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45화 (245/285)

제245화. 다가오는 자, 돌아오는 자

옆에 앉아 있는 신채영을 슬쩍 바라본 초홍이 미소 지었다.

“거길 조사하자는 거지?”

“맞아요.”

“잠, 잠깐. 블랙마켓은 또 왜?”

한만재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초홍이 말했다.

“그들이 건달이든 미등록 각성자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들이, 시중에선 결코 구할 수 없는, 대 각성자용 병기를 사용했다는 거죠.”

“타일런트 말입니까?”

“네. 그 위험한 무기를 정부 쪽에서 떡 하니 반출했을 리 없잖아요. 당연히 흔적을 지우기 위해 돌고 돌아 블랙마켓 쪽에 풀어놨을 거예요.”

“아아.”

한만재가 탄성을 지르자, 신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조사하다 보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룸미러를 슬쩍 바라본 유은호가 탄성을 질렀다.

“팀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채영이. 너도 진짜 대단하다.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단 말야?”

“렌즈와 메모리를 파손시킨 건 내 실수니까.”

“실수는 무슨. 네 말대로라면 바늘 수갑을 찬 채로 염화 스킬 각성자 열한 명을 처리한 거나 다름없잖아. 누가 널 힐러라고 생각하겠냐.”

유은호의 칭찬에도 신채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유은호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좋아, 좋아. 그럼 빨리 그쪽부터 뒤집자고.”

“됐어. 은호야.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초홍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유은호와 블랙마켓과는 여러 가지 악연이 얽혀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이번 일로 유은호를 자극시키고 싶지 않았다.

“왜 그걸 팀장님이 해요. 제가 가면 하루 만에 털어버릴 수 있는데.”

“은호야.”

“설령 협회 조사단을 꾸려도 아래쪽부터 털면 몇 개월은 걸려요. 그냥 그쪽은 제게 맡겨요.”

신채영의 박살 난 나노슈트를 바라보는 유은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단번에 대가리부터 찾아낼 테니까.”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살기 어린 유은호의 모습을 바라보던 초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으면 정말로 조사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뭐, 열심히 해.”

그때 신채영이 불쑥 나섰다.

“네가 그러는 동안 난 좀 쉬고 있을 거니까.”

“쉬다니? 왜?”

유은호가 눈을 껌뻑거리자 신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응, 난 당분간 할 일이 있어.”

“할 일? 뭔데?”

긴 숨을 들이마신 신채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밥 먹을 거야.”

일요일.

시공과 던전 재료 채취 등으로 바쁘게 일과를 보내는 천마에겐, 일요일이란 그야말로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이다.

[천마 님도 이제 이 세계의 문화에 적응을 했나 보군요.]

TV를 볼 때도 엄숙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천마였다.

하지만 지금은 구봉산 맛과를 집어먹으며 옆으로 누운 채 발을 까닥이고 있었다. 여느 대한민국의 남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코를 후비적거린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흐뭇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탕탕탕.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었다.

충전스테이션에서 일어난 무명이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야.”

분명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달칵.

팔을 쭈욱 뽑아낸 무명이 도어락 버튼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자, 햇살에 반사된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하얀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하트 코트를 입은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보이시한 옷차림과 달리 엷지만 화사한 톤으로 화장을 했다.

어딘가 낯익은 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무명이 펄쩍 뛰었다.

[어어, 신채영 님?]

놀랍게도 눈앞의 미녀는 바로 신채영이었다.

늘 입던 칙칙한 색채의 나노슈트나 딱딱한 정복이 아니라 사복 차림이다.

여전히 칼단발을 하고 있지만 엷게 화장도 했다. 차가운 마네킹에서 조금은 화사한 마네킹으로 변한 듯한 모습이다.

[어쩐 일로 꽃단장을 하셨습니까?]

신채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무명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저씨 있어?”

[천마 님이요? 계십니다.]

“뭐 해.”

[TV 시청 중입니다.]

“저녁은.”

[저녁이요? 아뇨. 아직 드시지 않았습니다. 아, 설마?]

무명이 있지도 않은 입을 가리자, 신채영이 덤덤히 말했다.

“같이 밥 먹으려고.”

무명은 현관문 앞에 선 채 미적거렸다.

천마는 TV 시청 중엔 어지간해선 꼼짝도 하지 않는 편이다.

한 입만 먹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고기를 사준다고 해도 나올 것 같지 않다.

[저어, 천마 님께선 TV 시청 중이시니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시는 게 어떨까요?]

“TV는 다음에 봐도 되잖아.”

[아, 그게…….]

“밖이 왜 소란스럽나.”

안쪽에서 들려오는 천마의 외침에 무명이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말했다.

[앞쪽 빌라에 사시는 신채영 님께서 천마 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신다고 합니다.]

“저녁?”

천마가 눈썹을 찌푸릴 무렵, 현관문에 서 있던 신채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밥이나 먹죠.”

천마는 고개를 돌려 신채영을 힐긋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맨얼굴도 아니고 화사한 외출복을 입은 상태다. 평소와는 달리, 눈동자에 미세한 감정의 색채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상한 생선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먹어라.”

“왜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린 천마가 낮게 말했다.

“귀찮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매정한 대답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황하거나 혹은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채영 역시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탁.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집어 든 신채영이 TV를 꺼버렸다.

“나가요. 아저씨 밥 사주려고 비번까지 썼단 말이에요.”

“무슨 상관이냐.”

“먹어요.”

“거절한다.”

신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은 거절해요.”

천마의 사고회로가 잠시 끊겼다.

그의 휘하엔 십만에 가까운 부하들이 있다. 그 중엔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무림을 경영하며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보고 들은 천마.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막무가내로 나오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거절을 거절한다라.”

그녀의 말을 곱씹던 천마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본좌는 거절을 거절하는 걸 거절하도록 하지.”

“고소할까요?”

“무슨 말이냐.”

“아저씨가 준 이상한 목걸이요.”

신채영은 서늘한 눈빛으로 누워 있는 천마를 내려다보았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혈압 증세가 있어요. 머리도 어지럽고 때때로 헛것이 보이고.”

“판매점에 가서 따져라.”

“병원에 갔더니, 신경계 교란을 일으키는 약물을 과다 복용한 증상이라고 하더군요.”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와 같은 신채영의 눈동자에선 냉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 목걸이에 향정신성물질 같은 게 들어 있었다는 거죠.”

“판매점에 가서 따지라고 했다.”

“고소할 거예요. 아저씨도 포함해서.”

“고소?”

신채영은 퉁방울처럼 커진 천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향정신성물질(向精神性物質)을 불법으로 유통하거나, 혹은 구매한 자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처벌받는 거 몰라요?”

천마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무명을 바라보았다.

도리도리.

무명은 천마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밥 먹을래요? 아님, 고소할까요.”

“지금 본좌를 협박하겠다는 것이냐.”

천마가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나자, 신채영이 또박또박,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밥 먹자고요.”

휴일 번화가엔 사람들이 물 밀듯 넘쳐흘렀다.

고급스런 우리옷을 입은 천마는 의외로 거리 풍경과 이질감 없이 잘 섞여 있었다.

가끔 험악한 얼굴과 근육, 붉은 눈동자 때문에 더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각성자들이 흔히 받는 시선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길을 걷던 신채영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가득 메워진 거리를 걸을 때마다 느꼈던 따가운 시선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천마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사람들은 살벌한 천마의 시선을 가능한, 혹은 애써 피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인상을 가진 천마와 나란히 걷는 탓에, 신채영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의외의 장점이네.’

신채영은 속으로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시내에 볼일이 있으면 이 아저씨를 반드시 데리고 다녀야겠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번화가 중심 상가의 어느 커피숍.

작은 의자에 몸을 구겨 앉은 천마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녹차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밥집이냐.”

“찻집인데요.”

“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밥 먹기 전에 차를 마셔야죠.”

“어째서.”

테이블에 올려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 신채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 전에 차 한잔 마시면 입맛을 돋우잖아요.”

“차는 식후에 마시는 것이다.”

“요샌 이렇게 하는 게 유행이에요.”

사실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이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언제나 던전 내의 카페를 이용했던 신채영.

모처럼 번화가에 나왔으니 시중 카페를 한번 둘러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수향입향(隨鄕入鄕)이라.”

<장자(莊子), 산목(山木)> 편에 나오는 말이다.

외지인은 현지 문화와 풍속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지.”

천마는 할 수 없이 테이블에 놓인 차를 훌훌 마셨다.

대화 소리 사이로 조용한 음악이 흐른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신채영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산만하면서도 경쾌한 카페의 분위기가 왠지 마음에 든다.

예전엔 번잡스럽게만 느껴졌던 시내의 풍경도 지금은 다채롭게만 느껴질 뿐이다.

‘의외로 괜찮네.’

엷게 미소 짓던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느 순간부터 천마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요.”

“다 마셨다.”

“밖에 구경도 좀 해요. 풍경 좋잖아요.”

“본좌의 눈엔 번잡스럽기만 하다.”

천마의 대답에 신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천마와 같은 시선으로 도심을 바라보았으니.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신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밥 먹으러 가죠.”

신채영이 천마를 데려간 곳은 골목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엔틱 가구와 낡은 소품들로 채워진 매장 내부는 마치 파리 뒷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 안에 들어온 듯하다.

달가닥.

테이블 위에는 신채영이 주문한 다양한 요리들이 올려지고 있었다.

천마는 특히 안심스테이크가 입맛에 맞았는지 연신 고기를 잘라 입에 넣고 있었다.

“흠.”

포크를 쓰는 게 귀찮은지 천마는 나이프 하나로만 고기를 썰고 입에 넣었다.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집어먹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묘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신채영은 오히려 그 모습이 순박하게만 느껴졌다.

“맛은 좀 어때요.”

신채영 나름대로 천마에 대한 관심을 잔뜩 녹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고저가 없는 탓에 낮고 우울한 노랫소리 같았다.

“글쎄.”

“별론가 보네요.”

그녀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짓자 천마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진 않다. 재료 손실부터 조리까지 상당히 공을 들인 음식이니.”

그리고 접시에 남아 있던 고기 조각을 입 안에 넣으며 말했다.

“어쩌면 본좌가 백반과 작장면에 너무 길들여진 것일 수도 있겠군.”

순간 신채영이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한식이 입에 맞는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이번엔 천마가 신채영에게 물었다.

“과거에 본좌를 본 적이 있나.”

“아뇨.”

“이상하군.”

“뭐가요.”

천마는 대답 대신 신채영을 빤히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 세계에서 천마와 인연이 닿은 자들은 대부분 무림에서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으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사이,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레스토랑의 음식은 맛있는 편이었으나, 양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천마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자 신채영이 말했다.

“더 시킬게요.”

“괜찮다. 꼭 배가 불러야 식사라곤 할 수 없으니.”

“그럼… 술이나 한잔하죠.”

“술?”

“소주 좋아해요?”

소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천마의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졌다.

어쩌면 술 이름도 이토록 맛깔 나는지 모르겠다.

“없어서 못 마시지.”

천마의 대답에 신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한잔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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