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51화 (251/285)

제251화. 천마, 멜로 영화를 보다

서유리와 데이트 후 천마는 전에 없던 수치와 모욕을 느꼈다.

말이 후퇴일 뿐 엄밀히 말하자면 처참한 패배였다.

그는 서유리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만 실컷 경청하였다.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

그날 이후, 천마는 냉정하게 자신의 전력을 분석하고 약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배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이곳에서 그는 고금무적을 구가하는 고수가 아닌, 인테리어 시공자일 뿐이라는 점이다.

무림에서 천마는 천하제일인이자 무림을 제패한 만마집궁의 궁주. 즉, 무림에서 그의 말에 토를 달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지유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고 자신의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장채원도 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천마의 권위는 아무런 발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서유리는 천마의 예상을 뛰어넘는, 똑똑한 재녀라는 점이다.

그녀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천마의 성격을 꿰뚫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흥미를 유발시키는 화술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아무런 준비 없이 대적(大敵)을 상대한 상황.

이는 신출내기 무림인이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능구렁이 고수에게 덤벼든 꼴이었고, 결국 처참한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본좌의 부족함 때문이었나.”

천마는 좌절하지 않았다.

약점을 파악했다면 보완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성향에 무지하고 대화조차 나눠본 일이 드물었던 천마.

서유리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의 심리와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실드경계지역, 천마의 옥탑방.

“여성의 마음이라. 여성의 성향이라.”

교자상 앞에 단정히 앉은 천마는 혹독한 명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공법문을 연구하는 것과 달리,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낀 뜻 모호했다.

[천마 님.]

눈을 감은 채 끙끙대며 고민하는 천마를 보자,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여성의 심리에 정통할 방법을 찾으시는 겁니까.]

비 맞은 땡중처럼 중얼거린 탓인지 무명은 천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만.]

“말하라.”

천마가 눈을 번쩍 뜨자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로맨스를 주제로 한 멜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영상매체를 뜻합니다.]

마치 대단한 비밀을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무명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멜로 드라마나 영화에선 모두 아름답거나 혹은 슬픈,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많이 보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심리에 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군. 한번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무명은 신이 난 목소리로 TV를 조작했다.

그것이 고난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치즈버거 사주세요. 치즈버거! 지혜는 치즈버거가 먹고 싶어요!

장엄한 눈빛으로 TV를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10년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어느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였다.

“저 여성은 아혈을 제압당한 것 같군. 왜 남성은 그녀의 혈도를 해혈해 주지 않는 거냐.”

천마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무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건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남성에게 어필을 하는 겁니다. 애교를 핀다고 하죠.]

“이해할 수 없군.”

천마는 이후로도 무명이 추천한 여러 가지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했다.

하지만 여성의 마음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군. 이런 걸 보면 정말 여성의 심리에 정통해질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말이냐.”

[전부 말입니다. 지금 저 드라마에서도 여성들이 바라는 것, 원하는 것들이 모두 나오지 않습니까? 방금 저 여성이 혀 짧은 소리를 내게 한 것도, 남성들에게 귀여움을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천마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럼 본좌가 아혈을 반쯤 점혈하여 혀 짧은 소리를 내게 해준다면 여성들이 기뻐한단 말이냐?”

[…….]

무명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같은 것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천마 님의 뇌를 거치면 달콤한 키스도 ‘주둥이 공격!’이 되는 것일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던 무명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천마 님. 일전에 천마 님이 즐겨 시청하던 나의 어사님을 기억하십니까? 그 드라마도 일종의 로맨스 장르였는데, 천마 님께서 상당히 공감하고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나.”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사님 대신 칼을 맞았던 여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도 않고, 어사님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천마는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건 당연한 선택이 아니더냐.”

[네?]

“그녀보다 어사의 무공과 지위가 훨씬 높다. 당연히 어사 쪽이 변사또를 잡는 데 적임자였지.”

[그럼 여주인공이 어사님을 대신해 절벽에서 대신 떨어진 건요?]

“아래에는 세찬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사와 달리 무장을 하지 않았고, 몸도 더 가볍지. 아마도 생존확률을 계산한 후 더 확률이 높은 쪽에 승부를 건 것이다.”

그런 거였습니까?

무명은 완전 속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천마는, 그 세상 애틋한 드라마를… 지략과 계산이 난무하는 스릴러 장르로 착각하고 흥미 있게 본 것이다.

‘내가 포기해선 안 돼!’

무명은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으로 천마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아니라면 천마의 저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썩어버린 세계관을 올바로 교정해 준단 말인가?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로맨스 코미디가 아니라면 정통 멜로다.

고민 끝에 무명은 다시 TV를 조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멜로 영화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울린 슬픈 대작, ‘하늘과 땅이 합쳐지는 날’입니다.]

“하늘과 땅이 합쳐져?”

[그렇습니다. 천마 님이라도 이 영화를 보신다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늘과 땅이 합쳐지는 날.

이것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남성의 이야기였다.

두 남녀는 운명과 같은 사랑을 한다. 여성은 회사원, 남성은 행정고시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었다.

여성은 뼈 빠지게 일하며 7년 동안 남성을 뒷바라지하고, 결국 남성은 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그 이후, 남성은 여성을 배신하고 다른 여성들을 만난다.

그럼에도 여성은 배신한 남성을 묵묵히 기다린다. 그러다 불치병에 걸렸고, 그제서야 여성은 남성의 곁을 조용히 떠나는 내용이었다.

-당신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달았어. 제발 날 떠나지 마.

어느덧 극 중의 백미가 떠올랐다.

불치병에 걸려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깡마른 연인을 보며 남성이 지난날을 후회하며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훌쩍.]

TV를 바라보는 무명은 고개를 숙인 채 눈 센서를 훔쳤다.

살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슬펐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던 천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취향이 독특하군.”

[네?]

“저 상국이라는 남자 주인공 말이다.”

천마는 무릎을 꿇은 채 오열하는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토록 피골이 상접한 데다, 오늘내일 숨이 넘어가는 여성에게 왜 청혼을 한단 말인가.”

순간, 무명의 연산회로는 정지했다.

공포영화 속 악마를 본 것처럼 소름(피부는 없지만)이 돋았다.

[천마 님은… 저 남주인공의 마음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알기에 하는 말이다.”

[저 상국이라는 자 곁에는 용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한 재력가 집안의 딸 은희라는 애인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다 죽어가는 여자에게 애정을 구걸한단 말인가.”

무명은 있지도 않은 입을 쩍 벌렸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공장에서 무리한 노동을 했고, 그 때문에 불치병을 얻었습니다. 뒤늦게 남주인공도 그 사실을 알고 후회하는 것이고요.]

“이미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본인도 충분히 후회의 삶을 살았잖나.”

천마는 코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좋은 사람을 만나 새 삶을 꾸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결말일 터. 어째서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지 모르겠군.”

아아. 천마 님.

무명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마는 저 영화 속에서 나오는 남주인공과는 비할 수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던 것이다.

[천마 님.]

무명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항상 좋은 조건만을 따지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조건이나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연인을 아끼는 것입니다.]

“한심한 마음가짐이로군.”

천마는 딱 잘라 말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감정만을 앞세워 행동했다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

[이루지 못하다뇨?]

“아비의 원수가 눈앞에 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황소처럼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얼간이처럼 말이다.”

[이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수와는 다른 감정입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천마는 식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설령 저 죽어가는 여성이 벌떡 일어나 몸을 회복한다고 해도 남성은 재력가 집안의 딸인 은희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후대를 위한 선택이기도 한 것이다.”

[후대라뇨?]

무명의 눈 센서를 껌뻑거리자, 천마는 병실 뒤에서 남녀주인공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성, 은희를 가리켰다.

“봐라. 저 은희라는 여성의 신체는 여주인공보다 건강할 뿐만 아니라 체격 조건이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과 달리 훌륭한 집안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재녀지.”

천마는 두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라도 상국이라는 자는 은희를 선택해야 한다.”

[천마 님!]

전에 없던 분노를 느낀 무명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배우자를 결정하는 건, 외적인 것이나 조건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우유를 짜내는 젖소처럼 등급을 매기거나 우열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마에게 한 번 더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걸 모르시기 때문에 천마 님께선 서유리 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요.]

늘 사용자를 보좌하는 나노봇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았던 무명이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천마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줄곧 완곡한 태도를 고수하던 무명으로선 이례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천마는 개의치 않았다.

달변가이자 궤변가인 그는 말로 싸우는 논쟁 역시 그에게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물론 여성 앞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에 어폐가 있군.”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가 조건만을 따지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하나 묻지. 그녀는 분명 본좌의 얼굴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용모라는 건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 그건…….]

“게다가 그녀가 본좌를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은, 가면 신사에게서 자신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본좌의 강력한 무력을 염두에 둔 것이지.”

낮게 코웃음을 친 천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본좌를 대뜸 발견한 것도 운명이라고 했지. 하지만 그 인파 속에서 본좌를 쉽게 발견한 것은, 사실 본좌가 평범한 인간들보다 월등한 육체 조건을 갖고 있었기에 쉽게 발견한 것이다.”

무명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서유리는 상당히 눈이 높고 조건을 따지는 여성이다.

그리고 천마는 여러 가지 훌륭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제법 괜찮은 남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천마 님은…….]

생각해 보니 천마의 조건은 그저 괜찮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키도 크고 육체도 강인하다.

1급 각성자보다 힘도 세고 다양한 무공도 사용할 수 있다.

한번 읽은 책은 모두 기억할 만큼 두뇌도 우수하고 자동차 운전도 하루 만에 익힐 만큼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다.

술과 약, 도박 따윈 하지 않으며, 여자 문제에 깨끗하고 경제 관념도 건실해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

굳이 흠을 잡자면 나이가 조금 많다는 점이었으나, 신체 능력으로 미루어 보아 이백 살은 더 살 것 같다.

한마디로 험악한 인상만 제외한다면 천마는 이상적인 신랑감이었다.

‘아니, 험악한 인상도 취향이 될 수도.’

여성들 중에는 강렬하고 야성적인 용모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째서 이러한 조건을 가진 천마가 여성과 사귀지 못했을까?

이 정도 조건이라면, 죽자 사자 좋다고 덤벼들 여자가 몇 트럭은 될 텐데 말이다.

[…그렇군요.]

불현듯 무명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건만으로 보면 완벽에 가깝지만, 안타깝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바로 저 말도 안 되는 음험한 세계관과 감정이 사막처럼 메말라 버렸다는 점이었다.

감정이 말살된 터미네이터와 같은 천마.

이 단점이 너무나 치명적인 탓에 천마는 여성을 사귈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TV 시청으로는 천마 님께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른 방도는 없나.”

[절대로 없습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 무명이 충전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

[그럼 저는 이만 충전 모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