릴 무렵, 서유리는 양념을 한 막창과 대창을 꺼내 숯불에 볶아주었다.
“어때요?”
서유리의 질문에 마지막 소주병을 비운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맛이군. 술안주에 이만한 것도 없을 것 같다.”
“다행이다.”
서유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천마는 서유리가 지금까지 거의 술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안 마시나.”
“그러게요. 원래는 진탕 마시고 취하고 싶었는데…….”
천마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서유리가 배시시 웃었다.
“천마 씨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대리만족을 했나 봐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천마와 같이 있으니 답답했던 기분이 다시 상쾌해졌다.
머릿속에 담고 있었던 지저분한 먼지가 빗물에 씻겨 내려간 듯한 기분이다.
“좋네요.”
탁탁.
장작에서 튀는 작은 불똥이 허공에서 타오른다.
서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비록 한 시간 동안 나눈 대화라곤 방금 전의 이야기가 전부였으나, 너무나 만족스런 시간이었다.
“이 이상의 데이트는 없다고 생각될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피어오르는 불꽃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가볼게요.”
순간 천마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낮게 중얼거리려던 천마가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서유리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다음번에 헤어질 땐 천마 씨가 아쉽다고 느껴질 거예요.
사실 아쉬운 건 술과 안주였다.
서유리가 준비한 술과 안주는 천마가 약간 아쉽게 느껴질 만큼의 양이었으니까.
‘의도한 건가.’
어떤 형태로든 아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 이번 승부도 천마의 패배인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고개를 가로저은 천마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오늘 승부도 그대의 승리로군.”
어쩌면 이 말은, 천마가 살면서 처음으로 인정한 패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서유리의 얼굴엔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내기… 이제 그만할까요?”
“무슨 말인가.”
“너무 삭막하잖아요.”
“내기라는 것이 원래 매정한 법이지.”
“두렵기도 하고요.”
천마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패배할까 봐 말인가?”
“아니요.”
별빛을 담아놓은 듯 반짝이던 서유리의 눈동자가 잠시 동안 빛을 잃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진다고 해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할까 봐서요.”
순간, 길고 긴 적막이 흘렀다.
서유리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천마 씨가 이긴다고 해도 내가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천마 씨가 진다고 해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서유리는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을까? 그 건 천마도 알 수 없었다.
‘고독한 거였나.’
고독함을 느끼는 자는 타인의 고독함도 감지할 수 있다.
오늘에서야 천마는 서유리가 지독한 고독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천마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재산을 물려받고 부유하게 살아왔다지만, 그녀의 인생에도 큰 유감은 있었다.
부모님이 너무 일찍 던전에서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그녀는 던전과 몬스터를 증오하게 되었으니까.
평생 던전을 없애기 위해 살아온 그녀의 인생 역시 어쩌면 기나긴 고독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것이다.
“갈게요.”
서유리는 천마에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도 메말라 있었다. 만약 천마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위로할 줄 모른다.
날카로운 고슴도치는 서로를 껴안을 수 없다. 그저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심히 가라.”
“네.”
서유리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만족했다.
천마와 밤새 옥탑방에 앉아 불을 피우며 앉아 있던 추억. 그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주방에서 바삐 요리를 하던 서유리는 문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커다란 별이 그려져 있었고 ‘마지막 데이트’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어느덧 내기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일은 천마와 마지막으로 약속한 데이트였던 것이다.
“시간이 너무 빨라.”
달력을 바라보던 서유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멈추었다.
일전 마지막 데이트로 그녀는 희미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는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노력한다면,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내기를 하지 말 걸 그랬어.”
만약 두 달간의 내기를 하지 않고 일 년이라면 어땠을까?
서유리는 반드시 천마의 마음을 뺏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결국 마지막 데이트 날이 다가왔다. 서유리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마지막 하루라도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겠… 아얏.”
채소를 손질하던 그녀는 날카로운 식칼에 살짝 베었다.
“뭐야. 이게 이렇게 날카로웠나.”
황급히 휴지를 끊어 손가락을 감싸 쥔 서유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질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4급 각성자다.
평범한 식칼 따위에 결코 피부가 깊이 베일 수가 없는 것이다.
“…….”
휴지를 뗀 서유리는 베인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은 핏물을 보자 서유리는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사흘 전, 갑자기 찾아왔었던 진성령 팀장의 붉은 입술을 떠올린 것이다.
‘팀장님이 스파이였다니.’
깊은 한숨을 내쉰 서유리는 진성령을 만났던 그 날의 상황을 떠올렸다.
“잘 지내는 거지?”
조용한 커피숍에서 만난 진성령은 서유리를 보자 매우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협회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표정이다.
진성령은 누구보다 서유리를 매우 신임했고 아낌없이 이끌어주었다. 실제로 굵직한 프로젝트는 모두 서유리가 도맡다시피 했었다.
“네에. 팀장님 덕분에요.”
서유리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협회를 관둔 탓에 자신을 아껴주던 진성령의 기대를 저버린 셈이었으니.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서유리의 질문에 진성령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잘 지내나,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하지만 진성령의 눈빛은 매우 깊었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유리 씨.”
“네.”
“던전 안전기술원의 스카웃 제안을 왜 거절한 거야?”
“어떻게 그걸 팀장님께서…….”
서유리가 놀라며 더듬거리자 진성령이 대답 대신 엷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서유리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팀장님도 그쪽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이신 건가요?”
“스카웃 제안?”
“아닌 거죠?”
서유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진성령이 실소를 터뜨렸다.
“유리 씨, 이쪽 일 너무 오랫동안 쉰 거 아냐?”
“네?”
“분석력도 직감도 상당히 떨어진 거 같네.”
고개를 가로저은 진성령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 애당초 그쪽이야.”
쿵.
순간 서유리는 머릿속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그런.”
몸을 파르르 떠는 서유리는 내려다보던 진성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통합정보국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서유리 씨가 매번 연구자료를 몰래 백업하고 반출하는 걸 들키지 않을 수가 있겠어?”
서유리는 눈꼬리뿐만 아니라 손끝까지 파르르 떨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녀는 자신이 연구, 분석하는 자료가 던전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불안감을 느낀 그녀는 몰래 연구자료를 나노칩에 반출해 은밀히 보관해 두었다.
어떤 조직이든 비밀을 알게 된 자는 목이 날아가니까.
“혹시 모를 위기에 대비해 목숨을 보존시켜 줄 대책을 만들어둔 것. 아주 좋았어.”
진성령은 서유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긴장할 필요 없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만큼, 유리 씨를 진심으로 아꼈으니까.”
“어째서죠.”
“데이터 마이닝팀에서 가장 우수한 요원이었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의 나를 많이 닮았어.”
두 눈을 반달처럼 접은 진성령은 기특한 딸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떤 점이 닮았다는 거죠?”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던전 실험의 이상한 점을 대번에 알아챈 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연구자료와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모두 조사한 점이랄까?”
굳어 있는 서유리의 표정을 바라보던 진성령이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려면 초식동물 같은 위기 감지 능력과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니까.”
“…….”
“하지만 내가 진짜 마음에 들었던 건 유리 씨의 무거운 입이야. 그 자료를 가지고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조용히 지냈잖아?”
쓸데없는 음모에 휘말렸다는 걸 깨달은 서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살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안 돼.”
단칼에 말을 자른 진성령이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김수웅 실장은 유리 씨가 이쪽 인물과 접촉했다는 걸 알고 있어.”
“뭐라고요?”
“서유리 씨도 잘 알 거야. 김수웅 실장은 야심이 클 뿐만 아니라 세상을 뒤집게 만들 연구를 거의 완성했다는 걸.”
“하지만 저는…….”
“그런데 서유리 씨가 그 연구자료를 따로 빼돌렸을 뿐 아니라, 통합정보국에 접촉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통합정보국에 접촉했다는 정보. 그거… 팀장님이 흘렸군요.”
무언가를 깨달은 서유리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제가 통합정보국에 붙어야 하니까. 아닌가요?”
“맞아.”
진성령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한 음모자의 미소였다.
“그러니까 선택권은 없어. 만약 오늘 제의를 거절하게 된다면 서유리 씨는 더 이상 대한민국 땅에선 살기 힘들 거야.”
진성령이 두 눈을 가늘게 접었다.
“어떻게 할래?”
긴 침묵 끝에 서유리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시간?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데. 다른 생각을 할 생각이라면 이미…….”
“아뇨.”
서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고개를 흔든 서유리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결국 그녀는 진성령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김수웅이라는 무서운 인물의 시야에 올라간 이상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으니.
“그 일은 잠깐 잊어버리자.”
고개를 흔든 서유리는 다시 달력을 바라보았다.
내일 약속한 데이트 장소는 놀이동산.
놀이동산 데이트는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연인과 놀이동산에서 하루 종일 즐겁게 돌아다니는 데이트.
평범한 연인들은 한 번쯤 해봤을 테지만, 서유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이를 만나 그곳에 놀러 가게 된 것이다.
“힘내자, 파이팅.”
두 손을 힘껏 쥔 그녀는 도마에 내려두었던 칼을 집었다.
곧 그곳에서 벌어질 처참한 일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