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천마, 데이트하다 (3)
싸움을 시작한 이상 상대를 완전하게 제압해야 한다.
그 점을 깨달은 그녀가 심호흡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당초 천마 씨가 싫다면 억지로 볼 생각은 없었어요.”
쓴웃음을 머금은 서유리의 말에 천마가 눈을 번뜩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목소리엔 자신감이 사라져 있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조금은 되찾은 셈이다.
“그대는 예전에 이렇게 말했지.”
천마는 이 여세를 몰아 서유리를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 번만 만나보면 본좌가 그대를 좋아하게 된다고. 기억하나.”
“기억나요.”
“그런데 왜 지금은 두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거지? 그 전과는 기량이 달라진 건가.”
말을 마친 천마가 미소 지었다.
이번엔 제대로 허점을 찌른 것 같다. 복잡미묘해진 표정을 보니,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하거나 자책하는 말이 이어질 것이다.
“천만에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서유리는 부족함을 통감하지도, 자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예상치도 못한 반격을 시작했다.
“달라진 건 오히려 천마 씨예요. 그 때문에 시간이 늘게 되었죠.”
“무슨 말이냐.”
“그때 천마 씨는 달라진 용모 때문인지 감정의 빛이 눈동자에 잘 드러나 있었죠. 조금 혼란스러워 보일 만큼요.”
천마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금강지체가 깨졌을 당시, 나약해져 버린 육체 탓인지 감정에 기복이 생겼고 머릿속도 혼란한 상태였다.
서유리는 놀랍게도 그 당시 천마의 심리상태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제가 달라진 건 없다는 거죠. 단지 지금의 천마 씨가 그때보다 더 무심해졌을 뿐이에요.”
“어리석군. 그대의 장점을 안다면 본좌가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나.”
“아뇨.”
빙긋 미소 지은 서유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천마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첫사랑의 열병 때문인지.”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천마는 방어할 생각조차 잊었다.
사실 그는 남녀 간의 애정사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지한 편이다.
여성의 심리도,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여러 가지 감정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결국 이 대화의 겨룸은 처음부터 서유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 또래 아이들은 보통 사춘기 전후로 첫사랑을 경험한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모두 던전에서 돌아가신 탓인지…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죠.”
과거를 회상하는 듯 서유리의 눈동자가 흐릿해져 갔다.
“저는 협회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했어요. 반드시 뛰어난 각성자가 되어 던전을 공략하리라 마음먹었죠.”
잦아들던 그녀의 눈동자엔 어느새 진득하고 어두운 외로움이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협회 데이터 마이닝팀에서 일을 하고 있었죠. 연애 한 번 못 해본 탓에… 연애세포는 모두 소멸한 채 말이죠.”
천마는 지금에서야 자신에게 커다란 결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천마는 헤아릴 수 없는 싸움을 반복하며 적수의 공격을 훤히 들여다봤다.
인간의 얄팍한 감정 따윈 모두 훤히 꿰뚫어 본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건 전투에서 한정되었을 뿐.
남녀 간에 오가는 대화에선 전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연애 한 번 못 했다라.”
천마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최후의 공격을 펼쳤다.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어머, 그거 칭찬인 거죠?”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서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저 눈 굉장히 높아요. 만약 연애를 하게 된다면,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제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상대를 원했으니까요.”
“본좌는…….”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얼마 전 찬원 삼촌이 제게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죠.”
품속에서 구형 휴대폰을 꺼낸 서유리가 천마 앞으로 화면을 들이밀었다.
그곳엔 절세미남으로 변해 있는 천마의 옆 모습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천마 씨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고작, 껍데기를 보고 말인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껍데기라고 표현하기엔 천마 씨 얼굴은 너무 잘생겼으니까.”
사진 속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서유리의 눈동자는 꿈을 꾸는 듯했다.
“이 정도 용모라면, 저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이상형에 부합할 거예요.”
아직도 얼굴에 집착하는가?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었다.
천마는 서유리를 바라보며 최대한 경멸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달라졌겠군.”
“천만에요. 저는 열여섯 소녀가 아니에요.”
“무슨 말이지.”
“여자 나이가 스물 중반이 넘어가면 남자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지죠. 용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안 되겠군.’
서유리에게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말하는 건 흥미를 끄는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마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늘은 후퇴다.’
아직 시간은 많다.
천마는 공격을 멈추었다. 오늘은 그녀와 다투는 것을 멈추고 가능한 경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끌어온다면, 다음 대국에선 승리를 거머쥘 수도 있을 테니.
“용모보다 중요한 것이라면, 조건을 말하는 것인가.”
줄곧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려던 것을 포기하자, 천마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순간순간 서유리는 대나무 숲이었던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감을 느꼈다.
‘어라?’
대나뭇잎이 쏟아지는 살벌한 풍경이 어느새 사방이 트인 누각으로 바뀌었다.
창밖으론 굽이굽이 이어지는 봉우리와 잔잔히 흐르는 호수가 보인다.
검을 비켜 들고 있던 천마의 손엔 부채가 들려 있었고, 자신의 얼굴엔 엷은 면사가 씌워져 있었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살풍경한 무인의 싸움에서, 대국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군사의 싸움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맞아요.”
서유리가 심호흡을 하자 천마가 부채를 쫙 폈다.
“속물이 된다는 말을 고상하게 표현하는군.”
“남성의 다양한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해두죠. 여성들이 원하는 조건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니까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서유리가 미소 지었다.
“솔직히 말해 저 정도면 괜찮은 조건의 남자를 원 없이 만날 수 있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조건은 ‘괜찮은 조건’ 정도 수준이 아니었죠.”
의도한 것이었을까? 서유리는 잠시 면사를 들고 차(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마치 천마가 자신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대가 원하는 조건이라는 건 뭐냐.”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천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운명이죠.”
“운명?”
“운명 같은 사랑. 그것이 제가 원하는 조건이었어요.”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다. 곰곰이 그녀의 말을 음미하던 천마가 침음을 내었다.
“그러니까 본좌가 그대의 운명이라는 건가.”
“네. 확실해요.”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지.”
찻잔을 내려놓은 서유리는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첫 번째, 천마 씨는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목숨?”
“그래요. 그 당시 불스아이 던전에서 나타난 이상 징후로 인해, 협회에선 구조대를 보내는 걸 포기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천마 씨는 기꺼이 던전으로 와 제 목숨을 구해주었죠.”
“본좌가 가지 않았어도 김 씨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천만에요. 찬원 삼촌만 왔다면 결국 가면 신사를 당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어떻게 장담하지?”
천마의 물음에 서유리가 전에 없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스마일 가면을 쓴 가면 신사의 추정 위험도는 10만이에요. 물론 실제로는 더욱 강할 수도 있고요.”
10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위험도다.
쉽게 말해 그 가면 신사 하나가 작은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면 신사라.’
천마는 불스아이 던전에서 봤던 보라색으로 양복을 입은 가면 신사를 떠올렸다.
금강지체가 깨졌고 천마대능력을 쓸 수 없었다고 하나, 그 보랏빛 가면 신사는 천마의 공격을 수월히 피했다.
만약 지금이라면? 그 마물을 수월히 잡을 수 있을까?
‘장담할 수가 없군.’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가면 신사는 능력을 모두 발휘한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천마 씨가 절 구해줬다는 것 하나만으로 운명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서유리가 혀로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찬원 삼촌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그 거짓말을 천마 씨가 시켰다는 것도.”
“왜 말을 하지 않았나.”
천마의 물음에 서유리는 처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은 강요할 수 없다.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오직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만이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었다.
서유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말 않고 조용히 떠난 것이다.
“말에 모순이 있군. 그렇다면 본좌와 그대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천마의 물음에 서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죠.”
달콤한 커피 한 모금을 다시 입 안으로 밀어 넣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거리를 걷는데 한 남성을 봤어요. 거구의 엄청난 근육질의 남성이었어요. 절 처음 사랑에 빠지게 한 천마 씨와는 전혀 다른 용모의 남성을요.”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가 깊어졌다.
“하지만 그 남성과 지나쳤을 때, 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왜 저 사람이 머릿속에 남는 거지? 이상함을 느낀 제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남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요.”
놀랍게도 서유리는 천마와 다시 마주쳤을 때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리고 얼마 전 번화가 중심지 시계탑 앞에 서 있는 그 남성을 다시 마주쳤어요. 그 많은 인파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그 남성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죠.”
“무엇을 말인가.”
“운명이라는 것을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남성이 천마 씨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저 사람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요.”
천마는 원래 비웃으려 했다.
하지만 확신에 차 있는 서유리의 눈동자를 보자 천마는 비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거짓되지 않았다. 진실과 확신으로 채워진 채 반짝이고 있었다.
서유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천마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시시한 이야기군.”
한동안 침묵하던 천마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만약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가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서유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고풍스러운 누각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느새 현실의 풍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저는 천마 씨를 운명이라고 확신하니까요.”
팔짱을 낀 채 석상처럼 앉아 있던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실드경계지역, 천마의 옥탑방 건물 앞.
부르르릉. 철컥.
시동을 끄자 거리에 옥탑방 건물 주변엔 또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라마스에서 내린 천마와 서유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
“다음엔 천마 씨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줘요.”
서유리는 성큼, 크게 걸음을 내딛여 천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굵은 손을 잡았다.
“무슨 짓이냐.”
천마가 삭막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말했지만 서유리는 빙긋 미소 지었다.
“헤어지는 것도 만남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에요. 어떻게 헤어지냐에 따라서 아쉬움을 줄 수도 있고, 기대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왜 팔을 끌어안았는지 물었다.”
“말했잖아요. 아쉬움과 기대감을 주고 싶었다고.”
그녀가 더욱 꽉 팔을 끌어안자 천마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서유리는 자신의 성향, 아니, 약점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
남녀 간에 대화나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막무가내 여성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음번에 헤어질 땐 천마 씨가 아쉬움을 느낄 거예요.”
서유리가 달콤하게 속삭이자 팔을 뺀 천마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지.”
[어엇.]
그러자 차 안에서 흥미진진하게 이 모습을 바라보던 무명이 벌컥 뛰어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서유리 님. 같이 가요, 천마 님.]
두 다리를 뽑아 허겁지겁 달려가는 무명을 바라보며 서유리가 미소 지었다.
첫 데이트부터 느낌이 좋다.
갈수록 저 무뚝뚝한 사내는 나에게 빠져들 것이다.
그것은 확신과도 같은 예감이었다.
“아쉽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두 팔을 쭈욱 늘린 서유리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멀리 세워둔 에스퍼를 향해 다가갔다.
스으윽.
그런데 어둠 속에 세워둔 에스퍼 차량 주변으로 묘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구시죠.”
전투에 소질이 없을 뿐, 서유리도 엄연한 고위 각성자였다.
서유리의 외침에 에스퍼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당신은…….”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가을하늘을 반사한 우물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바로 신채영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서유리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그녀는 얼마 전 천마와 함께 나란히 서 있었던 여성이 아니었던가?
“그냥… 점심때부터 낯선 차량이 계속 주차되어 있길래 와본 거였어요.”
마치 독백을 하듯 낮고 고저가 없는 목소리다.
두 여성의 시선이 부딪치자 주차장 주변이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만 같다.
“그렇군요.”
서유리는 도도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신채영 곁을 지나쳤다.
그 순간 본능이 예리하면서도 기분 나쁜 경보를 울린다.
이 여성도 천마 씨를 좋아하는 걸까? 상관없다.
이 내기의 승자는 바로 자신이 될 테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
차문을 열기 전 서유리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내 남자니까.”
“무슨 소리죠.”
신채영이 차갑게 응수했지만 서유리는 차가운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크르르르릉.
에스퍼의 시동이 켜지자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액셀을 밟자 뒷바퀴가 맹렬히 회전하더니 이내 붉은 테일 등의 잔상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