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35화 (235/285)

제235화. 천마, 의술을 베풀다

클래시카 개러지.

도심 외곽에 있는 올드카 전문 정비업소다.

이곳은 상급요괴인 강민주 남매가 운영하는 곳으로, 요괴들 사이에선 매우 유명하다.

왜냐하면 병에 걸린 하급요괴들을 위해, 치유의 힘을 가진 던전 유물을 구해주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강민주는 사무실로 찾아온 하급요괴 하석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도시에 사는 하급요괴로 얼마 전부터 원인 모를 불치병을 얻었다고 한다.

증상은 이유 없는 통증과 기력 소실.

그것은 도심에 사는 하급요괴들이 겪은 전형적인 병, 괴질(怪疾)이었다.

“저희는 더 이상 던전에 유물을 구하러 가지 않아서요.”

본래 강민주는 오빠 강윤후와 함께 던전에서 다양한 유물들과 재료들을 얻었다.

위조라곤 하지만 전산상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 각성자 등록증을 갖고 있으며, 던전용으로 제작된 버기카를 타고 다녔기에 오랫동안 한 번도 정체를 들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낙지다리 던전에서 만난 장성륜 커플의 배신으로, 정부 측 인사에게 들켜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심안을 발휘해 천마와 거래를 트지 않았더라면 강민주 남매는 어느 공터에 조용히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원래 던전에 들어가서도 안 되는 거지만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제 보살핌이 꼭 필요합니다.”

강민주의 거절에도 하석훈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큰 병원에도 가보고, 요괴병원에도 가보고 별짓을 다했지만 낫지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계속 가다간…….”

그는 결국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강민주는 하석훈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남겨진 아이.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이 잘못될까. 행여 아이 혼자 남겨질까 걱정하는 것이다.

“음.”

강민주는 침음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처럼 딱한 사정을 갖고 있는 요괴를 어찌 가만히 두고 본단 말인가.

“알겠어요.”

심호흡을 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번 방법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실드경계지역, 천마의 옥탑방.

평상에는 천마가 단정히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여성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바로 강민주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그녀는 결국 던전을 자유롭게 오가며 재료를 채취하는 천마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 남자라면 협회나 정부 쪽 요원들과 부딪치지 않고 안전히 유물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거절한다.”

하지만 천마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던전 재료 채취 의뢰는 던전 관리팀의 의뢰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귀찮게 강민주의 의뢰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이를 홀로 키우는 남성 요괴예요. 행여 자신이 아이를 돌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고요.”

강민주가 재차 애원하였지만 천마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가라.”

[저어. 천마 님.]

그때 사정을 듣다 못한 무명이 천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일일일선 님을 소개시켜 드리면 어떨까요?]

“무슨 말이냐.”

천마가 눈을 찌푸리자 무명이 다시 말했다.

[일선 님은 아픈 사람들을 돕길 원하시지 않습니까? 좀 손길이 험하긴 해도 의술 하나는 믿을 수 있고요.]

“귀찮다.”

“일선? 일선 님이 누구죠?”

강민주가 눈을 깜빡이자 무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강민주 님. 혹시 던전 속 약사가면으로 유명한 분을 아십니까? 예전에 몇 번 뉴스에서도 나왔는데…….]

“약사가면이라면, 그 고문 범죄자?”

강민주가 입을 벌리자 무명이 둥그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뇨. 딱히 범죄자는 아니고… 원래는 요신 님인데.]

“약사가면이 요신 님이라고?”

강민주가 입을 벌리자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의술이 매우 뛰어난 요신 님인데, 아마 그분이라면 아픈 요괴분을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요신 님이 아픈 분을 치료해 주신다고…….”

잠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신 님이라면 더욱 힘들잖아. 부탁한다고 아무나 치료해 주지도 않을 테고.”

대지유신들은 인연을 매우 중시한다.

아무나 찾아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며, 신력을 발휘하는 것도 인연이 닿아야만이 가능하다.

만약 대지유신이 부탁을 해서 만나거나 신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요괴들은 모두 신을 찾아가 빌었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일선 님은 천마 님과 깊은 인연이 있으신 분이니까요. 천마 님의 소개로 왔다고 하면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겁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가 인상을 썼다.

“왜 본좌의 이름을 거기다 갖다 붙이는 것이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요괴분들이 대지유신 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천마의 자존자대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무명은,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천마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천마 님 정도 되는 분의 이름을 팔아야 간신히, 만날 수 있는 거죠.]

“흠.”

[안 되겠습니까?]

무명의 물음에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하라.”

던전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외딴 산의 숲속.

그곳엔 아주 허름한 판잣집이 있다. 바로 하루에 착한 일을 반드시 한번은 실행하는 요신, 일일일선의 거처다.

“여기가 약사가면… 아니, 일일일선 님의 집.”

판잣집을 바라보는 강민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지유신과의 만남. 그것은 요괴들의 입장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도심에서 바삐 살아가는 요괴들은 대지유신들과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녀의 옆에는 깡마른 남성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바로 괴질에 걸린 하석훈이었다. 강민주는 무명이 위치를 알려주자, 아예 그를 데리고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최소한 홀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무명의 말을 떠올린 강민주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작은 나노봇이 평범한 기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지유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 줄이야.

심호흡을 한 강민주가 매우 조심스럽게 판잣집의 문을 두들겼다.

탕탕탕.

“계세요?”

탕탕탕.

아무리 두들겨도 안쪽에선 반응이 없다.

잠시 고민하던 강민주가 조심스럽게 판잣집의 문을 열 찰나,

“누구세요?”

뒤에서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주전자 가면을 쓰고 있는 여성이 왕진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일일일선 님이구나.’

강민주는 대번에 그녀가 일선이라는 걸 깨닫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선 님. 저희는…….”

“어라.”

일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석훈의 낯빛을 보며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시군요. 안색도 창백하고.”

의술이 뛰어난 요신이라더니, 한눈에 하석훈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네? 아, 네에.”

하석훈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일일일선이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면 들어오시겠어요?”

일일일선이 머무르고 있는 판잣집은 주거 공간이라기보다 연구실처럼 생겼다.

곳곳에는 실험 도구들이 가득했고, 한켠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거실을 지나쳐 한쪽의 문을 열자, 그곳엔 마치 진료실과 같은 방이 보였다.

책상 위엔 여러 가지 책이 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의자와 간이침대도 놓여 있었다.

“이쪽에 누우세요.”

일선이 간이침대를 가리키자 하석훈은 얼른 그곳에 누웠다.

“역시 그렇군요.”

누워 있는 하석훈의 몸을 연신 촉진(觸診:손으로 만져 진단함)하던 일선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혈이 모두 틀어막혔군요.”

“네?”

강민주가 눈을 크게 뜨자 일선이 차분히 설명했다.

“몸 안의 기와 피가 잘 돌지 않으면 원인 모를 병이 계속 생겨나요. 반대로 기혈이 잘 순환하면 어떠한 병도 이겨낼 수 있죠.”

원인을 안다면 치료도 가능할 것이다

하석훈이 약간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보통의 경우라면 약과 침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 오랫동안 혈행이 정상적이지 못한데다 오장육부의 기능이 모두 약화되어 있어요. 이래 가지곤 약과 침 가지고는 치료가 불가능 한 수준이니까요.”

“불가능…….”

하석훈의 얼굴은 해골처럼 얼굴이 변해 있었다.

대지유신이 불가능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너무 걱정 마세요.”

하석훈을 응시하던 일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과 침으로 안 된다는 것이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 그런 겁니까?”

“네, 수술로 치료할 수 있어요.”

다시 하석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선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기혈을 뚫는 수술을 하기 위해선 전문가가 한 명 더 필요해요.”

“전문가요?”

강민주가 눈을 깜빡이자 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혈맥경락골수(血脈經落骨髓)에 정통하고 인체구조를 저만큼이나 잘 아는 전문가가요.”

“일선 님만큼이나 말입니까?”

“네. 한 사람이 기혈의 흐름을 헤아려 길을 잡아주고, 한 사람이 뚫어야 하는 방식으로 치료해야 하니까요.”

“으음.”

강민주와 하석훈은 서로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난관에 봉착했다.

의술에 정통한 요신만큼이나 인체에 정통한 전문가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팔짱을 낀 채 더없이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선.

그러다 문득, 강민주와 하석훈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네? 아, 네에.”

강민주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마 씨가 알려주셨어요. 일선 님과 잘 아신다고 하셔서…….”

“천마 님이요?”

일선은 반갑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렇군요. 천마 님께서 저를 위해 환자를 보내주셨군요.”

말을 잇던 일선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천마 님이라면 가능하겠군요!”

“천마 씨가요?”

“천마 님께선 기를 움직여 육체의 힘을 증강시키는 법에 도통하시죠. 한마디로 기혈의 전문가라고나 할까요.”

“그런 건가요?”

환하게 웃던 강민주는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분은 저흴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

강민주는 지금까지 천마처럼 야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설령 일선이 엎드려 부탁한다고 해도 도와줄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선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천마 씨는 반드시 도와주러 올 테니까요.”

그리고 한 팔을 뻗어 은색의 꽃을 피어 내었다. 바로 신력으로 만든, 은총의 꽃이었다.

며칠 후.

“흠.”

일선의 판잣집에 도착한 천마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뢰라고 해서 오긴 왔지만 보수가 매우 짜다. 은색 두 개의 은총 꽃. 즉 2년의 내공뿐이다.

무엇보다 신뢰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환자를 치료하는 조수 역할을 하라니.

“이러한 일에 본인을 필요하단 말이외까?”

일선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중병을 얻은 요괴의 몸속 기혈의 운행을 모두 파악할 뿐만 아니라, 미세한 힘으로 그 막힌 곳을 모조리 뚫는 작업을 하는 것.

천마의 입장에선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고작 2년의 내공을 얻자고 시도하기엔 성가신 작업이기도 했다.

“차라리 의술을 가진 행림을 부르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본인이 잘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천만에요. 이 일은 천마 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천마의 시큰둥한 말에 일선은 손안에 핀 은총 꽃을 가리켰다.

“이 은총 꽃은 천마 님을 생각하고 만든 거예요. 만약 천마 님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천마는 간이침상에 누워 있는 하석훈을 힐긋 바라보았다.

괴질로 인해 병색이 완연한데다 오랫동안 식사를 못 한 탓에 몸이 볼품없이 말라 있었다.

“잘 아시는 분이시오?”

“네?”

“저자를 위해 본점에 신뢰를 넣은 것이 신기해서 말이오.”

천마의 물음에 일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연이 닿은 셈이지요.”

“인연?”

“저 환자는 강민주 씨에게 치료를 부탁했어요. 그리고 강민주 씨는 저를 잘 아는 천마 씨에게 다시 치료를 부탁했죠. ”

가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자애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천마 씨의 기계는 저를 추천해 주었어요.”

놀랍게도 일선은 천마가 아닌 무명이 자신을 소개시켜 주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결국 저에게 치료받는 것도 운명이라는 거죠.”

운명.

천마가 진저리나도록 싫어하는 단어다.

게다가 인연이라니? 그건 불가의 땡중들이 자신도 모르는 일을 주워 삼킬 때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던가?

‘요신도 인연과 운명을 믿는단 말인가.’

대지유신이 절대자가 아닌 이 땅에서 자신이 맡은 일만 한다는 개념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자가 인연이나 운명을 언급하다니.

“호기심에 왔을 뿐, 아직 신뢰를 수락한 것은 아니외다.”

-경락혈맥골수에 정통한 천마 님을 잠시 조수로 쓰고 싶습니다.

일선이 복복 인테리어로 보내온 신뢰 내용은 이러했다.

천마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자신을 조수로 쓰는가 싶어, 확인차 이곳에 온 것뿐이었다.

“기왕 예까지 오신 것, 잠깐 도와주고 가세요.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그야말로 천마 님께 손해 아닌가요?”

그제서야 천마는 자신이 낚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단어와 자신을 조수로 쓰겠다는 의뢰 내용.

그 모든 건 천마라는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으음.’

천마의 입에선 불만스런 단어들이 맴돌았으나, 그야말로 제대로 낚인 셈이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보다 손해는 없으니.

“좋소이다.”

입맛을 다신 천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선의 판잣집 내부, 수술실.

그곳은 여느 병원 수술실처럼, 현미경과 전신마취기, 그리고 조도와 조도 범위까지 조정할 수 있는 무영등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천마는 깨끗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멸균 장갑과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일선도 커다란 주전자 마스크를 벗고 평범한 마스크를 낀 채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일선이 엄숙한 표정으로 메스를 들었다.

“…….”

드러누운 채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석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마취 같은 건 안 하시나요.”

“마취요?”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요?”

“큰 수술이 아니거든요.”

“근데 왜 메스를…….”

“환부를 도려내려고요.”

잠시 수술실 내부엔 침묵이 흘렀다.

‘환부를 절단하기 위해 메스를 들었다. 하지만 큰 수술은 아니다.’

하석훈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상대가 요신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이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

그때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본인이 뭘 도우면 되겠소이까.”

“우선 환자분의 기혈 운행을 헤아려 주세요.”

천마는 군말 없이 굵은 손가락을 들어 하석훈의 맥문을 잡았다.

그러자 뜨거운 무언가가 뱃속으로 흘러들어오더니 사지백해로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런.”

맥문을 통해 하석훈의 몸을 살펴보던 천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다 썩었군.”

“다 썩었다고요?”

일선도 손을 뻗어 하석훈의 맥문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군요. 몽땅 다 썩어버렸어요.”

“흠.”

“기왕 이렇게 된 거. 피를 모두 뽑고 오장육부를 새로 교체할 수밖에요.”

“몸속의 장기를 다 뽑는단 말이오?”

천마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자 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엔 인공장기가 많이 발달되어 있어요. 원래 것보다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삶을 이어나가는 데는 지장이 없죠.”

누워 있던 하석훈은 공포스런 표정을 지었다.

“분명 간단한 수술이라고…….”

“네? 네.”

“아, 다른 사람 이야긴가 보네요.”

하석훈이 안심하며 다시 눈을 감는데 천마가 말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 위를 삼분지 일 정도만 남겨놓고, 나머지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게 어떻겠소이까?”

“절반요?”

“그렇소이다.”

“하지만 위를 그렇게 많이 도려내면, 환자는 앞으로 유동식만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몰라요.”

“소림파의 스님 중에는 평생 두부와 물을 먹고 살아가는 자들도 있지요. 별거 아니외다.”

하석훈은 천마가 자꾸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말하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어…….”

“뭐냐.”

“제 얘긴 아니죠?”

“시끄럽군.”

천마는 자꾸 하석훈이 대화를 끼어들자, 지풍을 날렸다.

파팍.

낮은 소리와 함께 하석훈은 전신의 근육이 모두 마비된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입 안의 감각도 사라진 탓에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으읍?”

하석훈이 벌벌 떠는데, 허리 아래쪽이 살짝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일선이 메스를 사용한 것이다.

“으읍!”

하석훈은 몸을 움직여서 아래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마비된 탓에 고개 하나를 까닥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는 것이외까?”

“하급요괴들은 환경오염에 취약해요.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는 요괴들이 암에 걸리는 건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죠. 하지만…….”

눈동자를 가늘게 만든 일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환자분의 병은 환경오염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분명 수십 년간 잘못된 식습관을 유지하고, 특히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을 거예요.”

“피로라면…….”

“수면 부족인 거죠.”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수면 부족? 고작 잠 좀 안 잤다고 이렇게 된단 말이오?”

“고작이라뇨. 인체에 잠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요? 잠은 손상된 조직을 복구하고 면역세포를 향상시키고, 뇌에 있는 노폐물을 정맥으로 배출해요.”

일선의 중얼거림과 함께 또다시 아래쪽이 서늘해졌다.

하석훈은 천마의 신묘한 점혈 때문에 통증을 느낄 수 없지만, 죽을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설마 내 장기를 진짜 다 뽑아가는 건가?’

“어허, 이건 정말 심각하구려.”

“그렇죠?”

“일 선생의 말대로 기왕 이렇게 된 거 통째로 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려.”

“안 그래도 몽땅 적출할 생각이에요.”

“허어.”

천마의 탄성이 들려오자 하석훈의 눈동자가 하얗게 말려 들어갔다.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으으. 으으으으.’

일선이 내려놓은 메스에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던 걸 발견한 하석훈.

결국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하석훈은 신음성을 내며 눈을 떴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하얀 빛이 눈을 자극한다. 동시에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헉.”

벌떡 일어난 그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환자복이 입혀져 있으며 배 부근에 수술 자국은커녕, 자그마한 상처 따위도 없었다.

“뭐, 뭐야.”

분명 인공장기를 쓰네, 어디를 적출하네 하더니. 그게 다 꿈이었단 말인가?

끼익.

“어머, 일어나셨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주전자 가면을 쓴 일선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어떠세요?”

“그야…….”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몸을 살피던 하석훈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서야 온몸을 짓누르던 무기력함과 만성통증이 깨끗이 사라져 있음을 느낀 것이다.

“나았습니다.”

“네?”

“완벽히 나았습니다. 더 이상 통증도 안 느껴지고 몸도 깃털처럼 가벼워요!”

“다행이네요.”

하석훈의 말에 일선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출하진 않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하석훈은 배 속이 구멍이 난 것처럼 허기가 밀려 들어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그동안 완전히 사라졌던 식욕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 것이다.

“네, 배가 좀 고프네요.”

“잠시만요.”

바깥으로 나간 일선은 양손에 든 커다란 식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뜨끈한 설렁탕과 고봉밥, 그리고 깍두기가 담겨 있었다.

“시장하시죠? 어서 드세요.”

식판을 내려다본 하석훈이 눈을 깜빡였다.

“이걸… 먹어도 되는 건가요?”

보통 수술을 한 뒤에는 금식이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식사를 먹어도 되는 건가?

“물론이죠. 식기 전에 드세요.”

일선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감, 감사합니다.”

후르륵. 쩝쩝.

뜨끈한 국물이 배 속으로 들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고 혀가 녹는 것만 같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설렁탕에 밥을 말아 넣은 그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고 시꺼먼 옷을 입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천마였다.

“아, 안녕하세요.”

밥을 먹던 하석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생긴 건 험악해도 일선과 함께 자신을 치료해 준 장본인이었으니.

“흠.”

천마는 산적처럼 국밥을 떠먹고 있는 하석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 상당히 좋아졌군.”

먹고 있던 국밥을 꿀꺽 삼킨 하석훈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다행이군.”

‘내가 잘못 들었던 거야.’

장기를 뽑는다는 둥, 두부만 먹는다는 둥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모두 환청인 것 같다.

“기분은 어떤가.”

“아주 좋은데요.”

“좋다니, 다행이군.”

순간 하석훈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빛. 어딘가 모르게 동정이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낮게 혀까지 끌끌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어, 무슨 문제라도.”

“실례하지.”

대답을 회피한 천마가 황급히 문밖을 나섰다.

그제서야 하석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특히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동정의 눈빛. 그것은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다.

“일선 님.”

“네?”

“제 몸이 다 회복된 거 맞죠?”

“그럼요. 깨끗하게 회복되었어요.”

“그럼 혹시 치료 도중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일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덤덤히 말했다.

“아뇨.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데요.”

“그렇군요.”

또 내가 뭔가 착각을 한 걸 거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렁탕을 떠먹으려던 하석훈은 이어진 일선의 말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냥 안 쓰시는 장기 하나를 제거했을 뿐이에요”

“장기?”

“네, 그쪽에 탁기가 몽땅 몰려 있었거든요. 다행히…….”

“다행히.”

이상함을 느낀 하석훈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배 속을 어루만졌다.

“괜찮은데요?”

“아뇨. 거기 말고.”

“그럼 여긴가요?”

“아뇨. 거기 말고요. 좀 더 아래.”

“여기요?”

“아니, 좀 더 아래.”

하석훈의 손가락은 명치에서 점차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선의 시선은 한참을 더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의 손가락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얼어붙은 채 자신의 아래를 바라보는 하석훈을 응시하던 일선이 말했다.

“탁기가 쌓여 있, 있었다고요.”

“네?”

“어차피 안 쓰니 쌓여 있을 법도 하죠.”

“쌓여요?”

“네, 안 쓰신 지 수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주고받는 대화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하석훈은 전혀 일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설마 여기를… 제거했다고요?”

“네.”

“저랑 상의도 없이…….”

“어차피 자식도 계시고, 딱히 안 쓰시는 것 같아서.”

입술을 파르르 떨던 하석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내가…….”

“네?”

“내가 고자라니!”

쿵.

덤덤하게 앉아 있던 하석훈은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일선의 판잣집을 빠져나온 천마.

그는 산 아래에 주차해 놓은 라마스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였다.

[오셨습니까, 천마 님.]

“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시동키를 돌렸다.

부르르릉.

낮은 배기음이 울려 퍼지자 천마는 오른손으로 기어봉을 매만지려 했다.

“…….”

길다란 막대기에 둥그렇고 탱글탱글한 손잡이가 달려져 있는 기어봉.

그걸 무심히 내려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된 식습관과 수면 부족이라.”

천마의 식습관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음식은 꼭꼭 씹어 먹는다. 점심에 짜장면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푸짐한 채소와 고기, 해산물이 들어간 엄마손 백반을 즐긴다.

꾸욱.

기어봉을 움켜쥐고 기어를 변경하려 했지만, 수술 장면이 떠오르자 왠지 손에 힘이 빠진다.

“정상 수면시간이 어느 정도냐.”

[네?]

“인체를 회복시키고 면역세포를 손상시키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의 수면시간 말이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무명은 순순히 대답했다.

[최적의 수면시간은 사람마다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평균적인 성인의 수면시간은 7시간을 권장합니다.]

“7시간이라.”

한 달간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으며, 잠깐의 운공만으로 모든 피로를 풀 수 있는 천마에겐 너무도 긴 시간이다.

하지만 툭 튀어나온 기어봉을 바라보던 천마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군.”

[뭐가요.]

“잠이다.”

진지한 눈빛으로 전면을 응시하던 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잠을 좀 잘 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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