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천마, 데이트하다 (2)
일요일 아침.
운공을 마친 천마는 욕실이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후우.”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가만히 맞고 있는 천마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윽스윽.
정갈하게 몸을 닦는 천마는 순식간에 몸을 말리고, 깨끗이 다려 놓은 우리옷을 입었다.
그 비장하고도 엄숙한 모습은 전투를 앞둔 무사의 모습과 같았다.
[천마 님.]
무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부디, 제발, 모쪼록, 그냥 편하게 즐기고 오십시오.]
“편하게?”
천마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느슨한 마음이 패배를 부르는 것이지.”
[네?]
“마음을 훔친다는 건, 마문대법에서도 가장 지고한 경지다.”
도끼눈을 뜬 천마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마음은 변화하는 대자연과 같지. 때로는 따스한 햇살에 봄바람 같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다가도, 먹구름이 끼고 성난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니까.”
[…….]
천마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천품과 자질을 타고난 굳센 심지의 도인이라 할지라도, 삼류 창기의 유혹에 견정지심이 파탄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코 방심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군요. 방심은 금물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무명의 눈 센서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저쪽 세계에선 대적할 자가 없는 고금제일의 고수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쪽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천마는 희대의 또라이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천마 님! 이건 정말 아니잖습니까?’
무명은 크게 부르짖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천마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본좌의 마음을 뺏을 것이다. 본좌는 전력을 다해 그것을 방어해야 하는 입장이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천마.
그런 그에게서 유리는 두 달 안에 천마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입장에선 건방지고도 무모한 내기였다.
천마는 지금까지 어떤 승부에서도 패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결코 서유리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 나가보도록 하지.”
정갈하게 옷을 갈아입은 천마는 금성당혜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부르르릉.
라마스에 시동을 걸자 배기음이 울려 퍼진다.
보닛을 열고 엔진 내부를 확인해 봤다. 그다음 차량 내외부를 꼼꼼히 살폈다.
밤새 손상된 곳은 없는지, 이상이 있는 곳은 없는지 면밀히 검사를 하는 것이다.
“이상 없군.”
고오오옹.
천마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멀리서 낮고 우렁한 배기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새빨갛게 물든 유선형의 스포츠카가 달려오고 있었다.
“에스퍼군.”
에스퍼.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수제 스포츠카로 가격이 무려 5억 원에 달한다. 과거 천마도 저 차량을 몰아본 적이 있었다.
끼익.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천마의 주차장 앞에 멈춘 에스퍼에서 날씬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유리였다.
“기다리고 계셨나요.”
천마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서유리를 옷차림을 살피던 천마의 눈에 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편안한 바지에 셔츠,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블루종을 걸치고 있다.
요란하게 차려입고 올 줄 알았건만. 복장은 수수하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 담백했다.
사실상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비싼 명품 옷이긴 하지만, 그런 것을 천마가 알 길은 없고 알 바도 아니었다.
“본좌는 준비됐다.”
시동이 걸린 라마스를 가리키자 서유리가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이게 그때 말씀하신 라마스군요.”
그녀 역시 잔뼈 굵은 차량 마니아였다.
차량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올드카가 실제로 돌아다니다니. 어둠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유리는 세심하게 차량의 내외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과 손길은 천마 못지않게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과연.’
서유리의 스스럼 없는 태도를 지켜보던 천마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에게 호의를 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병기를 칭찬하는 것. 서유리는 정공법을 택한 듯 보였다.
“출발하라. 본좌가 따라가겠다.”
“네? 같이 탈 건데요.”
“거절하지.”
“천마 씨는 제 차량에 타봤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저도 천마 씨가 자랑하는 차량에 한 번 타봐야 하지 않겠어요?”
서유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차량에 영혼이 있다는 것이 어떤 건지도 알고 싶고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천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서유리가 차량에 타자 대시보드 위로 작은 나노봇이 머리를 긁고 있었다.
[아하, 안녕하세요. 서유리 님. 처음 뵙겠습니다.]
무명이 넉살 좋은 태도로 인사를 건네자 서유리가 입을 벌렸다.
“천마 씨. 나노봇도 있었어요?”
“점주가 줬다.”
서유리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나노봇이 있다면 휴대폰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노봇이 있으면 휴대폰을 살 필요가 없겠군요.”
그녀가 낙담한 표정으로 말하자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도록 하지.”
“네?”
[던전에 갈 때를 제외하시고는, 천마 님은 평소 절 매장에 두고 다니십니다.]
“왜…….”
무명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유리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천마가 미등록 각성자라는 걸 상기한 것이다.
말이 인테리어지, 천마가 하는 일은 속칭 ‘노가다’였다.
힘을 가졌음에도 평범한 일을 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마 씨는 정말 성실하구나.’
1급 각성자를 능가하는 힘을 가진 자가 평범한 사람들도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니.
내공을 얻기 위해 인테리어 시공일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서유리.
그녀는 새삼 천마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군요.”
서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명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천마 님을 모시고 있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무명?”
[그렇습니다. 천마 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죠.]
서유리는 눈을 껌뻑였다.
능글맞다고 느껴질 만큼 감정과 개성이 녹아 들어간 목소리. 결코 시중에 판매되는 일반 나노봇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면 되나.”
천마가 묻자, 무명을 빤히 바라보던 서유리가 말했다.
“전자랜드요.”
“안내하라.”
천마의 말에 무명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부아아아앙!
날카로운 배기음과 함께 알피엠이 치솟는다.
천마는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주행으로 시내의 도로를 누볐다.
“와아.”
서유리는 감탄성을 내었다.
“그 사이 실력이 더 늘으셨군요.”
출발하기 전 천마의 라마스를 살펴보았던 그녀는, 이 라마스가 레이싱용 파츠로 도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경주용으로 세팅한 차량은 공도 주행용으론 맞지 않는데.”
오직 빠른 스피드와 날카로운 코너 탈출을 위해 개조된 라마스.
이 예민하고 까탈스런 차량을 천마는 마치 세단처럼 부드럽게 몰고 있었다.
“다재다능한 녀석이지.”
천마의 대답에 서유리가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조금 빨리 달릴 수도 있을까요?”
콰우우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마는 기어를 다운시키고 액셀을 밟았다.
라마스는 번갯불처럼 움직이는 천마의 손길에 즉각 반응했다. 마치 그의 손과 차량에 신경이 연결된 것만 같다.
부우우웅!
요란한 배기음과 함께 라마스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분명 과격한 주행이지만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대단해요.”
서유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에도 천마는 훌륭한 드라이버였으나, 지금은 기량과 실력이 모두 정점에 달해 있었다.
끼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라마스가 어느새 전자랜드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대시보드에 앉아 있던 무명은 천마와 서유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같이 안 가니?”
서유리의 말에 무명이 천마를 슬쩍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있으면 두 분께 방해만 될 뿐입니다. 차에 있을 테니 천천히 다녀오세요.]
마치 데이트를 하는 친구를 위해 알아서 눈치 있게 빠져주는 모습이다.
서유리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어디로 가면 되나.”
차에서 내린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주차장 내부엔 가족 단위의 고객들이 많이 보였다.
시계를 힐긋 바라보던 서유리가 1층 푸드코트를 가리켰다.
“우선 밥부터 먹죠.”
“밥이라니.”
“벌써 점심 먹었어요?”
넉살 좋은 서유리의 태도에 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휴대폰을 사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휴대폰만 산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래서 밥을 먹겠다는 건가.”
“뭘 하든 밥을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지 않겠어요?”
서유리는 싸움을 앞둔 장수처럼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배가 든든해야 싸움이든 뭐든 할 수 있겠죠.”
턱을 쓰다듬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점심 무렵이라 푸드코트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천마는 서유리와 함께 단출한 식사를 마쳤다. 이후 휴대폰 매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천마는 극히 무심한 성격인데다, 과학기술 수준은 조선시대 수준에 멈춰 있는 곳에서 왔다.
그럼에도 그는 기계에 대해선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무명이라는 독특한 기계생명체라는 존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던 점원이 진열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손목에 부착할 수 있는 초소형 휴대폰이었다.
“이 제품은 휴대가 간편에서 외부에서 일하시거나, 이동이 잦은 분들이 가장 선호하시죠.”
외관은 마치 흑요석을 깎아 만든 듯한 팔찌 형태였다.
“고객님. 팔을 내밀어 주시겠어요?”
천마가 팔을 내밀자 점원은 팔찌 형태의 휴대폰을 천마의 손목에 올려두었다.
찰칵.
알아서 크기를 조절한 휴대폰이 천마의 손목을 휘감더니, 이내 체결음과 함께 붉은 빛을 번뜩였다.
“화면이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화면.”
천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빛이 쏟아지더니 눈앞으로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이 제품은 휴대가 간편해서 외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가장 선호하세요. 완전 방수에다 태양열로도 충전이 가능해요. 음성명령어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용법도 간단하고요.”
“흠.”
“하지만 아무래도 최신형이다 보니 가격이 너무 비싸서… 웬만하면 권해드리진 않지만요.”
천마는 손목에 찬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팔찌 형태의 휴대폰은 매우 얇은데다 착용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어떻습니까, 고객님.”
이마에 땀을 닦은 점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덧 두 시간째 상담 중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휴대폰의 역사와 분류, 쓰임새 등을 읊어야 했고, 나머지 한 시간은 매장 내에 진열된 모든 휴대폰의 기능을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시연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들었던 말은 모두 시큰둥한 대답뿐이었다.
‘이런 진상들이 그래도 꼭 물건 하나는 사 간단 말이지.’
다년간 휴대폰을 판매했던 점원은 천마가 반드시 휴대폰을 구매하리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이 거구의 진상 옆에는 명품 옷을 휘감은 미녀가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쓸 만하군.”
휴대폰을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내내 어두웠던 점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얼만가.”
천마의 물음에 점원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부가세 포함해서 천오백사십만 원입니다!”
전자랜드 내부 커피숍.
“…그냥 사지 그랬어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서유리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제가 선물로 드린다니까.”
천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다.”
“왜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마가 양심에 구멍이 숭숭 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짜 선물을 거절할 만큼 청렴한 사람도 아니었다.
심지어 서유리의 차량 중 영혼이 있는 차가 있다면, 무상으로 주는 조건으로 애프터 신청을 받아들인 천마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갑자기 왜 휴대폰 선물을 거부한 것일까.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네?”
송곳니를 드러낸 천마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금전이나 향응을 제공받는다고 본좌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간 서유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천마는 오늘의 만남조차 탐색전 내지는 심리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한 서유리가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왜 이 무뚝뚝하고 괴팍한 사내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걸까? 세상엔 좋은 남자들이 많은데.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질 생각은 없어요.’
마음을 다잡은 서유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뜨자 커피숍은 굵은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피어 있는 숲속의 풍경으로 변했다.
천마는 낭인무사처럼 낡고 헐렁한 흑의를 입고 있었고, 그녀는 어느새 몸에 딱 붙은 백의경장을 입고 있었다.
차앙.
허리춤에 있는 날카로운 보검을 빼 들은 그녀가 예리한 초식을 펼쳤다.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해요?”
“무명에게 연락하라.”
“평소에 두고 다니신다면서요.”
“점주에게 연락하면 되잖나.”
천마의 냉정한 방어에 서유리는 예리한 변칙공격을 쑤셔 넣었다.
“저는 천마 씨가 일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걸요.”
피잉.
수세에 몰린 천마는 잠깐의 침묵 끝에 간신히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본좌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구경거리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걸 직감한 서유리가 배시시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일하는 걸 보고 싶은 것뿐이죠.”
이대로 가면 서유리의 기세에 말릴 것이 분명했다.
결국 천마도 검을 뽑아 들어 응수하기 시작했다.
“전에 일을 관뒀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지.”
“고마워요. 저한테 관심을 가져줘서요.”
아직 천마가 싸움의 주도권을 잡기엔 시기상조였다.
서유리의 능수능란한 반격에 천마는 낭패스러움을 꾹 누른 채 방어에 몰두했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지.”
“그런가요.”
서유리는 웃으며 공격을 계속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동료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 길드에게 전술 분석을 해주는 업무를 맡고 있었어요. 하지만 얼마 전에 관뒀어요.”
“어째서 관둔 거지.”
“스카웃 제의를 받았거든요. 이 도시에서 다시 일하는 것으로.”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린 그녀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뭐, 하는 일은 협회에서 했던 것과 비슷해요. 던전 코어라든가, 히든몬스터에 관한 연구라고나 할까요.”
“비슷하다… 라. 협회에서 하는 일이 불만이라고 관두지 않았나.”
“맞아요. 천마 씨는 기억력이 정말 좋으시군요.”
천마가 입을 다물자 서유리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검을 검집에 넣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제가 제의받은 일은 순수한 연구예요. 설령 잘못 판단한다고 해도 누가 다치거나 피해 보는 일은 없죠.”
서유리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웃음이다. 그 당시 그녀는 협회에서 하는 일에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때보다 마음이 편안한 듯 보였다.
‘역시 무인 체질은 아니었나.’
무림인이라고 모두 칼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파던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서류를 작성하는 문사들이 있기 마련. 서유리는 아무래도 문관 체질인 것 같다.
“그렇다면 본좌도 그대가 일하는 걸 구경할 순 있겠군.”
“아, 죄송해요. 보안등급이 높은 국가중요시설로 지정된 곳이라서요. 외부인은 절대 방문이 안 되는 곳이에요.”
그러자 천마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본좌도 그대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줄 의무는 없겠군.”
번쩍.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냉정한 공격에 서유리는 가슴 부위에 조그만 상처를 입었다.
동시에 서글픔과 황당한 감정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천마와 일상적인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조금 더 천마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휴대폰을 산다는 이유로, 대형 쇼핑센터에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려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그저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할 뿐이다.
그저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싫었나요.”
가슴의 상처를 억누른 서유리가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