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초홍의 다짐
특수대응팀 빌라 앞.
“그럼, 또 인사드리러 올게요!”
한호조는 옥탑방에 올라 천마와 무명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천마는 시큰둥한 표정이었으나, 무명은 서운한지 연신 손을 흔들며 외쳤다.
[호조 군. 그동안 잘 지내요.]
“네!”
씩씩하게 외친 한호조는, 짐이 가득 실린 한만재의 트럭에 올라탔다.
행여 또다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특수대응팀의 주둔지가 아닌 각성자 학교 기숙사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협회 다음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각성자들이 모여 있는 각성자 학교는 테러나 위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골치 아프군요.]
옥탑방 난간 위에서 한호조가 떠나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무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협회와 정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만, 저렇게 대놓고 암살 요원을 보낸 역사는 없습니다.]
석상처럼 서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천마를 보자, 무명이 다시 말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저 특수대응팀도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고요.]
상황을 미루어 보아, 특수대응팀은 이미 국가 음모에 연관된 건 기정사실이었다.
게다가 통합정보국에서 보낸 암살팀이 천마의 집까지 쳐들어왔다.
앞으로도 천마가 저 일에 엮일 확률은 매우 높았다.
“…….”
천마가 대답이 없자 무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장채원 님께 말씀드려서 천마 님께서도 이사를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사?”
천마가 반응하자 무명이 재빨리 말했다.
[계속 특수대응팀의 주둔지 옆에 살다간, 또다시 이런 싸움이라던가 음모에 엮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재밌겠군.”
전투와 음모.
정파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까지 모조리 제압하고 무림일통의 위업을 달성한 천마.
그런 그에게 전투와 음모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일상일 뿐이었다.
[어쩌면 이미 천마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장채원 님. 아니, 동원 님께 연락해 이 일을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천마의 눈이 싸늘해졌다.
“절대로 하지 마라.”
[네?]
“앞으로 벌어질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무명은 그제서야 천마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성향인지 잠시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즐거움.
자신을 헤치려는 암살 시도도, 알 수 없는 음모가 자신의 주변을 뒤덮는 것도.
천마에겐 무료함을 달래주는 즐거운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
천마 역시 무명의 성격을 훤히 알기에, 다시 한번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 본좌의 보호를 위한다는 등의 핑계로, 본좌에게 벌어진 일을 점주와 동 차장에게 알리지 마라.”
[천마 님.]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본좌는 결코 네 녀석을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나?”
무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각성자 유전체 해독 연구소, 지하 도시 연구실 내부.
“꽤나 허를 찔렸군그래.”
스크린을 바라보던 김수웅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의 시선이 이른 곳엔 데이터 마이팅 팀장, 진성령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특수대응팀을 건드릴 줄이야. 그것도 암살팀을 보내 통째로 날릴 각오로.”
김수웅의 중얼거림에 진성령이 심호흡을 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외적으로 특수대응팀은 던전 방어팀의 업무를 협응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 그런데 통합정보국이 고작 좌천된 일개 팀의 보안 정보를 빼내려 했다…라.”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안 그런가.”
“그렇다면…….”
“정보가 새어 나간다는 거지.”
김수웅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자, 진성령은 밀실 내부의 공기가 삽시간에 냉각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철컥.
말없이 서 있던 김수웅이 손가락을 조작하자, 스크린에 떠 있던 정보가 바뀌었다.
“이 건은 해결이 되었나.”
스크린을 올려다본 진성령은 눈을 번뜩였다.
“아직입니다.”
“그랬나.”
몸을 돌린 김수웅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 무심하고도 차가운 음성은 수백 마디의 비난과 호통보다 더 강력한 압박감을 주었다.
지잉.
금속 문이 열리고 김수웅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몸을 조이고 있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진성령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밀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한 여성의 사진과 프로필이 띄워져 있었다.
바로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데이터 마이닝팀 소속 요원, 서유리였다.
* * *
우리옷을 작업복 형태로 변환시킨 천마가 폐기물 마대에 쓰레기를 담고 있었다.
점심 무렵부터 철거를 시작한 철거는 해질 무렵에나 끝이 났다.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일을 한 탓에, 천마의 붉은 머리칼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흠.”
밖으로 나온 천마는 라마스가 아닌 길 건너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온 천마의 손엔 2리터짜리 커다란 이온 음료가 들려 있었다.
꿀꺽꿀꺽.
붉은색으로 물든 음료를 단숨에 들이켠 천마가 크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사실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느 시공자들처럼, 인테리어 일을 끝마친 후에 마시는 이온 음료의 청량감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후우.”
음료 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천마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커피를 손에 쥔 채 시끌시끌하게 떠드는 여섯 명의 남녀 무리가 보였다.
근방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일까?
그런데 무리 중 유독 웨이브 진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상큼한 미녀가 눈에 띈다.
다름 아닌 김찬원의 소개로 만났던 각성자 서유리였다.
지방으로 떠났다는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흠.’
서유리를 본 순간, 천마의 머릿속에는 묘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당시,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던 천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주 서 있는 지금은 알아볼 수 있을까?
띠리링.
그때 알림음과 함께 초록 불이 켜지고, 까르르 웃는 무리들이 천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천마는 묘한 기시감과 함께 당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마 님은 언제나 다른 곳을 보는군요.
깜짝 놀란 천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서유리의 시선은 동료에게 고정된 상태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랬나.’
방금 들었던 환청은 서유리와 꾹 찍어 닮았던, 적천상단의 임선아의 목소리였다.
동료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임선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이상한 노릇이군.’
천마는 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만났고, 그 중엔 무림에서 만난 인물들과 겹쳐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무림에서 봤을 당시엔 별 다른 기억으로 남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닮은 자를 만나면, 그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당시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 세계는 혹시 무림과 연결된 것은 아닐까?
얼마 전 김세라를 구해줄 땐 아예 그 당시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심지어 무림에서 소환했던 몽마마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천마는 줄곧 자신이 내공이 끊긴 채로 이곳에 온 건, 누군가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림에 자신을 능가할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누가, 어떻게, 이곳으로 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심되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신인가.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천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신들은, 천마가 알고 있었던 ‘신’이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오직 자신이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며, 그 힘도 맡은 바 임무에 국한된다.
예를 들어 화령신은 꽃의 생멸에 대해서만 관여할 수 있고, 토룡신은 일대의 땅의 토양을 담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신이라기 보담, 조금 독특한 직업을 가진 존재라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확률은 적을지도…….”
심지어 이곳의 신들은 인간세계에 관여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고작 폭탄 몇 개 처리한 것만으로, 자신을 경계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천마를 골치 아픈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굳이 천마를 이곳에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군.”
고개를 저은 천마가 등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동료와 함께 길을 걷던 서유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거구의 사내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았다.
“유리 씨, 왜?”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내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도, 밤하늘을 비추는 달도 시샘할 만큼 아름다운 사내였다.
고개를 흔든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렸다.
* * *
통합정보국의 암살 시도가 벌어진 이후, 특수대응팀 빌라 내부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언제나 가족처럼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왠지 모를 침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쩌면 암살 시도 때문이 아니라, 한호조가 각성자 학교로 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은 어른스럽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한호조.
그 아이가 있는 것만으로 이곳은 주둔지가 아니라, 따스함이 흐르는 가정집처럼 바뀌었으니까.
늦은 오후.
초홍은 일찌감치 선술집 노병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 테이블에서 잔을 닦고 있는 장금선이 보였다.
“어르신.”
초홍이 정중히 인사하자 장금선은 빙긋 웃었다.
“일찍 왔구나.”
그 미소는 너무나 인자하여, 차갑게 식어 있던 초홍의 마음을 살짝 데워주는 듯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짧은 장금선의 대답은 초홍이 하려고 했던 말 들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당분간은 알바는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이제 제대로 협회 쪽의 일을 할 생각이 든 게냐.”
“아뇨. 그게 아니라…….”
심호흡을 한 초홍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통합정보국에서 암살팀을 보낸 일.
그 천진난만했던 유은호가 다시 암살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일. 그리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천마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허어. 인연은 인연이구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장금선이 깊게 탄식을 했다.
“그 양반이 주둔지 앞에 살고 있었다니.”
“어르신의 말씀이 옳았어요. 만약 저희 팀이 천마 씨를 자극하거나 잡아가려 했다면, 지금과 같은 도움을 받지 못했을 테죠.”
초홍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이 호의와 정감이라는 걸 발견한 장금선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그리고 닦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게야.”
“어떤 게 말인가요?”
“앞으로 홍이 네가 하려는 일은 협회와 통합정보국. 두 거대조직의 구린 부분을 캐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장금선은 초홍이 어째서 선술집 아르바이트를 관두려고 하는지를 대번에 짐작하는 듯 보였다.
“특히 김수웅 실장은 더욱 집요하게 감시하고 압박하려 할 게다. 만약 네 존재가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대번에 너를 구속하려 할 테고.”
장금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통이 넓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 스승처럼 말이다.”
장금선의 손목부터 어깨까진 바늘 수갑 모양의 금속이 빽빽이 붙여져 있었다.
이것은 협회에서 특수 제작한 바늘 수갑으로, 육체각성도뿐만 아니라 스킬 발휘가 불가능하도록 집중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기능이 있다.
“어르신께선 그저 사람들을 구하려 했을 뿐이잖아요.”
손목의 수갑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초홍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강력한 스킬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르신께서 이런 제재를 받아야 하는 거죠?”
“홍아.”
손을 뻗은 장금선은 초홍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제어할 수 없다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단다.”
장금선은 우리나라 최고의 정신 조작 스킬을 가지고 있는 스킬 마스터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특수 바늘 수갑은 고위 각성자 수십 명을 제압하고도 남을 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가벼운 정신 침입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이걸 차고 있는 것이 이 스승도 마음이 편하고.”
장금선은 다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조명에 비친 바늘 수갑은 요사스럽고도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너라면 훗날 반드시 스킬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을 게다. 그러니 그 시기가 올 때까진 항상 은인자중 하여야 한다.”
장금선의 조언에 초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았어요. 말 잘 듣는 개처럼 시키는 일만 하고 살았죠.”
“홍아.”
“눈을 뜨고도 장님인 척, 들어도 귀머거리인 척 살았어요.”
초홍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박정민 실장님은… 왜 그런 말을 남긴 건지 모르겠어요.”
-거역하지 말고 순응하도록 해. 변화에 익숙해지고 체계에 적응하도록.
박정민 실장은 초홍에게 이 짧은 말을 남기고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말은 초홍, 아니, 특수대응팀 모두에게 족쇄가 되어버렸다.
“스승님께선 협회 끝까지 올라가라고 하셨죠.”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푼 초홍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버티고 버텨,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라고요.”
놀란 표정을 짓던 장금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선 게냐.”
“네.”
깊은숨을 들이마신 초홍이 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 올라가 보겠어요. 김수웅 실장을 떨어뜨릴 만큼 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