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53화 (253/285)

제253화. 신채영의 과거 (2)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 타고 있는 김수한은 모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키에 엄청난 근육질을 지닌 탓에 정장을 입었음에도 탱커용 나노슈트를 입은 것처럼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끼익.

세단이 멈춘 곳은 어느 허름한 주택 앞이었다.

쾨쾨한 냄새가 풍기는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자 문 앞에서 보안 카메라가 번뜩였다.

동시에 스피커에서 까마귀가 짖은 듯한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쇼.”

“오늘 예약한 김수한.”

잠시 스피커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지잉.

금속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거, 때깔을 보니 이런 곳에 안 와도 될 것 같은데?”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깡마른 남성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신채영의 친부, 신근남이었다.

“엉뚱한 데서 온 거라면 돌아가쇼. 매번 벌금을 두둑이 내고 있으니까.”

신근남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힐러가 무허가 치료소를 차려 봤자, 엄청나게 벌금이 나올 뿐이다.

나중에 신채영이 성인이 되고 정식 각성자 등록을 하게 된다면, 그땐 이 지긋지긋한 벌금도 더 이상 내지 않게 될 테지만.

“아이를 고용하고 있다고 하던데.”

“에이 씨. 고용한 게 아니라 내 딸이라니까. 몇 번이나 조사당했다고!”

신근남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이가 각성자라서 굶어 죽는 아빠를 대신해 일을 하는데 뭐 어쩌라고? 대통령이 와도 난 잘못 없으니까 조사하려면 영장 들고 오셔.”

“아니, 치료를 받지.”

김수한은 품속에서 수표 한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천만 원이었다.

“뼈를 수복하는 건 천만 원이라고 하던데? 맞나.”

“거, 찜찜해서 안 받겠수다. 돌아가쇼.”

처억.

그러자 김수한은 다시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찜찜함도 지워지겠지.”

“거 돈질 한번 시원시원하게 하시네.”

신근남의 수표를 받아들자 김수한이 입맛을 다셨다.

“아이가 제대로 치료할 수 있나 모르겠군.”

“걱정 마셔. 실력이 좋아서 공무원들도 은근 오니까.”

신근남은 카운터 좌측으로 이어진 복도를 가리켰다.

“안쪽으로 들어가셔.”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단정한 옷을 입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이제 막 귀여움을 뽐낼 시기였으나, 눈빛은 어두웠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옷은 깔끔하게 입고 있었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어져 있었다.

“역시 그랬나.”

김수한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이를 깨물었다.

한눈에 이 작은 아이, 신채영이 극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여러 곳에서 조사를 받게 되자, 학대 정황을 피하기 위해 잘 꾸며둔 것이군.”

“……?”

“치료 스킬이 있으니 몸에 있던 학대 흔적은 모두 사라졌겠고.”

심호흡을 한 김수한은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큐브 하나를 작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협회에서 사용하는 초소형 나노봇이었다.

저저저적. 지이이이잉.

나노봇은 무슨 작업을 하는 듯, 연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라. 왼쪽 어깨다.”

신채영은 김수한을 빤히 올려 보았다.

귀신처럼 째진 눈빛,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근육질.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도깨비 같다.

“못 들었나.”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마저 살벌하다.

신채영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팔을 뻗었다.

우웅.

가늘고 희미한 빛이 김수한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상당하군.”

가변던전을 공략하면서 수많은 우수한 힐러들에게 치료 스킬을 받아왔던 김수한.

그는 신채영의 치료 스킬이 놀랄 만큼 정순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아이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야.”

낮은 등급의 치료 스킬은 시전자의 생명력과 체력을 소모한다.

바꿔 말하자면, 시전자의 몸속에 있는 생명력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에겐 몸 안에 터럭 하나 불순한 기운 하나 없다.

치료 스킬이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태고에 존재했던 맑은 호수에서 헤엄을 치는 듯한 상쾌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그만.”

김수한의 말에 신채영은 기계처럼 치료 스킬을 멈추었다.

“앞으로 이렇게 억지로 남을 치료해 주지 않아도 된다. 겁에 떨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지도 않을 거다.”

주절주절 말하던 김수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김수한은 갖고 온 나노봇이 무허가 진료소에 있는 컴퓨터를 몽땅 해킹. 탈세와 불법행위 증거를 모두 찾아냈다.

그리고 뒤이어 내려온 협회 소속 정신 스킬 능력자가 신채영의 학대 사실을 파악했다.

“협회에서 왜 나서서 지랄이야!”

신근남이 김수한을 향해 절규와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신채영을 뺏어가려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 딸이라고! 내 딸! 니들이 뭔데 채영이를 데려가!”

“딸?”

순간 김수한의 눈에서 살기가 맴돌았다.

안 그래도 방금 조사를 마친 정신 스킬 능력자의 요약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그곳엔 도저히 눈을 뜨곤 볼 수 없는 아동학대 정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네놈도 인간이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마라.”

“웃기지 마! 너희들이 뭔데 내 딸을 데려가? 내가 소송할 거야!”

“소송?”

김수한은 피식 웃었다.

실제로 과거엔 친권 박탈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법원에서 친권 상실을 선고한 사례가 거의 없고, 설령 친권 박탈을 한다고 해도 실효성이 없었다.

판사들은 부모가 반성하는 낯빛만 보여도 아이들을 강제로 시설에 넣지 않고, 부모 곁으로 되돌려 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각성자 특별법이 개정된 이후의 상황은 달랐다.

각성자 아이를 학대할 경우, 협회에서 그 즉각 친권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그것은 사회를 파괴시키는 폭탄을 제조하는 것보다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네놈들이 우리 딸아이를 데려가냐고!”

신근남의 외침에 나노봇이 추출한 자료를 살피던 김수한의 부하가 피식 웃었다.

“이런 막장 인간이 각성자 특별법에 대해 알 리가 없죠. 신문이나 뉴스 같은 걸 볼 리 없으니.”

“뭐?”

“아저씨, 아저씨 딸은 각성자예요. 각성자 아이를 학대하면 협회에서 즉각 친권을 박탈시킬 수 있는 거 몰라요?”

“왜? 왜? 니들이 왜!”

그러자 부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저씨 딸이 이대로 크면 멀쩡할 것 같아요? 막말로 눈이 돌아가 버려서…….”

“됐어.”

보고서를 내려놓은 김수한이 부하에게 말했다.

“저 쓰레기는 바로 내보내서 검찰에 넘겨. 시끄러우니까.”

“알겠습니다.”

“뭐, 뭐야! 누구 멋대로!”

신근남이 밖으로 끌려 나갈 무렵, 김수한은 복도 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끌려 나감에도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협회, 전략기획실장실.

“적합자군. 아니, 완벽해.”

테이블에 올려진 자료를 유심히 살피던 박정민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쇠신발을 신고 찾아도 없던 보물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만.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바로 투입시키도록 해.”

잠시 망설이던 김수한이 말했다.

“당분간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영재훈련소에서 교육을 시킬 생각입니다.”

“뭐?”

“치료 스킬은 정신 스킬과 같습니다. 정서적 안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김수한은 알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이, 신채영.

만약 이 아이를 바로 훈련시설에 투입시키면 그대로 인성이 파탄 나 버릴 거라는 것을.

“그래서… 자네가 데리고 있겠다고?”

“조금이라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아이를 안정시켜야 하니까요.”

박정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못 말리겠군.”

팀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몬스터를 막아서다 결국 탱커의 길로 들어섰다.

마치 정의의 히어로처럼, 이 우직하고 강철같은 사나이는 이제 한 아이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안 됩니까?”

“자네의 뜻이 그렇다고 하니…….”

박정민이 실소를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뭐, 잘해 보게나.”

* * *

김수한의 거처는 협회 근처에 있는 타워형 아파트였다.

이곳은 협회 소속 각성자들만이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대부분 신혼부부들이나 돈을 모으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위험수당으로만 한 해 십억 이상을 벌지만, 지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통에 딱히 집을 마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쪽이다.”

신채영은 김수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학대를 당한 탓인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시키는 것만 한다.

“와아아!”

그때 놀이터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우주선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딱 신채영와 비슷한 또래였다.

“타볼 테냐.”

김수한이 놀이터의 놀이기구를 가리키자 신채영은 고개를 저었다.

땡그랑.

그때, 이름이 새겨진 작은 팔찌 하나가 신채영의 발아래에 떨어졌다.

놀이기구를 타고 있던 한 아이의 팔목에서 떨어진, 미아 방지 팔찌였다.

“소진아! 팔찌!”

멀리서 아이들을 살피고 있던 부모 중 한 여성이 뛰어나와 신채영 앞에 떨어진 팔찌를 주었다.

그리고 달려가 다시 아이의 팔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채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김수한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날 이후.

신채영은 김수한의 아파트에 머물며 각성자 영재훈련소를 다녔다.

그곳은 신채영처럼 아이 때부터 놀라운 각성 스킬을 발휘한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밥 먹어라.”

훈련소에서 집으로 데려오면 김수한은 항상 밥을 먹였다.

신채영은 마치 말 잘 듣는 기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었다.

“다 먹으면 잘 먹었습니다, 라고 해.”

김수한의 말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이 작은 아이는 오직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 소리 내어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언젠간 하겠지.”

김수한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신채영이 받은 상처는 평생을 치료해도 나을까 말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십이 넘은 그 역시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

한 달 후.

수많은 영재들 속에서도 신채영은 최상의 힐러였다.

학대당하면서 쏘아낸 힐의 양 때문인지 쉬지 않고 힐을 쏘아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고작 한 달 만에 신채영은 그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밥 먹어.”

오늘도 김수한은 밥을 직접 밥을 차렸다.

양은 많지만 맛은 항상 그저 그런 편이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김수한은 작은방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신채영에게 다가왔다.

“아저씨는 내일 광주에 있는 가변던전 공략을 하러 가.”

김수한의 말에도 신채영은 기계처럼 글씨를 쓰고 있을 뿐이다.

“일주일 정도 걸릴 예정이다.”

사각사각.

“그동안 아주머니가 와서 보살필 테니까 밥 잘 먹고 있어.”

사각사각.

“그리고 이거.”

김수한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에 내려두었다.

사각.

그 순간 신채영의 연필 소리가 멈추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팔찌였다. 바로 미아 방지용 팔찌였다.

“이거… 갖고 싶어 했지?”

김수한은 알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미아 방지용 팔찌를 내려다보고 있던 신채영이 부러움을 느꼈다는 것을.

“뭐, 아니면 말고.”

몸을 돌린 김수한은 방문을 닫았다.

“…….”

신채영은 책상 위에 올려진 팔찌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채영이라는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 있었는데, 그 아래에 생소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생일이었고, 그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찰랑.

신채영은 조심스레 팔목에 팔찌를 갖다 대어 보았다.

차가운 금속이 왠지 따스하게 느껴진다. 조심스레 고리를 풀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해 보았다.

그 순간 늘 정지되어 있던 신채영의 눈동자에서 미세한 감정의 빛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한 걸음, 김수한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일주일 후.

김수한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광주의 가변던전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실드발생장치의 고장으로 공략팀장이었던 김수한 씨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TV에선 김수한의 애도 소식이 연일 들려오고 있었다.

고장 난 실드발생장치로 인해 위험에 빠진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걸고 몬스터들을 막아섰다.

부하들은 다행히 모두 대피했으나, 몬스터에 둘러싸인 그는 결국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신채영은 울지 않았다.

이별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좋은 사람은 다 죽는다. 할머니도 그랬고, 김수한도 그랬다.

신채영은 손에 쥔 팔찌를 꼭 쥐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는 협회의 비밀 시설로 들어가게 되었다.

* * *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기억의 편린에서 깨어난 신채영이 눈동자는 흐릿해져 있었다.

김수한.

그는 수렁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비록 짧은 생활이었으나, 김수한의 사랑으로 인해 신채영은 올바른 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학대받았던 기억을 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쓸데없는 기억을.”

신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과거를 털어버리지 못한 사람에겐 발전이 없다.

그저 자신은 어린 시절, 남들보다 조금은 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게 신채영은 차갑고 냉정한 정신을 유지했다.

휙.

그녀는 빌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손목에 착용하고 있던 얇은 실팔찌가 손목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냉정한 정신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녀는 떠오른 지난 과거의 기억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달칵.

그때 엄마손 백반집의 문이 열리며 거구의 사내가 이를 쑤시며 나왔다.

바로 식사를 마친 천마였다.

[어라?]

무명은 돌아가는 길 앞에 떨어져 있는 작은 실팔찌를 주워 들었다.

그곳에는 신채영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신채영이 실드경계지역 방향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채영 씨 팔찐가 보군요. 그런데… 끊어졌네요.]

“버렸나 보군.”

천마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 하자 무명이 팔찌를 집어 들었다.

[너무 얇아서 끊어진 걸 모른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녀만 한 무인이 팔찌를 떨어지는 걸 못 느낄 리 있나. 버린 거다.”

[그럴까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신채영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하지 않았던가?

[천마 님. 이걸 붙여주실 수 있나요?]

“귀찮다.”

[부탁드립니다. 이걸 돌려드리면 왠지… 신채영 님의 상태가 조금 나아질 것 같아서요.]

천마가 반응이 없자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천마 님을 덜 성가시게 할 것 같다는 예상도 들고요.]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찌를 집어 들었다.

얇은 실팔찌였으나, 티타늄 합금으로 되어 있어 매우 튼튼했다.

“흐읍.”

마화열극지를 끌어올린 천마가 손가락에 힘을 가하자, 끊어져 있던 팔찌의 고리가 다시 원상태로 붙었다.

치이이이.

하지만 엄청난 고열 때문에 아직도 팔찌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채영 님!]

팔다리를 뽑아 뛰어간 무명이 팔찌를 쥔 채 걸어가는 신채영을 불러 세웠다.

[팔찌요! 팔찌 떨어뜨렸어요!]

“팔찌?”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신채영은 자신의 왼 손목을 매만졌다.

언제나 잘 끼워져 있던 실팔찌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게 언제…….”

[문 앞에서 끊어져 있던 팔찌를 발견했습니다!]

신채영은 몸을 굽혀 무명이 내민 팔찌를 집어 들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팔찌 끝자락에는 천마가 엉터리로 대충 녹여 붙인 자국이 보였다.

[아, 끊어진 건 천마 님이 붙여주셨습니다. ‘우리 채영 씨’를 위해서 말이죠.]

무명은 그저 천마를 잘 좀 봐주십사 하는 말이었으나, 신채영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다.

“관심 있는 건가. 나한테.”

신채영이 낮게 중얼거리자 무명이 옳다구나 하고 두 손을 비볐다.

[어이쿠, 물론입죠. 천마 님의 시야엔 신채영 님도 이미 들어오셨답니다.]

신채영은 다른 이들의 관심이 싫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를. 조금이라도 더 자신과 멀어지길 바랐다.

“뭐 하는 거냐.”

그때 천마가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그는 신채영이 매만지고 있는 팔찌에 시선이 이르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착각 마라. 무명 녀석이 하도 사정하길래 붙여준 것뿐이니까.”

“오해 안 해요.”

“다행이군.”

그녀를 쓱 지나친 천마는 무명을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신채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천마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타인의 시선을 그토록 싫어하는데도 천마의 시선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는지를.

“닮았어.”

저 무심한 눈빛, 커다란 덩치.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구원해 준 김수한과 닮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이유를 깨달은 신채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천마의 등 뒤로 다가간 신채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죠.”

“먹었다.”

“아뇨. 이따 저녁이요.”

“거절한다.”

“거절은 없어요.”

천마를 앞지른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팔찌 보답이니까.”

“뭐라?”

“이따 일곱 시. 옥탑방으로 갈 거예요. 준비하고 있어요.”

“본좌는…….”

천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채영은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힘을 사용해 단숨에 빌라까지 전력 질주를 한 것이다.

“뭐냐.”

휴지 조각처럼 얼굴을 구긴 천마는 무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잖나!”

무명은 머리통을 긁적이며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거 아닙니까. 신채영 님은…….]

“뭐라?”

[아닙니다.]

무명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천마가 들리지 않게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채영 님은 분명 기뻐하는 눈치였으니까요. 성공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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